블로크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나서 며칠이 지난 후 할머니는 기쁜 듯이 내게 , 방금 생루를 만났는데 그가 발베크를 떠나기 전에 할머니께 사진을 찍어 드려도 좋은지 물어봤다고 하셨다.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고 여러 종류의 모자 앞에서 망설이는 모습을 보자 할머니께도 이런 유치한 면이 있었나 싶어 나는 조금 화가 났다. 심지어 내가 그동안 할머니를 잘못 보아 온 게 아닌지, 내가 너무 높게 평가했던 것일 뿐, 늘 믿어 왔듯이 할머니는 그렇게 초연한 존재가 아니며, 할머니와 가장 무관하다고 믿어 온 그 교태란 것을 혹시 갖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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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분이 언짢았던 것은 특히 그 주에 할머니가 나를 피하는 듯 보였고, 낮이든 밤이든 단 한 순간도 할머니를 내 곁에 붙잡아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후에 잠시 할머니와 단둘이 있으려고 호텔로 돌아오면 할머니는 안 계시다고 하거나 프랑수아즈와 방에 틀어박혀 긴 밀담을 나누면서 방해가 되니 들어오면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생루와 함께 밖에서 저녁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 내내 빨리 할머니 얼굴을 보고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에 할머니가 칸막이벽 너머에서 저녁 인사를 하러 와도 된다는 작은 신호를 보내 주기만 기다렸지만, 이런 기다림도 헛되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할머니에게서 정말로 새로운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무관심과 더불어 내가 그렇게도 기대했던 기쁨을 빼앗아 간데 대해 조금은 원망하면서 마침내 잠자리에 들어가 어린 시절마냥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아무 말도 없느 벽을 향해 귀를 기울이며 눈물 속에 잠들곤 했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권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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