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____ 13. 빌파리지 후작 부인의 마차
우리가 따라간 산등성이 길의 움푹 팬 곳에서, 나무로 뒤덮인 오솔길의 시작을 표시하는 듯한 세 그루 나무가 내게는 처음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한 폭의 그림을 이루었고, 나무들이 뚜렷이 드러난 장소가 어딘지 알 수 없으면서도 예전에 내게 친숙했던 장소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내 정신은 어느 먼 옛날과 현재라는 시간 사이에서 비틀거렸고, 발베크 근교가 흔들렸고, 나는 우리의 이 모든 산책이 허구에 지나지 않으며, 발베크는 내가 상상 속에서만 방문한 장소이고, 빌파리지 부인은 소설 속 인물이며 고목 세 그루는 우리가 읽는 책에서 실제로 거기 옮겨졌다고 생각되는 장소를 묘사하고 있어 우리가 책에서 눈을 들면 마주칠 현실이 아닐까 하고 물어보았다.
나는 세 그루의 나무를 바라보았다. 나무들은 잘 보였지만, 내 정신이 포착하지 못하는 뭔가를 숨기고 있음을 느꼈다. 마치 너무 멀리 있어 우리가 아무리 팔을 뻗고 손가락을 늘어뜨려도 이따금 그 덮개에만 잠깐 스칠 뿐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그런 물건처럼. 그때 우리는 보다 힘찬 도약으로 팔을 뻗고 더 멀리 닿기 위해 잠시 휴식을 취한다. 그러나 내 정신이 집중하고 도약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혼자 있어야 했다. 게르망트 쪽으로 산책 갔을 때 부모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듯이 이번에도 얼마나 홀로 있고 싶었던지!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사실 나는 사유 자체에 대한 노력을 요하는 어떤 종류의 기쁨을 인식했으며, 이 기쁨에 비하면 이른 기쁨을 포기하는 게으른 쾌감 같은 건 초라해 보였다. 이 기쁨은 대상이 무엇인지 예감은 하면서도 나 스스로 만들어 내야 했으며, 나는 이 기쁨을 아주 가끔씩만 느꼈고, 그러나 어쩌다 이런 체험을 할 때면 그동안 일어났던 일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게 보여, 이 기쁨의 유일한 현실에만 매달리다 보면 마침내 진정한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빌파리지 부인이 알아채지 못하게 눈을 감으려고 한순간 손을 눈앞에 갖다 대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다가 다시 집중하여 되찾은 생각을 가지고 힘차게 나무들을 향해, 아니 오히려 그 끝에서 나 스스로가 나무들을 보는 내면의 방향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나무들 뒤에서 조금 전에 알아본 것과 동일한, 그러나 어렴풋한 대상을 느꼈지만 그 대 상을 내게로 되돌려 놓을 수는 없었다. 그동안 마차가 점점 앞으로 나아가면서 나무 세 그루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저 나무들을 어디서 보았을까? 콩브레 부근에는 이런 모양으로 길이 트인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어느 해 내가 할머니와 광천수를 마시러 갔던 독일 시골에도 저 나무들을 생각나게 하는 경치는 없었다. 나무들을 본 것이 내 삶에서 아주 먼 시절의 일이었기에 그 주변을 감싸고 있던 풍경이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려, 마치 읽은 적 없다고 생각하던 책에서 어떤 페이지들을 발견하고는 감동하듯이, 내가 어린 시절에 읽고 망각한 책에서 세 그루 나무만이 홀로 떠오른걸까? 혹은 반대로 적어도 내게는 언제나 똑같은 꿈의 풍경이 있어, 그 낯선 모습이 게르망트 쪽에서 자주 경험했듯이 내가 외관 뒤에 감추어져 있을 거라 예감하고 그 신비에 도달하려고 밤을 지새우며 기울인 노력, 또는 내가 그렇게도 알고 싶었던 장소이지만 그 장소를 알게 되면서부터는 발베크처럼 아주 가식적으로 보였던 장소에 내가 다시 한 번 더 그 신비를 끌어들이려고 기울인 노력이 수면 중에 밖으로 표출된 것뿐일까? 혹은 어젯밤 꿈에서 떨어져 나온 완전히 새로운 이미지인데도 이미 지워져 버린 까닭에 아주 먼 옛날 일인 듯 느껴진 걸까? 아니면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무들로, 게르망트 쪽에서 보았던 나무들이나 수풀과 마찬가지로 먼 과거마냥 모호하고 파악하기 힘든 의미를 그 표면 뒤에 감추고 있어 나로 하여금 어떤 상념 속으로 빠져들도록 부추기면서 내가 추억을 알아본다고 믿은 걸까? 또는 어떤 상념도 감추지 않고, 단지 내 시력의 피로 탓에 이따금 사물이 공간에서 이중으로 보이듯이 시간 속에서 이중으로 보인 걸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나무들이 내게로 다가왔다. 어쩌면 나무들은 신화의 출현, 즉 예언을 알려 주는 마녀들 또는 노르넨의 원무곡인지도 몰랐다. 아니, 차라리 내게는 과거의 유령, 또는 어린 시절의 소중한 동반자나 우리의 공통 추억을 불러내는 사라진 친구로 생각되었다. 나무들은 망령처럼 나와 함께 데리고 가 달라고, 생명을 돌려 달라고 부탁하는 듯 보였다. 그 소박하고도 열정적인 몸짓 속에서, 나는 말을 사용하는 힘을 잃어버린 탓에 원하는 대로 말도 못 하고, 또 우리가 자신의 말을 짐작하지 못할까 봐 안타까워하는 연인들의 무기력한 그리움을 알아보았다. 이윽고 교차로에서 마차는 나무들을 떠났다. 내가 유일하게 진실이라고 믿었던, 나를 정말로 행복하게 해 주리라고 믿었던 것으로부터 날 먼 곳으로 데리고 가는 마차는 내 삶과 닮았다.
나무들이 실망한 듯 팔을 흔들며 멀어지는 모습을 보자니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네가 오늘 우리에게서 배우지 못한 것은 앞으로도 결코 배울 수 없을 거야. 만약 네가 네게로 뻗어 가려고 애쓴느 우리를 이 길 한구석에 그냥 내버려 둔다면, 우리가 네게 가져다준 너 자신의 일부마저 모두 영원히 허무 속으로 떨어지고 말 거야. 사실 만약 나중에 내가 지금 느꼈던 기쁨과 근심을 다시 한 번 느낀다 해도, 또 어느 날 저녁 - 언제나 그렇듯이 너무 늦게 - 내가 이런 감정에 전념한다 해도, 나무들이 내게 무엇을 주고 싶어 했는지, 내가 나무들을 어디서 보았는지는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 마차가 갈림길에 들어서면서 난 나무들로부터 등을 돌려서 더 이상 나무들을 볼 수 없었다. 빌파리지 부인이 내게 왜 그렇게 꿈꾸는 듯한 얼굴이냐고 물었지만, 난 마치 친구를 잃은 듯, 나 스스로가 죽은 듯, 혹은 죽은 이를 부인하거나 신을 알아보지 못한 듯, 그저 슬프기만 했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권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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