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 내가 출발한 바닥
내가 바닥이라 부르는 것은 남들한테는 별일이 아닌 것 같아도 본인에게는 끝도 없이 괴롭고 무서운 상황이나 마음 상태 같은 것을 말한다. 남들에겐 별 거 아니지만, 나한테는 거창한 것. 나한테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무섭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것. 그것은 마음 저 깊은 곳에 어딘가에 존재하고, 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매일을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세상을 보는 눈이 어떤 식으로 뒤틀어지고, 어떤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고, 어떤 어리석은 생각을 하게 되는지, 그건 사람마다 다르지만.
내 바닥은 어떤 곳인가. 그곳에서는 세상이 어떻게 보이며, 난 어떤 기분을 느끼고 어떤 생각을 하는가. 그걸 지금 묘사해낼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아쉽게도 난 아직 그럴 능력이 없다. 여러 번 얼핏 얼핏 바닥에 가까이 가보긴 했지만, 그 정체를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바닥에 대해 충분히 알고 그것을 남한테 꺼내서 보여주기까지 한다는 것, 그건 평생이 걸려도 성공할까 말까 한 작업일지도 모른다. 대신, 여기서는 10대 시절 내 바닥과의 첫 조우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 어쩌다가 만났는지, 그리고 그때마다 난 어떻게 반응했는지. 우리는 모두 인생 초반의 해맑고 천진한 시절을 어영부영 살아가다가, 어느 날 문득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저마다의 바닥을 만나게 된다. 좋든 싫든 그 순간은 출발점이 된다. 아주 긴 여행의 출발 지점. 나의 경우 그것은 조금씩 눈앞에 희미하게 아른거리다 중학교 1학년 때 비로소 비교적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때를 포함해 스무 살이 되기 전, 나는 총 세 번 정도 바닥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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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만남.
중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였다. 내가 다닌 중학교는 여중이었고, 한 반 학생수는 43명이었다. 숫자가 많은 만큼 아이들은 다양했고, 서로 낯설었고,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43명의 아이들 중에서 나와 맞을 만한 친구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자리가 가까운 아이 두 명에게 말을 걸었다. 며칠 점심을 함께 먹었다. 같이 다니게 될 것 같았다. 근데 둘 중 한 아이가 이후 다른 아이들 몇몇과 더 친해져서 무리를 형성하더니, 얼마 뒤부터 나를 그 무리에서 은근히 제외하고 싶어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무리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자 그 친구는 대놓고 나를 싫어하는 티를 냈고, 다른 아이들도 그 아이에게 휩쓸려 가는 듯했다. 무리에 속한 몇몇 친구에게 소심하게 손을 뻗어봤지만, 슬쩍 슬쩍 피하는 것 같았다. 아직 학기 초반이라 다들 일단 자기가 살아남는 것이 중요해서, 나를 도울 여유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하필 당시 엄마가 몸에 문제가 생겨서 수술을 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예전에는 밖에서 어떤 어려운 상황이 있어도 집에 오면 늘 엄마가 있었는데,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엄마랑 종종 통화는 했다. 그러나 통화를 할 때마다 엄마가 엄마대로 자신의 고통과 싸우고 있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에 차마 내 상황에 대해서 징징댈 수가 없었다. 언니는 고등학생이라 바빴고, 동생은 아직 한참 어렸다. 친구 관계가 그렇게 불안한 와중에, 학원은 가야 했고, 숙제도 해야 했고, 매일 매일 가슴이 답답했다.
도움을 청할 사람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런 느낌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이건 나만의 문제구나,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오로지 나 혼자뿐이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14살의 여자아이에게 그것은 생존의 문제였다. 새로운 환경. 낯선 아이들. 그 속에서 내 친구를 찾느냐 찾지 못하느냐는 그 나이에 아주 중대한 문제다. 소외감, 수치심, 공포를 느꼈다. 영영 혼자가 될까 봐 무서웠다.
난 그 상황을 어찌어찌 잘 빠져 나오긴 했다. 아무한테도 의지할 수 없는 상황에 강제로 놓이면 알 수 없는 용기가 생기기 마련인 것 같다. 그 무리에 속하는 걸 포기하고 다른 친구를 사귀기로 했다. 전에 없던 적극성을 발휘해서 반에서 마음에 드는 친구에게 다가갔고, 곧 그 친구와 단짝이 되었다. 그러자 다른 친구들과의 관계도 점차 잘 풀리기 시작했다. 내 교우관계가 좋아지자 처음에 날 무리에서 배제하려 했던 그 친구는 더 이상 날 싫어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친구와도 사이가 괜찮아졌다. 그 아이가 처음에 날 싫어했던 이유는 모른다. 학기 초의 그 미묘한 사건에 대해서는 이후로 그 아이도 나도 입에 담지 않았으니까. 어쨌든 문제는 사라졌다. 그러나 나는 학기 초의 그 벼랑 끝으로 몰린 듯한 기분을 이미 경험해버렸고, 그건 쉽게 잊혀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 후 한참 동안, 난 누군가가 나를 싫어하고 있지 않을까 늘 눈치를 살폈다.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러고 있었다. 어떤 아이가 아주 잠깐 나를 향해 차가운 표정을 지을 때, 어떤 아이가 실수로 내가 한 말을 무시할 때, 어떤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내 쪽을 흘깃 보며 귓속말을 할 때, 혹시 속으로 나를 싫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불안했다. 또다시 누군가의 미움을 사서 그때 그 캄캄한 외로움 속으로 빠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나는 중학생 시절 내내 친구들이 좋아할 만한 아이가 되는 일에 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성격도 바꿔보려고 했다. 원래 내성적이지만 보다 활발해지려고 노력했고, 친구들이랑 노는 게 재미가 있든 없든 어울려보려 애썼다. 부단한 노력의 결과로 아무도 날 싫어하진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꽤 많이 좋아했다. 난 중학교라는 세상에 성공적으로 적응해 나갔다. 공부도 곧잘 했고, 친구도 많아졌다. 하지만 그러는 내내 행복하다 느낀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늘 마음 속 어딘가가 텅 비어 있는 것 같았다. 학교 가기 전 아침에는 늘 기분이 공허하고 헛헛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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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만남.
중학교 3학년. 처음으로 꿈이 생겼다. 외고에 가는 것. 어쩌다 그게 꿈이 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런저런 환상이 있었을 것이다. 예쁜 교복, 고급스런 신식 캠퍼스, 똑똑하고 멋있는 친구들, 기숙사 생활, 뭐 그런 것들. 난 처음으로 생긴 목표에 마음을 사로잡혔다. 지금 생각하면 잘 모르겠다. 꿈이라고 할 수 있었을까. 바깥 세상에 뭔가 멋있어 보이는 것이 있었고, 나를 그것의 일부로 만들어 허전한 마음을 채우고 싶었던, 그런 단순한 욕구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땐 의심의 여지 없이 그게 꿈이라고 생각했고, 나는 그 꿈을 위해 나의 온 힘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설레었다. 그러나 꿈을 현실로 만드는 과정은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입시 준비 자체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난생 처음 꿈을 갖게 된 것의 대가로 나는 또다시 바닥을 만나야 했던 것이다.
입시 준비가 한창이던 중학교 3학년 2학기 때, 사정이 있어 전학을 가야 했다. 또다시 새로운 학교, 새로운 아이들. 담임 선생님께서는 반장인 여자애와 그 친구들에게 전학생이 있으니 같이 다니면서 챙겨주라고 미리 언질을 해두셨던 모양이었다. 그 아이들은 처음엔 나에게 친절했고, 나도 그 아이들과 어울려보려고 했다. 내가 이전 학교에서처럼 충분히 노력했다면 계속 잘 지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달랐다. 그때 난 내가 가진 온 힘을 입시 준비에 쏟아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다 보니 친구 관계에까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다소 벅찼다. 하지만 학교에서 혼자 다니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내가 그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분위기에 잘 묻어가지 않거나 가끔 혼자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어도 친구들이 이해해주고 넘어가주길 내심 바랐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내 욕심이었는지, 그 아이들은 혼자만의 목표에 정신이 팔려 있는 나와 종일 함께 다녀야 하는 게 불편하고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어느 날 친구들은 나에게 그런 의사를 전해왔다. 나는 힘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납득했다. 내가 친구들과의 관계에 충분한 에너지를 쏟을 수 없는 이유를 그 아이들이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었고, 그렇다고 나에게 잘못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난 생전 처음으로 학교에서 ‘혼자 다니기’를 시도했다. 혼자여야만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버텨보기로 했던 것이었다. 물론 외로웠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나에게 꿈은 중요했고, 남은 시간은 촉박했다. 외롭다고 하던 일을 멈출 수는 없었다. 난 감정을 느끼지 않는 쪽을 택했다. 감정의 문을 닫고 해야 할 일에 전념했다. 엄마 앞에서든 누구 앞에서든 내내 겉으로 씩씩하게 행동했고, 한 번 울지도 않았다. 학교 아이들과 나 사이에는 철저하게 두터운 벽을 세웠고,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던 신경 쓰지 않았다. 얼마나 단단히 벽을 쳤는지, 같은 반 친구 중 기억나는 이름이 하나도 없을 정도다. 노력 끝에 나는 가고 싶었던 학교에 합격했다. 그 날, 꿈이 이뤄진 순간 떠오른 생각이, 왜 ‘해냈다’ 가 아니라 ‘다행이다’ 였을까. 나는 이후 꽤 오랜 시간 동안 이때의 나를 기억 속에 덮어두고 꺼내보지 못했다. 그때 내가 많이 외로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건가, 그때 내가 달고 살아야 했던 외로움의 덩어리를 다시 꺼내보기가 무서웠던 걸까. 아무튼 그렇게 첫 꿈을 위해 희생된 감정은 덮인 기억 속에 고스란히 가두어졌고, 그런 채로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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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만남.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처음으로 집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새로운 학교의 친구들은 한 명 한 명 개성이 넘쳤다. 똑똑할 뿐만 아니라 영리했고, 매력이 있었고, 저마다 뚜렷한 에너지를 지니고 있었다. 학교엔 이런저런 행사가 많았고, 동아리 같은 것도 많았다. 낯설지만 새롭고 다채로운 장소였다. 그러나 처음에 난 내가 그곳에서 어떤 식으로 살아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주변 환경이 싹 다 바뀌어버리니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헷갈렸다.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던 중, 첫 중간고사를 봤다. 당연히 시험은 중학교 때보다 훨씬 어려웠다. 내 기억으로 200명 중 70등 정도를 했던 것 같다. 등수에는 만족했다. 딱히 등수에 연연하는 성격도 아니다. 근데 조금 기분이 찝찝했다. 뭐랄까, 나 자신이 너무 이도 저도 아닌 존재 같았다 해야 하나. 정신 없이 여기저기 헤매 다니기만 하고 아무것도 최선을 다한 게 없는 기분이었다. 1학년 여름, 공부를 열심히 하기로 결심했다. 그 무렵에 난 처음으로 공부 자체에 순수한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공부를 열심히 한 적은 많았지만 공부가 재미있었던 적은 없었다. 중학교 내신은 그냥 안 하는 것보다 하는 편이 좋으니까 한 거였고, 중3 때 입시 공부는 외고에 가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공부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때는 좀 달랐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의지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어졌다. 공부에 의미를 두기 시작하면서 난 기분 좋은 승부욕과 성취감이 어떤 것인지 알아갔다.
그러던 중, 예상치 못한 벽에 부딪쳤다. 공부에 재미가 붙어 한창 성적이 오르고 있던 고등학교 1학년 말쯤이었다. 그때까지 나한테 가장 재미있는 과목은 수학이랑 과학이었다. 특히 수학. 난 어릴 때부터 논리에 강했고, 그래서 수학을 잘하는 편이었다. 수학을 잘한다는 평가를 자주 받다 보니 난 그때까지 수학을 일종의 내 아이덴티티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니 누가 나에게 이과에 갈 거냐 문과에 갈 거냐 물으면 당연히 이과였다. 근데 학교에서 이과 반을 만들어줄 수 없게 되었다는 거였다. 이유는, 외고라서. (4기까지는 이과 반이 있었는데 5기 때부터 정부에서 제재가 가해졌다. 나는 6기였다. 그래서 입학 전엔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이과인데, 제도상 이과 반을 만들 수 없으니 갑자기 문과에 지원하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이상했다. 내 아이덴티티를 어떻게든 수호해야 했다. 처음엔 의대 지망생인 같은 반 친구와 함께 이 반 저 반을 돌아다니며 이과에 가고 싶어하는 다른 아이들을 찾아내서 반을 만들어달라고 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인원수를 채우지 못해서 실패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내신으로는 문과 수업을 듣되 이과 과목을 혼자 따로 공부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가시밭길 같아 보였지만, 초반엔 오히려 의욕이 넘쳤다. ‘장애물을 만나긴 했지만 난 내 길을 스스로 개척해 보이겠어’ 하는 오기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갈수록 힘이 빠졌다. 3년 중 가장 널널하고 즐거워야 할 고등학교 2학년, 나는 내신 공부와 수능 공부를 이중으로 하느라 바빴다. 나 혼자만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을 희생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우울해졌다. 외로워지고 있었다. 또다시 마음 속 어두운 곳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심지어 이번엔 나 스스로가 그 상황을 자초한 거였다.
잊을 만했는데. 다시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 두려웠다. 외로움 때문에 흔들리거나 나약해지는 것도 두려웠다. 나는 말이 없어졌다. 종종 친구들에게 혼자 밥을 먹겠다고 했다. 친구들은 무슨 일이 있냐 물었지만 나는 그냥 혼자 있고 싶을 뿐이라 했다. 내가 선택한 길이니 티 내지 않고 감당해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친구들 앞에서 힘들지 않은 척 연기를 하는 것도 어려웠다. 그래서 혼자 있으려고 했던 것 같다.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혼자가 되길 원했다. 어쩌면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것보다 혼자 있는 게 덜 외로워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친구들이 의지가 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중학교 때와 달리 고등학교 때 친구들은 나의 확고한 목적의식을 불편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응원해주었고, 좋아해주었고, 그 소중한 마음들은 충분히 기댈 곳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고독감과 외로움은 그것과는 다른 층위에서 날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때 난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는 것과 바닥으로 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별개라는 것을 알았다. 사람이 해결해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고 느꼈고, 그래서 더 아득했다. 그 막막하게 외로운 느낌을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도 몰랐다. 시도를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친구에게 힘들 때 힘들다고 말해보는 것, 하지만 왜인지 쉽게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그 알 수 없는 외로움을 견디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당장 해야 할 일을 그저 열심히 하는 것이었다. 난 그 어느 때보다도 착실하고 탄탄하게 공부를 해 나갔다. 공부를 하고 있을 때 가장 마음이 안정되어서 더 공부에 집중했던 것 같기도 하다. 고3 때 6월 모의고사인가, 성적이 굉장히 잘 나왔던 적이 있었다. 그때도 나는 외고에 합격했을 때처럼 맘놓고 해맑게 좋아하지 못했다. 그때 나처럼 따로 이과 공부를 하느라 함께 고생했던 친구가 나를 축하하면서 ‘성적 잘 나왔으면 좀 자랑도 하고 좋아하기도 하고 그래!’ 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 내 안에 떠오른 감정은 ‘신난다’가 아니라 ‘왠지 좀 서럽다’ 였는데, 왜 그런 마음이 드는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 그냥 속으로 가라앉혔다. 가을이 되었고, 무사히 수능을 봤고, 원하는 학과에 지원했고, 합격했다. 수험 생활 도중에 날 스쳐 지나갔던 아마득한 외로움에 대해서는 곧 잊어버렸다. 결과가 좋았으니까. 그때 사람들은 과정 속에서 내가 무엇을 느꼈던 간에, 대학에만 합격하면 이제 행복할 일만 남았다는 듯이 모두 나를 축하했다. 그래서 나 또한 그들과 함께 자연스레 과거를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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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스무 살이 되기 전 내가 경험한 삶과의 소박한 전초전이었다. 세 번의 만남. 바닥한테 먹히지도 않았지만 딱히 이겼다고 볼 수도 없는, 6년에 걸친 아슬아슬한 줄타기였다. 어른의 눈으로 돌이켜보면 그다지 대단한 사건들은 아니다. 그렇지만 어린 아이였던 나한텐 하나 하나 힘들었다. 중학교 1학년 때 몰렸던 궁지, 3학년 때 견뎌야 했던 고독함, 고등학교 때 빠져들었던 혼란스런 외로움, 각각의 상황 속에서 난 무언가 어둡고, 차갑고, 무서운 것을 느꼈고, 그 느낌을 모면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택했던 대책들은 아마도 이후 나의 성격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바닥을 만날 것 같은 느낌이 들면 누구나 무섭다. 영원히 도망치고 싶다.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의 전략을 세우고, 성실하게 실행한다. 전략은 많아지고 점점 정교해진다. 그러는 과정에서 우린 중요한 삶의 무기를 얻기도 하지만, 동시에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리기도 한다. 어린 나는 저 정신 없는 줄타기 와중에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어버렸을까. 그리고 나서 스무 살이 된 난 어떤 사람이 되어 있었던 걸까.
당신에겐 그런 기억이 무엇인지 묻고 싶다. 남들에겐 별일 아닌 것 같지만, 당신에게만큼은 특별한 나쁜 기억. 당신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독특한 어려움. 꺼내볼 때마다 이상하게 억울하고 아파서, 괜히 누군가를 탓하고 싶어지는 과거의 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