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kim.528 2020. 5. 11. 15:42

들려온다. 하나의 음이. 하나의 목소리가. 태초 이전부터 흘러왔던 어떤 소리들이. 이름을 붙여주기 전에는 침묵으로 존재했던 어떤 형상들이. 너는 입을 연다. 숨을 내뱉듯 음을 내뱉는다. 성대를 지나는 공기의 압력을 느낀다. 하나의 모음이 흘러나온다. 모음은 공간과 공간 사이로 퍼져나간다. 위로 아래로 오른쪽 왼쪽으로.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진동한다. 음은 비로소 몸을 갖는다. 부피를 갖고 질량을 갖는다. 소리는 길게 길게 이어진다. 길게 길게 이어지다 끊어진다. 끊어지다 다시 이어진다. 어떤 높이를 가진다. 어떤 깊이를 가진다. 너는 허공을 바라본다. 높은 곳에서 쏟아져 내리는 빛을 보듯이. 구석구석 음들이 차오른다. 차오르는 음폭에 비례해 공간이 확장된다. 너는 귀를 기울인다. 저 높은 곳에서부터 내려오는 신의 목소리라도 듣듯이. 목소리는 말한다. 목소리는 목소리 그 자체로 말한다. 신의 목소리가 신의 말씀보다 앞서듯이. 소리의 질감이 소리의 의미를 압도하듯이. 너는 음의 세례를 받으며 빛의 세계로 나아간다. 다시 음들이 이어진다. 너는 입을 다문다. 네 입속에 머금고 있던 음들을 네 몸속으로 흘려보낸다. 음들은 이제 너의 몸이 된다. 너는 네 몸속을 떠돌고 있는 그 소리들을 듣는다. 길게 길게 이어지는 그 길들을 본다. 한 마디 한 마디 묵묵한 침묵으로 이어지는 그 무수한 발걸음들을. 너는 사물들이 나아가는 그 모든 궤적을 떠올린다. 땅속 먹이를 찾아 헤매는 흰개미의 이동 경로를. 캄캄한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 불빛의 지속적인 흔들림을. 담장 위로 자라나는 덩굴풀의 안간힘을. 이른 아침 숲 속에서 들려오는 새 울음의 진폭을. 수면 위로 번져가는 안개의 느린 움직임을. 물속으로 풀어져 내리는 검은 물감의 목적 없는 춤사위를. 자석과 철가루가 그려내는 인력과 척력 사이의 어쩔 수 없는 천연성을. 집단으로 이동하는 사막 메뚜기들의 기나긴 여로를. 드넓은 바다를 헤엄쳐가는 고래 떼의 여유로운 포물선을. 너는 보이지 않는 그 길들을 본다. 점선으로 이어지는 그 궤적의 호흡을 듣는다. 그 점선과 점선 사이의 여백은 음과 음 사이의 침묵을 닮았다. 너는 사물과 세계가 고요히 움직이며 제 존재의 비밀을 덧입는 시간들을 상상한다. 너는 누군가에게 목소리를 건넨다. 목소리 위에 어떤 의미를 얹는다. 너만의 고유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말한다. 나무가 흔들리듯이. 구름이 흐르듯이. 바람이 불어오듯이. 그러나 네 말의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어딘가에 먼저 가닿는 것은 네가 전하는 의미보다는 네가 내뱉은 음들 고유의 성조와 고저와 장단이다. 바로 너의 내면이다. 호흡이다. 울림이다. 감정이다. 호소이다. 너는 네 속에서 들려오는 그 모든 소리들을 기록한다. 누군가의 입을 빌려 말하듯 너는 그 무수한 목소리들을 받아 적는다. 이것이 바로 내 시다. 어찌하여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같은 사물들이 같은 듯 다르게 표현되어왔는지 또 다르게 표현되어야만 하는지. 너는 네 몸속의 소리길을 따라가며 깨닫는다. 어렴풋이. 그러나 명확하게. 이것이 내 시다. 너는 다시 한 번 말한다. 약간의 체념을 간직한 채 너는 다시 한 번 말한다. 말하고자 하는 그것에 가닿기 위해. 지속적인 불협화음을 관통해나가면서. 완전한 조화에 도착하기 위해. 끝없이 다가갈수록 끝없이 멀어져가는 아주 가까운 그곳을 향해. 너는 음 위에 음을. 음 위에 음에 또 다른 음을 쌓아나간다. 도 위에 미를. 미 위에 솔을. 레 위에 파를. 파 위에 라를. 라 위에 도를. 그러다 너는 경악한다. 완전5도 혹은 완전 7도음을 구성하고 있는 그 음들이 조화로운 협화음을 만들기 위해 어떤 식으로 파열과 균열을 감당하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올림표와 내림표를 매어단 채로 각각의 음들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나가고 있는지. 너는 이 놀라운 수학의 세계에 감탄한다. 네가 가진 음들은 이제 음악으로 진입한다. 너의 손가락은 건반과 건반 사이를 거닐과 지판과 지판 사이를 더듬는다. 너는 악기의 높은음자리와 낮은음자리를 이리저리 이동해가면서 다른 자리에 놓여 있는 같은 소리들을 찾아낸다. 반복적인 연습으로 악기의 음계를 이해한다. 어찌하여 G코드와 Em코드의 색깔이 유사한지. 어찌하여 A코드가 F#m코드와 동일한 음조를 지니는지. 너는 음을 덧입으며 차츰차츰 음의 몸으로 다가간다. 너의 감정은 좀더 다양한 음의 변주 위로 내려앉는다. 너의 내면은 좀더 풍요로운 음들을 끝없이 불러들인다. 어울리는 소리들을 찾아 한 소절 한 소절 전진해나간다. 비로소 진정한 음악의 세계로 나아간다. 안정된 톤으로 시작되어 약간 불안정한 단조의 분위기로. 다시 조금 더 불안한 음으로 나아갔다 처음의 안정된 음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렇게 음악의 보편적인 구조는 집을 나간 탕자가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과 같은 형식을 띠곤 한다. 어떤 시원을 향해 발원하는 기도로 시작되어 무수한 시련을 통해 오랜 기도가 응답받는 구원의 구조로. 그러나 네가 불러들이는 음들은 어쩐 일인지 여전히 들판을 헤매고 있다. 너의 목소리는 언제나 떠돌이의 집을 짓는다. 떠돌이의 집을 짓고 다시 허문다. 멀리멀리 항해를 떠났다. 안전한 집으로 돌아오는 보편적인 음보 대신 너의 음들은 여전히 끝없이 끝없이 헤매고 헤맨다. 젊은 탕자는 늙어서도 여전히 탕자다. 젊음을 간직하고 있는 늙은 탕자가 아니라 늙은 채로 다시 젊어진 탕자. 이것이 바로 내 시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아주 가까운 그곳으로. 들려온다. 하나의 음이. 하나의 목소리가. 너는 그 모든 사물의 고유한 진동을 듣는다. 홀로 울 수 없는 그 소리의 발원지를. 그 무수한 관계의 호흡을. 너는 응시하고 응시한다. 다양한 환경과 구조 속에서 사물과 사물이 어떤 식으로 파탈하는지. 어떤 식으로 파열되는지. 어떤 식으로 마찰하는지. 그러면서 또 그것들이 어떤 방식으로 스미듯 접히는지도. 너는 건반 위에 손을 얹어 몇 개의 어울림음 혹은 불협화음을 두드린다. 여러 개의 음이 동시에 혹은 순차적으로 울리다 단 하나의 음으로 점점이 사라진다. 너는 그것을 듣는다. 존재와 존재의 어울림을. 사물과 사물 간의 대화를. 울림과 울림 사이의 침묵을. 한 번도 듣지 못한 내면의 음을 듣는 것.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물 간의 어울림 혹은 불협을 보게 되는 것. 의미 이전의 소리를 찾아 제 속의 소리길을 따라나섰다 의미 너머의 어떤 본질을 발견하게 되는 것. 다시 음이 이어진다. 다시 어떤 음이 들려온다. 너는 네 마음을 아프게 지르는 어떤 목소리를 듣는다. 너는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린다. 네 이름을 부르던 오래전 누군가의 얼굴을. 그의 입에서 길게 길게 끌리며 사라지던 너의 이름을. 한결같은 톤으로 발음하던 그의 음성을. 그 음성 속에 새겨져 있는 그의 내면을. 그 얼굴은 그 자신의 목소리와 함께 오랜 세월을 건너왔다. 이제 너는 그의 얼굴보다 그의 목소리가 좀더 많은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입김과도 같은. 한숨과도 같은. 탄식과도 같은. 오랜 시간이 흘러 너를 울게 하는 것은 그의 얼굴이 아니라 그의 목소리일 것이라고 너는 생각한다. 너는 현재에 서서 과거의 얼굴 위로 미래의 목소리를 불러들여 덧입힌다. 다시 돌릴 수 없는. 다시 들을 수 없는. 음이 이어진다. 다시 이어지다 끊어지고 다시 이어지다 끊어진다. 들리는가. 이 음들이. 너에게로 나에게로 전해지는 이 사물의 무수한 진동이. 사라져가며 다시 울리는 이 끝없는 존재의 증명이. 매 순간 처음처럼 울리는 이 거대한 침묵이. 

 

 

 

이제니 시집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