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kim.528 2020. 5. 15. 00:06

 


 

309

"알겠나? 지금은 1970년대가 아니야. 당신하고 여기서 반反권력 놀이를 하고 있을 겨를이 없단 말이야" 하고 진저리 난다는 듯이 어부가 말했다. "그런 시대는 끝났단 말이야. 그래서 나도 당신도 모두 이 사회에 꽉 묻혀 있다고. 권력이고 반권력이고 없어, 이젠. 아무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거든. 커다란 사회란 말이야. 풍파를 일으킨들 좋을 건 아무것도 없는 거야. 시스템이 꽉 맞도록 되어버렸단 말이야, 이 사회가 싫다면 가만히 대지진이라도 기다리는 거지. 구덩이라도 파고서. 하지만 지금 여기서 제아무리 버틴다 해도 서로에게 아무런 이득도 없다고. 소모일 뿐이야. 인텔리라면 그런 것쯤 아실 텐데그래?"

 

326

하지만 말이야, 메이,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란 지금 같아선 아무것도 없어. 미안하지만, 아무것도 없어. 너도 알고 있겠지만, 우리는 모두 아주 연약한 인생을 보내고 있단 말이야. 나로선 고탄다를 스캔들에 밀어넣고 싶진 않단 말이야. 그는 이미지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내야. 그가 매춘부와 동침하고 살인 사거의 참고인으로 불려왔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그 이미지의 세계는 손상을 입고 말아. 프로그램에서도 상업광고에서도 빠지게 될지도 모르거든. 하잘것없다고 하면 하잘것없지. 하잘것없는 이미지이고, 하잘것없는 세상이기도 해. 하지만 그는 나를 친구로서 신용하고 대접해 주었어. 그러니까 나도 그를 친구로서 대접하려는 거야. 그것은 신의信義의 문제란 말이야. 메이, 산양 메이. 나는 너하고 둘이 있어서 아주 즐거웠었어. 너하고 자는 게 아주 즐거웠었어. 꼭 동화 같았어. 그것이 너에게 위안이 되는지 어떤지는 나로선 알 수 없지만, 하지만 너에 대해선 줄곧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어. 우리는 둘이서 아침까지 눈 치우기를 하고 있었지. 관능적인 눈 치우기. 우리는 이미지의 세계에서, 경비를 써가면서 서로 껴안았던 거야. 곰돌이 푸우와 산양 메이, 목 졸리는 건 굉장히 고통스러웠겠지. 아직 죽고 싶진 않았겠지, 필시. 하지만 나로선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어. 이렇게 하는 것이 정말 옳은 것인지 어떤지,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알 수가 없어. 하지만 나로선 이렇게 할 수밖엔 없어. 그것이 나의 생존방식이야. 시스템이란 말이야. 그래서 나는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잘 자, 산양 메이, 적어도 너는 이젠 두 번 다시 눈을 뜨지 않아도 돼. 두 번 다시 죽지 않아도 돼.

 


331

유약해졌어, 하고 나는 생각했다. 지쳐서 유약해졌어. 예전엔 이렇지 않았다. 예전엔 좀 더 진지하게 화를 냈었다.

 

333

순수한 소모消耗. 유약해졌어, 하고 나는 자신을 향해 말했다. 굉장히 유약해졌어. 하라는 대로 하고 있어. 아무 대꾸도 안 하고 있어.

하지만 그것뿐만은 아니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분명 조금은 유약해지긴 했다. 그러나 제일 문제되는 것은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없다는 그것이다. 그래서 버티지 못하단 말이다. 내가 하고 있는 건 참으로 옳은 것일까? 

 

 337

나는 아주 제대로 일을 한다. 하지만 그것을 사랑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녀는 하는 일 자체를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일터를 떠나게 되면 그녀는 어딘지 연약해 보인다. 불안정하고 상처받기 쉬워 보인다.  나는 그때, 그녀와 자려고만 생각하면 잘 수 있었을 게다. 하지만 자지 않았다.

나는 그녀하고 다시 한 번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녀가 누군가에게 살해되거나 하기 전에.

그녀가 어딘가로 사라져버리거나 하기 전에.

 


343

열세 살 때의 나는 그다지 행복한 소년은 아니었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으며, 혼자 있을 때의 자신을 믿을 수 있었지만, 당연히 대개의 경우 혼자 있지는 못했었다. 가정과 학교라는 두 종류의 완강한 테두리 속에 갇혀서 나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초조한 나이였다. 나는 한 여자애를 사랑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물론 순조롭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랑이 어떤 것이라는 것조차도 알지 못했으니 말이다. 나는 그 여자애하고 제대로 이야기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내성적이고 재치가 없는 소년이었다. 선생님이나 부모가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가치관에 이의를 제기하고 반항하려 했지만, 이의를 제기할 말이 제대로 잘 나오지 않았다. 무슨 일을 해도 솜씨 좋게 하지 못했다. 무슨 일을 해도 척척 해내는 고탄다와 완전히 반대 입장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나는 사물의 신선한 모습을 볼 줄은 알았다. 그것은 정말 멋진 일이었다. 냄새가 제대로 풍겼고, 눈물은 진실로 따뜻했으며, 여자애는 꿈처럼 아름다웠으며, 로큰롤은 영원한 로큰롤이었다. 영화관의 어둠은 우아하고 친밀했으며, 여름밤은 끝없이 깊고 관능적이었다. 그러한 초조한 나날을 나는 음악과 영화와 책과 더불어 지냈다. 샘 축이랑 리키 넬슨의 유행가 가사를 암송하면서 지냈다. 나는 나 혼자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것이 나의 열세 살 모습이었다. 그리고 고탄다와 같은 과학 실험반에 있었다. 그는 여자애들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성냥을 그어 가스버너에 우아하게 쓱 불을 댕기곤 했다.

어째서 그가 나를 부러워한다는 말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348

"유키는 내 속에 있는, 혹은 내게 달라붙어서 존재하고 있는 감정이나 사념을 느끼고, 그것을 예컨대 상징적인 꿈처럼 영상화할 수 있다, 그 말인가?"

"사념?"

"강렬하게 생각된 것 말이지."

"그렇군요, 그럴지도 몰라. 강렬하게 생각된 것 - 하지만 그뿐이 아니죠. 그 강렬하게 생각된 일을 만들어낸 것, 그런 물건이 있죠. 아주 강력한 무엇. 생각을 만들어내는 힘이라고 하면 좋을지, 그런 물건이 있으면 난 그걸 느껴버리거든요. 감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걸 나 나름으로 보죠. 하지만 꿈처럼은 아니고요. 텅 빈 꿈. 그래요, 그런 거. 텅 빈 꿈이에요. 거기엔 아무도 없어요. 아무런 모습도 보이지 않죠. 왜 그 TV의 콘트라스트 있죠, 그걸 굉장히 어둡게 할 때나 굉장히 밝게 할 때와 마찬가지죠. 아무것도 보이지 않거든요. 하지만 거기엔 누군가 있어요.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 그걸 느낀단 말이에요. 거기에 있는 건 양가죽을 뒤집어 쓴 사람이에요. 악인은 아니에요. 하지만 보이진 않죠. 불에 쬐인 종이에 나타난 그림처럼, 그건 거기에 있죠. 보이진 않지만, 알 수 있거든요.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 보인단 말이에요. 형상이 없는 형상이에요." 그녀는 혀를 찼다. "형편없는 설명이죠?"

 

350

"흔히 그런 걸 느끼게 되나?"라고 나는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그렇진 않아요"라고 유키는 말했다. "가끔씩, 가끔씩밖엔 안 느끼죠. 그런 걸 느끼는 상대란 그렇게 많진 않거든요. 아주 조금뿐. 하지만 되도록 그 일은 생각지 않으려고 해요. 뭔가를 느낄 것 같으면 으레 곧 닫아버리곤 하거든요. 대개 그런 경우란 느낌으로 알게 되니까요. 닫아버리면, 더 이상 깊게 느끼지 않아도 돼요. 눈을 감는 것과 마찬가지로. 감각을 닫아버리는 거죠. 그렇게 하면 아무것도 안 보이죠. 무엇이 있다는 건 알아. 하지만 보이진 않아. 그냥 그대로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보지 않아도 돼. 맞다, 영화 같은 데서 무서운 게 나올 것만 같으면 눈을 감아버리죠, 그것과 마찬가지예요. 그것이 지나가 버릴 때까지 감고 있지요. 가만히."

"어째서 감아버리지?"

"싫으니까"라고 그녀는 말했다. "예전엔 - 좀 더 어렸을 적엔 - 감지 않았죠. 학교에서도요. 무엇을 느끼면 그걸 말로 했어요. 하지만 그러면, 모두가 언짢아하지 뭐예요. 예컨대, 누군가 다칠 것만 같다고 느끼죠. 그래서 친구한테 '쟤가 다칠 거야' 라고 말하면, 결국 그 애가 어김없이 다치고 말아요. 그런 일이 몇 번인가 있고 나선, 다들 나를 귀신 보듯 하지 뭐예요. '귀신'이란 소릴 들은 적도 있다고요. 그런 소문이 떠돌았대요. 그래서 난 굉장히 상처받았죠. 그래서 그 후론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죠. 누구한테도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죠. 보일 듯하면 싸악 자기를 닫아버리는 거예요."

 

351

"난 예지는 아니고, 거기에 있는 걸 다만 느끼는 것뿐이에요. 뭐랄까, 무슨 일인가 일어나려면 일어나기 위한 분위기 같은 게 있겠죠. 이해가 가요? 예컨대 철봉을 하다가 다치는 행위에는 무엇인가 방심이랄까 과신이랄까 그런 것이 있겠지요? 들떠가지고 제멋에 겨워 있다든가. 그러한 감정의 파도 같은 것이 나한텐 굉장히 민감하게 느껴진단 말이에요. 그리고 이건 뭔가 위험해, 하는 생각이 들죠. 그렇게 되면 텅 빈 꿈 비슷한 게 훌쩍 튀어나오죠. 그것이 튀어나오면…… 일어나죠 그것이. 더욱 희끄무레한 것이지만, 그것이 일어나요. 보인다고요. 하지만 이제 아무 말도 안 해요. 무슨 말을 하면 모두 나를 귀신이라고 부르니까. 그저 보는 거예요. 여기서 이 사람은 화상을 입지 않을까 하고요. 그러면 화상을 입거든요. 하지만 나로선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요. 그런 건 너무 지독하죠. 자신이 싫어지게 되어버리는 것. 그러니까 닫아요. 닫아버리면 자신이 미워지지 않아도 되니까."

 

354

"난 언제나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러니 보세요, 늘 마음을 닫아버릴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하지만 그런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내가 늘 겁내고 떠는 이유 말이에요. 벌벌 떨면, '숙맥'으로 보이나 봐요. 그래서 구박하는 거죠. 굉장히 혐오스러운 방식으로 말이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혐오스러워요. 굉장히 창피한 짓을 하거든요. 그런 짓을 어떻게 하느냐, 믿기지 않을 정도의 그런 짓. 정말이지……."

나는 유키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 라고 나는 말했다. "그런 쓸데없는 거 잊어버려. 학교 같은 거 억지로 갈 필요 없어. 가고 싶지 않으면 안 가면 돼. 나도 잘 알고 있어. 거긴 형편없는 곳이야. 꼴보기 싫은 놈이 잘난 척 뽐내고 있지. 형편없는 교사가 거들먹거리고 있지. 명백히 말해서 교원의 80퍼센트는 무능력자 아니면 사디스트야. 또는 무능력자이자 사디스트야. 스트레스가 잔뜩 쌓여가지고, 그걸 혐오스러운 방식으로 학생들한테 내던지지. 무의미하고 자질구레한 규칙들이 너무나 많아. 사람의 개성을 압살하다시피 하는 시스템으로 되어 있어서, 상상력의 부스러기도 없는 바보 같은 놈이 좋은 성적을 받거든. 예전에도 그랬었지. 지금도 필시 그럴 테지. 그런 건 변하지 않거든."

"진짜 그렇게 생각해요?"

"물론이지. 학교라는 게 얼마나 시시한 곳이냐 하는 데 대해선 한 시간이라도 떠들 수 있지."

"하지만 의무교육이에요. 중학교는."

"그런 건 누군가 딴 사람이 생각할 일이지, 유키가 생각할 일이 아니야. 모두 유키를 구박하는 그런 장소에 가야 할 의무란 아무것도 없어. 전혀 없어. 그런 걸 싫다고 할 권리는 유키에게 있는 거야. 큰 소리로 싫다, 라고 말하면 그만이야." 

"하지만 그러고 나서 앞일은 어떻게 되죠? 줄곧 이런 일의 반복이라면요?"

 


360

"- 옛날에는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정의가 아닌지를 확실히 알고 있었지" 라고 마키무라 히라쿠는 말했다.

 

362

"자네는 뭔가 글쓰는 일을 하고 있다지?" 라고 마키무라 히라쿠는 말했다.

"글을 쓴다고 할 만한 게 못 됩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구멍을 메우기 위한 문장을 제공하고 있을 뿐이에요. 뭐든 좋아요. 글자가 쓰여 있으면 돼요. 하지만 누군가 쓰지 않으면 안 돼요. 그래서 내가 쓰고 있는 겁니다. 눈을 치우는 일과 같아요. 문화적인 눈 치우기."

 

364

"이따금 나도 그렇게 느껴요. 이런 문장을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고 말이야, 이따금. 옛날에는 이렇지 않았어. 세계가 훨씬 작았어. 반응 같은 것이 있었어.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지. 사람들이 모두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어. 미디어 자체가 작았어. 작은 마을 같았어요.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알고 있었지."

그리고 컵의 맥주를 다 마시고, 병을 집어 들어 두 컵 모두 따랐다. 나는 사양했지만, 무시당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 무엇이 정의인지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어. 모두들 알지 못하고 있지. 눈앞의 일을 다투고 있을 뿐이야. 눈 치우기야. 자네 말이 맞아."

 

371

"얼핏 보기에 자네도 꽤 완고한 사나이군" 하고 그는 말했다.

"완고하지는 않아요. 내게는 나 나름의 생각 시스템이라는 게 있을 뿐이에요."

"시스템" 하고 그는 말했다. 

 

372

"생각의 시스템 운운할 시대가 아니야. 그러한 것이 가치 있던 시대가 확실히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 달라. 무엇이든 돈으로 살 수 있지. 사고방식도 그래. 적당한 것을 사갖고 와서 연결하면 돼. 간단하다고. 그날부터 곧바로 사용할 수 있어. A를 B에 삽입하면 되는 거야. 눈 깜짝할 사이에 해낼 수 있지. 낡아버리면 교환하면 돼요. 그러는 편이 편리해. 시스템 따위에 구애를 받으면 시대에 뒤떨어지게 돼요. 눈치 빠르게 행동할 수가 없어. 남들이 귀찮게 여긴다고."

"고도자본주의 사회" 하고 나는 요약했다.

"그래" 하고 마키무라 히라쿠는 말했다. 그리고 또 잠시 동안 침묵에 잠겼다.

 

374

"시스템도 좋지만, 버티면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아. 이미 그런 시대가 아니거든."

"버티고 있는 것도 아니에요" 라고 나는 말했다. "댄스 스텝 같은 거예요. 습관적인 겁니다. 몸이 기억하고 있어요. 음악이 들리면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여요. 주변이 바뀌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굉장히 까다로운 스텝이어서, 주변 일을 생각하고 있을 수 없는 겁니다. 너무 여러 가지를 생각하면, 스텝이 틀어져 버리니까요. 단지 서투를 뿐이에요. 유행을 따라가지 못해요."

 


 

(2권)

 

7

"서로를 위해서. 우리는 나이 차이가 많고, 생활환경도, 사고방식도, 느끼는 방식도, 살아가는 방식도 많은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둘이서 여러 가지를 서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렇게 생각지 않아?"

유키는 어깨를 움츠렸다.

"만나고 싶으면 네가 전화를 걸면 돼. 사람과 사람이 의무적으로 만날 필요는 없어. 만나고 싶어지면 만나면 되는 거야. 우리는 서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을 털어놓아서 비밀을 공유하고 있어. 그렇지?"

그녀는 약간 망설이다가 "응" 하고 말했다.

"그런 건 내버려두면 몸 안에서 자꾸 부풀어 오르는 수가 있어. 억제할 수 없을 때가 있는 거야. 이따금 바람을 빼주지 않으면, 펑 하고 폭발해 버려. 알겠어? 그렇게 되면 살아가기가 어려워져. 무엇인가를 혼자서 떠맡는다는 건 괴로운 일이야. 너도 괴롭고 나 역시 괴로울 수 있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아. 하지만 우리는 서로 이야기할 수 있어. 솔직하게 말이야."

 

8

동급생들이 그녀를 괴롭히는 기분을 나도 알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아마도 그들의 일상성을 넘어설 만큼 너무 아름다운 것이다. 그리고 너무 예민하다. 게다가 그녀 쪽에서는 결코 그들에게 가까이 가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두려워하고, 또 히스테릭하게 그녀를 괴롭히는 것이다. 그녀가 자신들의 친밀한 공동체를 부당하게 깎아내리고 있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탄다와 다른 점이다. 고탄다는 타인이 자신에게서 강렬한 인상을 받는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고, 이를 제대로 유지·제어하고 있었다. 그는 타인에게 공포를 안겨주지는 않았다. 그의 존재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커져버렸을 때에는 씽긋 미소 지으며 농담을 했다. 근사한 농담일 필요는 없었다. 그저 기분 좋게 씽긋 웃으며 평범한 농담을 입에 올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모두들 씽긋 웃으며 즐거운 기분이 될 수 있었다. 좋은 녀석이야, 하고 모두들 생각했다. 이런 사람이 - 아마 진짜로 좋은 녀석일 것이다 - 고탄다였다. 하지만 유키는 그렇지가 않았다. 유키는 자기 한 사람을 지탱하고 살아가는 일만으로도 벅찬 것이다. 자신 주변 사람들의 감정까지 일일이 살펴가며 그에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갈 만큼의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고, 또 그럼으로써 타인을 통해 스스로도 상처를 입는다. 고탄다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힘든 인생이다. 열세 살의 여자아이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힘든 인생이다. 어른에게도 그것은 힘든 일인 것이다.

앞으로 그녀가 어떻게 될지, 나는 예상을 할 수 없었다. 잘 풀리면 어머니처럼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어떤 방법을 발견하고 획득하여, 예술적인 분야에 종사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마 그것이 어떠한 분야든 그녀가 지니고 있는 힘의 방향성에 맞기만 한다면, 그녀는 남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 정도의 일을 하리라,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근거는 없다. 하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마키무라 히라쿠가 말했듯이, 그녀의 내부에는 힘이 있고, 아우라가 있고, 재능이 있다. 비범한 데가 있다. 눈 치우기 따위가 아닌 그 어떤 것

 

18

고탄다가 관련되면, 모든 게 그야말로 영화처럼 되어버린다. 왜 그럴까? 현실이 조금씩 후퇴해 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해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되어간다. 아마 그는 그런 마력 같은 것을 갖고 있는가보다. 

 


26

"불을 붙이는 방식이 말이야, 뭐라고 할까, 아주 세련되어 보였어. 자네가 불을 붙이면 그게 인류의 역사에 남을 위업처럼 보였다고."

"그건 좀 과장된 얘기군" 하고 그는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자네가 하려고 하는 말은 알겠어. 자네가 하려는 말은 요컨대…… 남에게 잘 보이려는 행위라는 얘기겠지. 몇 번인가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 그리고 그 때문에 예전에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지. 나 자신은 그런 행위를 하려고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하고 있었을 거야. 자연스럽게. 어릴 때부터 줄곧 모두들 내가 하는 일을 지켜보고 있었어. 주목받고 있었지. 그러니까 당연히 의식하게 되거든,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다소 연기적演技的으로 돼. 그런 게 몸에 배어버리지. 요컨대 연기를 하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배우가 되었을 때는, 어쩐지 마음이 놓였어. 앞으로는 이제 당당히 연기를 할 수 있으니까."

 

28

그는 몸에 힘을 빼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피로가 급격히 그의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가두어둘 수 없다는 듯이. 그는 그 피로를 줄곧 몸속 어딘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가두어두고 있었던 것이다.

 

33

"그 아이는 동화를 너무 믿었어" 라고 나는 말했다. "그 아이가 믿고 있었던 것은 이미지의 세계야.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런 게 계속될 턱이 없지. 그런 걸 지속시키는 데는 정확한 룰이 필요해.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룰은 존중하며 지켜주는 건 아니니까. 상대를 잘못 택하면 지독한 꼴을 당하게 돼."

 

36

나는 스스로에게 말해보았다. 그리고 그 호텔에 묵으며 고탄다와 함께 술을 마셨어야 했을까 하고 문득 생각했다. 나와 고탄다 사이에는 네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우선 과학 실험 시간에 함께 공부를 했다. 그리고 둘 다 이혼을 하여 독신으로 지내고 있다. 그리고 둘 다 키키와 함께 잔 적이 있다. 그리고 네 번째로 둘 다 메이하고도 잔 적이 있다. 그 메이는 지금 죽었다. 아주, 완전히. 술을 함께 마실 만한 가치는 있었다. 같이 어울려도 괜찮았을 것이다. 나는 어차피 한가하고, 내일 특별히 해야 할 일도 없었다. 무엇이 나를 저지시킨 것일까? 아마 그게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는 게 싫었으리라는 결론에 나는 도달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참으로 딱한 사나이다. 도에 넘치게 매력적이다. 그리고 그런 것이 아마 그의 탓은 아니리라.

 


39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하와이에 가도 좋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쩐지 도쿄 거리를 떠나 전혀 다른 환경 속으로 옮겨가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이 도쿄 거리에서 정신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이르고 있었다. 좋은 생각이 전혀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생각의 실은 끊어진 채로 있었고, 새로운 실마리도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엉뚱한 장소에서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무슨 일을 하든 제대로 몸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잘못된 것을 계속 먹고, 잘못된 것을 계속 사들이는 듯한 음울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은 아주, 완전히 죽어 있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나는 약간 지쳐 있었다. 경찰에서 곤욕을 치른 그 사흘 동안의 피로가 아직 말끔히 가시지 않은 것이다. 

 

42

"뭐 질문할 게 있나?" 마키무라 히라쿠가 물었다. 질문할 게 많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하나도 생각해낼 수 없었다. 특별히 물어볼 건 없다고 나는 말했다.

 

50

"일하는 건 좋아해. 별로 싫어하지 않아. 그러나 구조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게 참으로 답답해. 이따금 두려워질 때가 있어 -."

 

56

"난 당신을 이해할 수 없어요" 하고 유미요시가 아주 차분하게 말했다. "이따금 당신 생각을 해요. 하지만 당신이라는 사람의 실체를 잘 알 수 없어요."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알겠어" 라고 나는 말했다. "나는 서른넷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나이에 비해 아직 해명되지 않은 부분이 너무 많고, 지금 그것을 조금씩 줄여가고 있는 참이야. 나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어. 그러니까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여러 가지를 자세히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댄스 댄스 댄스」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