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고, 여러 인물이 등장하며, 잇달아 장면이 전환된다. 얼마 전까지는 눈이 계속 내리는 삿포로 거리를 정처없이 돌아다녔다. 그런데 지금은 호놀룰루의 해변에서 뒹굴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될 대로 되라지, 라는 것이다. 점을 따라 선을 그어갔더니, 이렇게 되었다.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었는데 여기까지 와버렸다. 나는 능숙하게 춤을 추고 있는 것일까? 나는 머릿속으로 지금까지의 사태 진행을 차례로 더듬어보고, 그때마다 내가 취한 행동을 하나하나 체크해 보았다. 그다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썩 좋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쁘지 않다. 한 번 더 똑같은 입장에 놓인다 할지라도, 나는 역시 마찬가지로 행동할 것이다. 이게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일단 발은 움직이고 있다. 스텝을 계속 밟고 있다.
그리고 지금 나는 호놀룰루에 있다. 휴식 시간이다.
휴식 시간, 하고 나는 소리 내어 말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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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머리의 나사를 늦추고 긴장을 풀었다. 휴식 시간인 것이다.
유키의 얼굴 표정도 뚜렷한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에서 내려 하와이 특유의 달콤하고 미적지근한 공기를 접한 순간부터 변화는 시작되었다. 그녀는 트랩에 내려서자마자 멈춰 선 채 눈이 부셔 못 견디겠다는 듯이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뒤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때 이미 그녀의 얼굴은 엷은 막膜처럼 뒤덮고 있던 긴장감은 소멸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겁먹은 듯한 표정이나 초조한 기색도 없었다. 머리칼을 손으로 만지거나, 추잉검을 둥글게 뭉쳐버리거나, 의미도 없이 어깨를 움츠리곤 하는 평소에 흔히 볼 수 있는 동작들마저도 유연하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반대로, 이 아이는 지금까지 정말 지독한 생활을 하고 있었구나, 하고 나는 실감했다. 그것은 지독할 뿐만 아니라 분명히 그릇된 생활인 것이다.
74
"그녀는 일에 열중하면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일들을 잊어버립니다. 식사를 했는지, 지금까지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그런 일들을 깡그리 잊어버려요. 머릿속이 새하얘져 버리는 겁니다. 대단한 집중력이에요."
그건 차라리 집중력이라기보다는 정신병의 영역에 속하는 사례가 아닐까 하고 나는 문득 생각했지만, 물론 그런 말을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나는 소파 위에서 묵묵히 예의 바르게 미소 짓고 있었다.
78
마키무라 히라쿠가 그녀와 지냄으로써 인생과 재능을 소모해 버렸다고 한 말도, 지금으로서는 이해할 수 있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주위 사람에게 무엇을 해주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와는 정반대다. 그녀의 존재를 조정하기 위해, 주위에서 조금씩 무엇인가를 받아야만 하는 타입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재능이라는 강력한 흡인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화와 조용함. 그녀가 그것을 얻어내도록 하기 위해, 사람들은 모두 다리나 팔을 그녀에게 내밀어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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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매우 희귀한 존재입니다. 일류 재능이라는 건 어디에나 있는 게 아니에요. 천재와 마주칠 수 있다는 것은, 천재를 목격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해야겠죠. 그러나-" 라고 그는 말하고,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양팔을 벌리는 것처럼 오른팔을 바깥쪽으로 내밀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혹독한 체험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내 자아를 바늘처럼 찌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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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를 만났을 때,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빠져버린 거예요. 소용돌이처럼 말이에요. 저항할 수도 없었어요. 나는 알게 되었어요. 이는 일생에 단 한 번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이런 만남은 일생에 한 번밖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말이에요. 그런 건 알 수 있어요, 확실히. 그리고 나는 생각했어요. 이 사람과 결합하면 아마 나는 언젠가는 후회하게 되리라, 하지만 결합하지 않으면 나의 존재 자체가 의미를 상실하게 되리라고 말이에요. 당신은 지금까지 그런 생각 해본 적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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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담" 하고 그는 말하며 웃었다. "누구에게든 말하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해요?"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로서는 뭐라고 말하기 아려웠다. 우리는 모두 서른이 넘은 어른인 것이다. 누구하고 잘까 정도는 스스로 선택하는 수밖에 없고, 소용돌이든 맹렬한 회오리든 모랫바람이든 간에 스스로 선택한 이상은 어떻게든 그 길로 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이 딕 노스라는 사나이로부터 어딘지 모르게 좋은 인상을 받았다. 그가 잡다한 여러 가지 일을 한 손으로 해내고 있는 데 대해 경이로움마저 느꼈다. 그러나 대체 그런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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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무 냉정한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팔이 하나밖에 없든, 둘 다 온전하게 갖고 있든, 시인이든 시인이 아니든 간에, 여기는 거칠고 힘든 세계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문제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어른이다. 우리는 이미 여기까지 와버린 것이다. 적어도 처음으로 대면하는 상대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기본적인 예의의 문제다. 너무 냉정하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저어도 아무것도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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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유키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하는데, 물론 그건 좋은 일이에요, 하지만 아시겠어요? 당신은 그 아이에게 친구이기 전에 먼저 어머니예요" 라고 나는 말했다. "좋든 싫든 그렇게 되어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아이는 아직 열세 살입니다. 아직 어머니를 필요로 하고 있어요. 어둡고 괴로운 밤에 무조건 껴안아주는 존재를 필요로 하고 있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나는 전혀 관계없는 타인이니까 이런 말을 하는 건 주제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어중간한 친구가 아니라, 우선 자신을 전적으로 받아들여주는 세계입니다. 우선 그것을 분명히 알아둬야 해요."
91
하와이, 하고 나는 생각했다. 세계의 끝 같다. 어머니가 딸과 친구가 되고 싶어 하고 있다. 딸은 친구보다는 어머니를 갈구하고 있다. 엇갈리고 있다. 아무 데도 갈 수 없다. 어머니에게는 보이 프렌드가 있다. 되돌아갈 곳이 없는 외팔이 시인이다. 아버지에게도 보이 프렌드가 있다. 게이이며 서생인 프라이데이. 아무 데도 갈 수 없다.
92
"그 사람은 언제나 내게 마음의 상처를 입혀요. 하지만 그 사람은 그걸 전혀 알아채지 못해요. 그리고 나를 좋아해요. 그렇죠?"
"맞아."
"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성장하는 수밖에 없어."
"성장하고 싶지 않아요."
"성장하는 수밖에 없어" 라고 나는 말했다. "싫어도 모두들 성장하는 거야. 그리고 문제를 안은 채 나이를 먹고, 모두들 싫어도 죽어가는 거야. 옛날부터 죽 그래 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야. 너만이 문제를 안고 있는 건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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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림없이 모두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는 거예요. 어떻게 해야겠다고는 생각하지만, 막상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있어요."
"아마 그럴 거야.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 같아."
"아저씨는 알고 있어요?"
"암시성이 구체적인 형태를 띠기까지 가만히 기다렸다가, 거기에 대처하면 되리라고 생각해. 요컨대……."
유키는 T셔츠의 옷깃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면서 내 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잘 알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건 무슨 뜻이에요?"
"기다리면 된다는 말이야" 라고 나는 설명했다. "천천히 그런 때가 오기를 기다리면 돼. 무엇을 억지로 변화시키려 하지 말고, 사물이 흘러가는 방향을 지켜보면 돼. 그리고 공평한 눈으로 사물을 보려고 노력하면 되는 거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지 자연히 알 수 있게 돼. 하지만 모두들 너무 분주해. 재능이 넘쳐,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공평함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에는, 스스로에 대한 관심이 너무 많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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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엄마한테 확실히 뭔가 보통 이상의 뛰어난 점은 있어요. 엄마로서는 엉망이고 최악이에요. 나는 그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상당히 받아왔지만, 그런데도 왠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끌리는 점은 있어요. 그 점은 아빠하고는 전혀 달라요. 잘 알 수 없지만, 하지만 지금 갑자기 친구가 되자고 해도, 엄마와 나는 힘의 차이가 너무 커요. 나는 아직 어린애이고, 엄마는 강한 힘을 갖고 있는 어른이에요. 누가 생각하든 그쯤은 알 수 있잖아요? 그런데 엄마는 전혀 알지 못해요. 그러니까 엄마가 나와 친구가 되려고 해도, 본인은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셈이지만, 엄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에게 자꾸 마음의 상처를 입히게 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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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건 너무 심해요" 라고 유키는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가 아저씨에게 여자를 사준 거예요.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건 옳지 않은 일이에요. 잘못되고 부끄러운 일이에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확실히 그랬다.
"확실히 그래" 라고 나는 말했다.
"정말로 정말로 부끄러운 일이에요." 라고 유키는 되풀이했다.
"그래" 라고 나는 인정했다.
115
"확실히 나는 그런 일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 라고 나는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거절하고 돌려보냈어야 했어. 하지만 그때는 피곤해 있었고,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어. 나는 아주 불완전한 인간이야. 불완전하고, 노상 실패하거든. 하지만 배워. 두 번 다시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결심하지. 그래도 똑같은 실수를 두 번씩 저지르는 경우가 적지 않아. 왜 그럴까? 간단해. 왜냐하면 내가 어리석고 불완전하기 때문이야. 그런 때에는 역시 약간은 스스로를 혐오하게 돼. 그리고 똑같은 실수를 세 번은 저지르지 않으리라고 결심하지. 그렇게 조금씩 나아지지. 조금씩이지만 그래도 나아지는 건 분명해."
유키는 오랫동안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았다.
117
"용서한 건 아니에요" 라고 유키는 말했다. "우선 화해하는 것뿐이에요. 그건 정말로 잘못된 일이었고 나는 큰 상처를 받았어요. 알겠어요?"'
139
"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예사로운 보통 인간이야. 굳이 따진다면, 실제적인 인간이야. 그런데 왜 언제나 이토록 기묘한 일에 말려들고 마는 것일까?"
"글쎄, 왜 그럴까요?" 라고 유키는 말했다. "내게 묻지 말아요. 나는 어린애고, 아저씨는 어른이에요."
"확실히" 라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아저씨 기분을 잘 알 수 있어요."
"난 잘 알 수 없어."
"무력감" 하고 그녀는 말했다. "뭔가 거대한 것에 의해 휘둘리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무슨 일을 하든 어쩔 도리가 없는 그런 기분."
142
무엇과 무엇이 유사하다. 무엇과 무엇이 이어져 있다.
설마,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있다. 나는 그 종이쪽지를 집어 들고 방문 쪽으로 가서, 준이 거기에 적어둔 전화번호와 대조해 보았다.
똑같았다.
모든 게 이어져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모든 게 이어져 있다. 그런데 나만이 그 이음매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143
"이따금 죽음의 그림자 같은 것을 느낄 때가 있어" 라고 나는 말했다. "아주 진한 그림자야. 죽음이 바로 옆에까지 다가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팔을 쑥 뻗어 당장이라도 내 발목을 잡을 듯한 느낌이 드는 거야. 하지만 무섭지는 않아. 왜냐하면, 그것은 언제나 나의 죽음이 아니기 때문이야. 그 손이 잡는 것은, 언제나 다른 누군가의 발목이야. 하지만 누군가 죽어갈 때마다 나의 존재가 조금씩 빗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 왜 그럴까?"
147
"당신은 그 애의 기분을 아주 잘 알고 있군요. 어째서일까요?"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물론 말하지 않았다.
150
혼자 있게 되자, 나는 갑자기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머릿속에서 급속하게 중력이 변화해 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 사고는 그런 중력의 변화를 잘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는 것도 멋진 일이었다. 좋지 않은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 하고 나는 생각했다. 여기는 하와이다, 제기랄, 무엇 때문에 생각에 잠겨야 한다는 말인가.
151
도쿄,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도쿄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낼 수 없었다.
「댄스 댄스 댄스」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사상
中
'03. transcription > 「댄스 댄스 댄스」 무라카미 하루키'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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