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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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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 있는 그대로의, 연약하고, 순수한 2017.02.13 #1 어떤 경우에는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진로를 바꿔가는 국지적인 모래 폭풍과 비슷하지. 너는 그 폭풍을 피하려고 도망치는 방향을 바꾼다. 그러면 폭풍도 네 도주로에 맞추듯 방향을 바꾸지. 너는 다시 또 모래 폭풍을 피하려고 네 도주로의 방향을 바꾸어버린다. 그러면 폭풍도 다시 네가 도망치는 방향으로 또 방향을 바꾸어버리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마치 날이 새기 전에 죽음의 신과 얼싸안고 불길한 춤을 추듯 그런 일이 되풀이되는 거야. 왜냐하면 그 폭풍은 어딘가 먼 곳에서 찾아온, 너와 아무 관계가 없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그 폭풍은 그러니까 너 자신인 거야. 네 안에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러니까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모든 걸 체념하고 그 폭풍 속..
6 / 이해하려는 시도 #1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을 왜 두려워하는 것일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과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을 발견하면 본능적으로 두려움의 가시를 세운다. 어른들의 칭찬을 못 받는 아이들은 어른들이 예뻐하는 아이들의 우쭐함을 두려워하고, 어른들에게 칭찬을 받아온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아이들의 날카로움을 두려워한다. 성실하게 살아가는 아이들은 반항아들의 어긋함을 두려워하고, 세상에 대들며 사는 아이들은 모범생들의 꼿꼿함을 두려워한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기쁨을 찾는 사람들은 혼자 있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밀어냄을 두려워하고, 혼자만의 세상에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들은 관계를 바라는 사람들의 끌어당김을 두려워한다. 낭만과 감상에 젖어 사는 사람들은 현실적인 사람들의 차가움을 두려워하고, 현실에 발 붙이고 사는 사람들은..
5 / 생각이 많은 사람 2016년이 되었고, 스물 세 살이 되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집은 그대로였다. 그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아서 한국으로 돌아가면 되게 이상할 것 같다 생각했는데, 막상 집에 돌아오니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집은 편안하고 따뜻했다. 유럽에서의 생활에 대해서는 잠시 모두 잊어버리고, 오랜 여행으로 지친 몸을 누였다.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하고 난 뒤, 난 휴학 시기를 어떻게 보내면 좋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선 유럽에서 내가 경제관념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충격을 받은 탓에, 조금이라도 돈을 벌고 싶었다. 다음엔 내가 번 돈으로 여행을 가고 싶었다. 집 근처 학원에서 중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다. 오전 시간에는 학교에 가서 청강을 하고 싶었다..
4 / 첫 도망 이런 마음을 품어본 적이 있는가. ‘나를 찾고 싶다.’ ‘나다워지고 싶다.’ ‘진짜 나에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다.’ 혹은 이런 생각.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고 싶다.’ ‘예전의 나로부터 해방되고 싶다.’ ‘그 동안 나를 가두고 있던 그것, 날 끊임없이 괴롭히던 그것과 영원히 작별하고 싶다.’ 어쩌면 여행이라는 행위의 본질이 아닐까. 이전의 나와 헤어지고 싶다는 생각. 진정한 나를 만나고 싶다는 욕구. 현재의 불만족스러움에서 벗어나 새로운 행복을 스스로 발견해내고 싶은 마음. 그래서 여행은 모험이면서 동시에 도망이다. 여행에는 용기와 의지가 필요하다. 낯선 장소에서 자신만을 위한 무언가를 찾아내려면. 그러나 그런 동시에 여행자는 속으로 두려워한다. 자기가 원래 살던 세상에 버려두고 도망쳐 온 것을 여행..
3.5 / 첫 혼자 교환학생 생활을 하게 될 이탈리아 토리노에 도착하기 전, 10일간 첫 혼자 여행을 했다. 여행지는 덴마크 코펜하겐과 독일의 베를린. 여행 중 썼던 일기의 일부를 다듬었다. / 2015.08.20 코펜하겐 코펜하겐에 무사히 도착했다. 숙소에 도착하니 피로가 몰려오고 그와 함께 외로움도 몰려온다. 낯선 곳에 혼자 존재하는 것으로 인한 외로움이다. 생소한 외로움이다. 이제 한국에서는 학교든 길이든 혼자 있을 때 전혀 외롭지 않은데. 외로움에는 사람이 없어서 생기는 외로움뿐만 아니라 장소가 낯설어서 생기는 외로움도 있는 걸까. 한국에서는 혼자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는데, 지금은 잘 즐겨지지 않는 것 같다. 외로움을 달래려고 친구들, 가족들과 연락을 했다. 혼자 낯선 거리를 걷는 기분은 참 이상하고 새롭다. 언니..
3 / 좋아하던 것이 더 이상 사랑스럽지 않을 때 끌림, 설렘, 기쁨, 즐거움, 그리고 몰입. 인생에서 의미 있는 것을 만났을 때, 우리가 느끼게 되는 좋은 기분들이다. 우리는 이 좋은 기분들이 만들어내는 차마 거부할 수 없는 흐름에 이끌려, 어쩌면 다시는 벗어날 수 없는 관계 속으로 자신을 내맡겨버리게 된다. 그러나 어떤 대상에 계산 없이 마음을 쏟을 수 있는 시간은 늘 한정되어 있다. 순수한 열정의 유효 기간. 유효 기간이 끝나갈 때쯤 삶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내가 여기까지 대신 해줬으니, 지금부턴 네 힘으로 해나가야 해, 자, 이제 어떻게 하고 싶니, 너에게 저것은 무엇이니, 앞으로 저것과 너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니. 그 동안 단순해 보였던 삶은 그때부터 믿을 수 없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3학년이 된 나는 갑자기 수많은 질문들에 휩..
2 / 좋아하는 일 스물 한 살, 나한테 처음으로 ‘좋아하는 일’이라는 게 생겼다. 건축 설계였다. 어떤 일을 새롭게 배워나가는 것이 그토록 마냥 재미 있고, 더 열심히 하고 싶고, 더 잘하고 싶은 것은 처음이었다. 건축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난 막연하게 그 일이 나랑 잘 맞는다 느꼈고, 건축과 나의 관계 속으로 온전히 몰입했다. 나라는 사람이 어떤 일을 통해서 구현되고 있다는 것에 설렘을 느꼈다. 그 결과물에 대한 공적인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는 것 또한 날 벅차게 했다. 애초에 잘한다고 느껴서 시작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잘하고 못하는 것은 당시 나에게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내가 그 일을 ‘하고 있다는’ 감각만이 중요했다. 그만큼 겁이 없었고, 순수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에 몰두..
1 / 겉과 속이 다른 아이 스무 살, 대학생이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산속 캠퍼스에서 공부만 하다가 밖으로 나와 갑자기 넓은 세상을 마주한 나는, 내내 방황했고, 조금 불안했고, 가끔 허하고 우울했다. 대학생이 되기 전 난 자존감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스스로에 대한 믿음만큼은 꽤 견고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다. 바닥에서 어두운 감정들이 올라와도 목표 자체에 의심을 품은 적은 없었고, 아마 그 때문에 힘든 순간에도 꿋꿋하게 견딜 수 있었던 걸 거다. 하지만 더 넓은 세상 앞에서 내 마음의 중심은 생각했던 것보다 빈약했다. 스무 살의 나는 세상과 무분별하게 마주쳤고, 부딪쳤고, 그럴 때마다 어디를 바라봐야 할지 모른 채 휘청거렸다. 나라는 사람이 어려워졌다. 다양한 사람들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