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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transcription/「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이제니

몸소 아름다운 층위로

한 편의 시를 쓰고 있었다

이런 낱말을 가지고 있었다

 

목양실

감화원

유형지

부영사

금언집

김나지움

시가전차

고대연극

 

사랑이 끝나자 봄이 왔다

봄과 함께 고양이도 왔다

 

야옹 야옹

갸르릉 갸르릉

 

믿을 수 없게도 미국 고양이는

미우 미우라고 운다고 했다

 

고양이는 고양이만의 낱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림자가 단 하나여도

고양이의 눈은 고양이의 눈

나의 눈은 나의 눈

 

고양이 곁에 바짝 다가앉아도

고양이는 고양이

나는 나

 

거실에서는 어머니가 성경을 읽고 있었다

마태와 마가와 누가와 요한과 함께

어머니의 낱말은 성스러운 빛을 띠고 있었다

 

희고 파리하고 서늘한 빛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김나지움의 빛

 

선적인 조망

붙박이 좌석

두꺼운 틀

깊은 창틀

걸러진 빛

작은 창유리

활짝 열리는 창

반쯤 가려진 정원*

 

빛이 잘 들지 않는 창가 좌석은 이런 낱말을 가지고 있었다

 

방 안 가득 먼지가 흐르고 있었다

먼지가 흐르듯 고양이도 흐르고 있었다

고양이가 흐르듯 나도 흐르고 있었다

 

탁자 밑에서 침대 밑에서

어둠 속을 파고드는 신실한 마음처럼

 

믿을 수 없게도 모두 함께 시를 쓰고 있었다

저마다의 낱말 속에서 저마다 아름답게 흐르고 있었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이 종이에서 저 종이로

 

 

*크리스토퍼 알렉산더, 『영원의 건축』에서.

 

 

 

이제니 시집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