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03. transcription/「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셀 프루스트

2권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____ 09. 기차

 


그래서 우리는 1시 22분발 기차로 파리를 떠나기만 하면 되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기차 시간표에서 찾아보기를 좋아했고, 그래서 내가 그 기차를 모른다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매번 내게 감동을 주는, 거의 자비로운 출발의 환상을 주는, 그 기차로 떠나기만 하면 되었다. 상상 속에서 그리는 행복은 행복에 대한 우리 지식의 정확성보다는 그것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욕망과의 일치에서 오는 법이므로, 나는 내가 이미 행복을 자세히 아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객차 안에서 날씨가 서늘해지면 특별한 기쁨을 느낄 것이며 어느 역이 가까워지면 이런저런 효과를 관조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하여 기차는 언제나 그것이 통과하는 오후의 빛 속에 감싸인 채로 도시 이미지들을 내 마음속에 깨어나게 했으므로 여느 기차와는 다르게 생각되었다. 마침내 나는, 한 번도 만나 본 적은 없지만 우리가 그 우정을 차지했다고 믿으며 기뻐하는 사람에 대해 흔히 그러듯, 길을 가는 중에 날 데리고 갈 그 금발 예술가인 나그네에게 특별하고도 변치 않은 용모를 부여했는데, 그 나그네는 시간이 되면 석양빛을 향해 멀리 사라지기에 앞서 생로 대성당 발밑에서 작별 인사를 할 것이었다.

 

/

 

창에는 커튼이 쳐졌지만 창틀을 완전히 가리지는 못했으므로, 햇살이 출입문의 반작거리는 떡갈나무와 의자를 덮은 천 위로 스며들어 (객차 안에서 너무 높은 곳에 붙어 있어 지명을 읽을 수는 없지만 여기저기 풍경을 보여 주는 철도회사의 배려로 붙인 포스터보다 더 자연과 어우러진 삶을 설득력 있게 광고라도 하듯이) 숲의 빈터에서 낮잠에 빠지게 하는 따사롭고도 졸린 빛과도 흡사한 빛을 던지고 있었다.

 

/

 

그 순간 나는 머리를 움직이기 싫었고, 이미 취한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큰 기쁨을 느꼈으므로 셰비네 부인의 책을 펼치지도 않은 채 그냥 손에 쥐고는 시선을 떨구지도 않았다. 내 앞에는 온통 창문의 푸른빛 차양뿐이었다. 하지만 차양을 바라보는 일은 너무도 경이로웠고 난 내 명상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하는 사람 누구에게도 대꾸하지 않았다. 차양의 푸른빛은 어쩌면 아름다움이 아닌 그 강렬한 선명함으로,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조금 전 내가 술을 마셨을 때까지, 또 술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순간까지 내 눈앞에 있던 모든 빛깔을 지워 버린 듯했으며, 이런 차양의 푸른빛에 비하면 다른 빛깔들은 흐릿하고 무의미해 보였다. 마치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이 어둠 속에서 살다가 나중에 수술을 받아 마침내 빛깔을 구별하게 되면 어둠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듯이. 나이 든 승무원이 차표를 검사하러 왔다. 그가 입은 재킷에 달린 금속 단추가 계속 은빛으로 반사되면서 날 매혹했다. 그에게 우리 옆 자리에 앉으라고 청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승무원은 다른 객차로 갔고 난 향수에 젖어서, 대부분의 시간을 기차에서 보내는 까닭에 이 나이 든 승무원을 하루도 빼 놓지 않고 볼 수 있는 철도 종사원들의 삶을 상상했다. 푸른빛 차양을 바라보면서 느꼈던 기쁨, 내 입이 반쯤 벌어진 데서 느꼈던 기쁨이 드디어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몸을 조금 흔들었다. 할머니가 내민 책을 열고, 여기저기 내가 택한 페이지에 주의력을 고정할 수 있었다. 책을 읽을수록 셰비네 부인에게 더욱 감탄하게 되었다. 

 

/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자기 가족과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셰비네 부인에 이르게 된 할머니는 셰비네 부인 편지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아주 다른 아름다움을 내게 가르쳐 주셨다. 그 아름다움은 셰비네 부인이 내가 곧 발베크에서 만나게 될 엘스티르라는 화가와 같은 부류의 위대한 예술가라는 점에서 더욱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될 것이었다. 엘스티르는 사물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는 발베크에서 셰비네 부인이 엘스티르와 동일한 방식으로, 즉 원인부터 설명하지 않고 우리 지각이 받아들이는 순서에 따라 사물을 제시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미 그날 오후 객차 안에서 달빛을 묘사하는 편지를 다시 읽으면서 그 점을 깨달았다. "나는 유혹에 견디지 못했단다. 그래서 필요도 없는 모자와 카자크를 걸치고는 내 방 공기만큼이나 그렇게도 상쾌한 산책로로 나갔단다. 거기서 난 수많은 환영들을 발견했다. 흰옷과 검은 옷을 입은 수도사들, 회색과 흰색 옷을 입은 몇몇 수녀들, 땅 위에 여기저기 던져진 천 조각들, 나무에 기댄 채 똑바로 매장된 사람들 등등." 나중에 내가 『셰비네 부인 서간문』에 있어서의 도스토옙스키적 양상이라고 부르게 될 그 점에 난 매혹되었다. (셰비네 부인은 도스토옙스키가 인물을 묘사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풍경을 묘사한 게 아닐까?)

 

/

 

내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활동으로 날 둘러싸며 동반하는 기차의 온갖 움직임은 내가 잠 못 이루면 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소리로 날 잠들게 해 주었고, 또 나는 그 소리를 콩브레의 종소리마냥 이런저런 리듬과 짝을 지웠다. (내 충동적인 움직임에 따라 처음에는 네 개의 균등한 십육분음표로 들렸다가 다음에는 십육분음표가 사분음표에 격렬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내 불면증에 반대되는 압력을 행사하면서 불면증의 원심력을 약화해 내 몸의 균형을 유지해 주었고, 그런 반대 압력 위에서 내 부동 자세와 오래지 않아 내 수면은, 조류와 물결이 흘러가는 대로 졸음 속에서 이리저리 떠돌다가 바닷속에서 잠든 물고기 또는 단지 폭풍우의 도움으로 날개를 펼치는 어느 독수리의 화신이라도 된 듯, 뭔가 강력한 힘이 주의 깊게 보호하는 가운데 휴식을 취할 때와 같은 그런 상쾌한 인상에 이끌려 가는 듯 느꼈다.

 

/

 

해돋이는 삶은 달걀이나 그림이 든 산문, 카드놀이, 또는 배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좀처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강물처럼 긴 여행의 동반자다. 어느 순간 내 잠이 들었는지 확인해 보려고 조금 전 내 정신을 가득 채웠던 생각들을 열거해 보려 했을 때 (또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한 불확실성조차 긍정적인 대답을 주려 했을 때) 나는 차창 너무 작은 검은 숲 위로 부드러운 솜털 같은 부분이 장밋빛으로 고정되어 꼼짝하지 않는 깊게 파인 구름을 보았는데, 그 빛을 흡수하여 물들인 날개의 깃털이나 화가의 충동적인 몸짓이 칠해 놓은 파스텔처럼 변덕스럽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필연성이나 삶 자체인 듯 느껴졌다. 이내 이 빛깔 뒤로 빛의 공간이 몰려왔다. 그러자 빛깔은 더욱 선명해졌고 하늘은 살구색으로 변했다. 나는 창문에 눈을 붙이면서, 마치 빛깔 자체가 자연의 심오한 삶과 관계된다는 듯 더 잘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선로가 방향을 바꾸면서 기차도 방향을 틀었고, 그러자 아침 경치는 창틀 안에서 달빛 비치는 푸른빛 지붕이 있는 밤의 마을로, 온갖 별이 뿌려진 하늘 아래 어둠의 유백색 진주 빛 때가 낀 빨래터 있는 밤의 마을로 바뀌었다. 내가 분홍빛 하늘의 띠를 잃어버리고 슬퍼했을 때, 그 띠는 다시 반대편 차창을 통해 그러나 이번에는 붉은빛이 되어 나타났고, 선로의 두 번째 모퉁이에서는 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진홍빛을 발하는 변덕스럽고도 아름다운 아침의 그 불연속적이고도 대립되는 단편들을 한데 모아 새로운 화폭에 담기 위해, 이런 단편들에 대한 전체적인 시각과 연속적인 화폭을 가지기 위해, 이 창문에서 저 창문으로 계속 쫓아다니며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

 

이처럼 내가 혼자 있을 때 내 상념이 그리던 아름다움의 모델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이 아름다운 소녀는, 즉시로 내게 어떤 종류의 행복에 대한 취향을, (행복에 대한 취향은 순전히 형태, 언제나 특별한 형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그녀 곁에서 살면 실현될 듯 보이는 그런 행복에 대한 취향을 주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여전히 '습관'의 일시적 중단이 상당 부분 작용했다. 우유 파는 아가씨가 이용할 수 있도록 내가 그녀 앞에 내민 것은 생생한 쾌락을 음미할 능력이 있는 나의 존재 전부였다. 평상시 우리는 최소한 축소된 존재로 살아간다. 우리 능력의 대부분은 잠들어 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며 다른 능력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습관에 그 능력들이 의지하기 대문이다. 그러나 이 여행 날 아침, 틀에 박힌 삶이 중단되고 장소와 시간이 바뀌자 이런 능력은 그 존재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방 안에 틀어박혀 살며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습관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 자리를 채우려고 내 모든 능력이 달려와 서로 열심히 경쟁하면서 - 바다 물결처럼 여느 때와는 다른 높이로 똑같이 높아지면서 - 가장 저속한 것에서 가장 고상한 것으로, 호흡이나 식욕, 혈액순환으로부터 감성이나 상상력으로 높아져 갔다. 

 

/

 

베즐레, 사르트르, 부르주, 보베 등 몇몇 도시명은 그 약칭만으로도 그곳에 있는 주요 성당들을 지칭한다. 우리가 자주 받아들이는 이런 부분적인 말의 의미는 -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장소인 경우 - 마침내 그 이름 전체를 주조하여, 우리가 그 이름에, 우리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도시의 관념을 접어넣으려 할 때면, 마치 주물처럼 동일한 조각술과 동일한 양식을 부과하면서 일종의 거대한 대성당을 만들어 낸다. 그렇지만 내가 발베크라는 페르시아 풍에 가까운 이름을 읽은 것은 기차역 구내식당 위 하얀색 글자로 쓰인 파란 게시판에서였다. 난 활기차게 역을 나와 성당으로 가는 큰 길을 건너서는 다만 성당과 바다를 보겠다는 생각에 모래사장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았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권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