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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transcription/「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셀 프루스트

4권 / 소돔과 고모라 ____ 06. 알베르틴과의 시간

 


 

01. 생장들라에르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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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나는 알베르틴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그림을 다시 그리기로 결심했고, 그래서 우선 연습 삼아 생장들라에즈 성당을 택했다.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그 성당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진 곳이어서 위치를 알려 주기가 매우 힘들었고, 안내를 받지 않고는 찾기가 불가능할 만큼 외따로 떨어져 있어서 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는데, 에프르빌 역에서 삼십 분 이상, 케톨므 마을의 마지막 집을 통과하고도 한참을 더 가는 그런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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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함께 엘스티르를 처음 방문했을 때부터 나는 그녀가 사치를 즐길 뿐만 아니라, 돈이 없어서 누리지는 못하지만 어떤 종류의 안락함도 좋아한다는 걸 알아차렸으므로, 매일 우리에게 마차를 보내도록 발베크의 마차 임대업자와 합의를 했다. 더위를 조금이라도 덜 느끼기 위해 우리는 샹트피 숲으로 가는 길로 들어섰다. 바로 옆에 있는 나무에서 응답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새들의 불가시성이 - 그 중에는 거의 바닷새처럼 생각되는 것도 있었다. - 마치 눈을 감고 있을 때와 같은 휴식의 느낌을 주었다. 마차 깊숙이 알베르틴 옆에서 그녀의 팔에 묶인 채로 나는 이런 오케아니데스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이 음악가들 중 하나가 한 잎에서 다른 잎 아래로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는데, 음악가와 노래 사이에는 별 뚜렷한 관계가 없었으므로, 노래의 원인이 놀라서 파드득 날아가며 우리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 그 보잘것없는 작은 몸에 있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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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는 성당까지 우리를 데려갈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케톨므를 나오자 마차를 멈추게 했고, 알베르틴과 작별 인사를 했다. 그녀가 이 성당이나 다른 기념물, 몇몇 그림에 대해 "당신과 함께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즐거울까요!"라고 말하면서 나를 두렵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 즐거움은 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고 느꼈다. 나는 아름다운 것 앞에 홀로 있을 때라야, 아니 혼자 있다고 상상하면서 침묵을 지킬 때라야 기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의 도움을 받으면 예술에 대한 감각을 키울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 감각으 그렇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잠시 그녀와 헤어졌다가 오후 끝자락에 찾으러 오겠다고 말하는 편이 더 신중하다고 생각했다. 

 

 


 

02. 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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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나는 알베르틴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다른 날처럼 혼자 라 라스플리에르에 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녀는 길을 가는 도중에 여기저기 멈출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생장들라에즈에 가는 일부터 시작하기란, 즉 다른 방향으로 가는 건 불가능하며, 또 그곳으로의 산책은 다른 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반대로 그 기술자는 그녀에게 생장에 가는 것보다 쉬운 일은 없으며 - 이십 분이면 갈 수 있으므로 - 우리가 원한다면 몇 시간이고 거기에 머무를 수 있고 혹은 더 멀리도 갈 수 있다고 말했다. 케톨므에서 라 라스플리에르까지는 삼십오 분이면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자동차가 돌진하면서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준마의 20보를 넘어서는 걸 보고, 우리는 그 사실을 이해했다. 거리란 공간과 시간의 관계에 지나지 않으며, 또 그 관계에 따라 변한다. 우리는 어느 한 장소에 가야 하는 어려움을 리(里)나 킬로미터의 체계로 표현하지만, 어려움이 줄어드는 순간 그 체계는 틀린 것이 된다. 이런저런 마을에서 보면 다른 세계에 있는 것처럼 보였던 마을도 크기가 변한 풍경에서는 바로 이웃 마을이 되므로, 예술 또한 거리감으로 인해 변모한다. 여하튼 2 더하기 2가 5가 되고, 두 지점 사이의 가장 짧은 거리가 일직선이 아닌 세계가 어쩌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터득하기보다는, 같은 날 오후에 생장과 라 라스플리에르, 두빌과 케톨므, 생마르스르비외와 생마르스르베튀, 구르빌과 발베크르비외, 투르빌과 페테른으로 가는 것이 무척 쉬운 일이라는 기술자의 말을 듣는 게 아마도 알베르틴으로서는 더욱 놀라운 일이었으리라. 예전에 메제글리즈와 게르망트 쪽이 그러했던 것처럼, 지금까지는 다른 날이라는 감옥 속에 완전히 갇혀 있어 같은 날 오후에 같은 눈으로 보는 것이 불가능했던 그 마을들이, 이제는 70리를 갈 수 있는 장화 신은 거인에 의해 해방되어 우리의 간식 시간 주위에 종탑과 탑들과 오래된 정원들을 한데 모으러 왔고, 이웃에 있는 숲은 그것들을 서둘러 드러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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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로 하는 마술적인 여행에 대한 나의 사랑이, 알베르틴이 자동차 앞에서 느끼는 매혹을 공유하지 못하게 가로막았는지도 모른다. 자동차는 아픈 사람도 그가 원하는 곳까지 데려다주어, 그 장소를 개별적인 기호 혹은 대용품이 없는 변치 않는 아름다움의 본질로 여기는 것을 - 내가 이제껏 그래 왔던 것처럼- 방해한다. 또 자동차는 아마도 내가 예전에 파리에서 발베크에 갈 때 탔던 기차처럼, 그곳을 일상적인 삶의 우연성에서 벗어난 목적지, 우리가 출발할 때면 거의 이상적으로 보이고 도착할 때도 여전히 그렇게 남아 있는 목적지로 만들어주지 못했다. 즉 어느 누구도 살지 않고 그저 도시의 이름만이 붙어 있는 대저택에 도착할 때면, 기차역이 그 이름을 물질화하여 접근 가능성을 약속해 주는 그런 목적지로. 자동차는 우선 이름이 요약하는 전체 속에서 보던 도시에, 또 극장의 객석에 앉은 관객의 환상과 더불어 보던 도시에, 그렇게 마술적으로 데려다주지 않았다. 자동차는 우리를 거리의 무대 뒤로 들어가게 했으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보려고 멈추기도 했다. 하지만 그토록 내밀한 진입을 보상하기라도 하듯, 자기가 가는 길에 자신이 없었던 운전사는 길을 찾아 헤매다가 가던 길로 되돌아가기도 하고, 이런 전경의 엇갈린 교차 덕분에 성관은 언덕과 성당과 바다와 더불어 구석 차지 놀이를 하면서 고목 아래로 몸을 숨기려고 애썼지만 아무 소용도 없이 우리는 그 성관에 다가간다. 이렇게 자동차는 그것을 피해 전 방향으로 도주하는 도시를 매혹하며 도시 주위에 그리는 원을 점점 좁혀 가다가 드디어 골짜기 깊은 곳을 향해 수직으로 돌진하더니 땅바닥에 납작 드러눕는다. 그리하여 급행 열차를 타고 갈 때 그 유일한 지점인 목적지로부터 신비로움을 박탈한 듯 보이는 자동차는, 오히려 반대로 우리 스스로가 컴퍼스를 가지고 구획을 정하면서 그 장소를 발견한다는 인상, 지극히 사랑스러운 탐험가의 손길로 섬세하고도 정확하게 측정하는 진정한 기하학을, 아름다운 "토지 측량"을 느끼도록 도와준다는 인상을 준다. 

 

 


 

03. 발베크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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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틴이 생장들라에즈에 남아 그림을 그리는 편이 보다 현명하다고 생각할 때면, 나는 자동차를 타고 구르빌과 페테른뿐 아니라 생마르스르비외, 때로는 크리토까지도 그녀를 찾으러 가기 전에 잠시 들를 수 있었다. 그녀 외의 것에 몰두하며, 다른 즐거움을 위해 그녀를 버려야 하는 시늉을 하면서도 나는 오로지 그녀만을 생각했다. 대개는 구르빌이 내려다보이는 광대한 평원보다 멀리 가지 않았다. 그곳은 콩브레에서 시작하여 메제글리즈 방향으로 나 있던 평원과도 흡사해서, 비록 알베르틴과 조금은 멀리 있어 내 눈길이 그녀에게까지 이르지는 못하지만, 지금 내 곁을 스치는 이 부드럽고도 강력한 바람이 나의 눈길보다 훨씬 멀리 가서 도중에 어떤 것으로도 끊기는 일 없이 케톨므까지 급히 내려가 생장들라에즈를 무성한 잎으로 덮고 있는 나뭇가지들을 흔들면서 내 여자 친구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그렇게 해서 이 무한대로 커져가는, 그러나 안전한 은신처 안으로 그녀와 나 사이에 이중의 연결고리를 던져 준다고 생각하면 기쁨이 솟구쳐 올랐다. 마치 어린아이 둘이 이따금 목소리도 들리지 않고 얼굴도 보이지 않는 곳에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놀이에서처럼 말이다. 예전에 나는 바다가 나뭇가지 사이로 나타나기 전에 이제 내가 보려고 하는 것이 아직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처럼 아득히 먼 옛날의 그 미친 듯한 소요를 계속하는 저 애처로운 대지의 조상임을 생각하기 위해 눈을 감았던 그 바다가 보이는 길로 되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길들이 알베르틴에게 가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길이 어디까지 똑바로 나 있으며, 어디서 구부러지는지 알아서 모든 길이 다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면, 나는 예전에 스테르마리아 양을 생각하면서 그 길을 쫓아갔던 일과, 파리에서 게르망트 부인이 지나가던 길을 내려가면서 알베르틴을 만나려고 똑같이 서둘렀던 일을 떠올렸다. 그러자 그 길들은 내 기질이 쫓아가는 일종의 노선과도 같은, 심오한 단조로움과 도덕적 의미를 띠었다. 그것은 자연스러웠고 그렇지만 내 관심을 끌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 길들은 내 운명이 환영을 쫓는 데, 그 현실이 대부분 내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이들을 쫓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걸 환기했다. 사실 몇몇 사람들은 - 내 경우에는 유년 시절부터 그러했지만 - 타인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고정된 가치를 가진 온갖 것들, 즉 재산이며 성공이며 높은 지위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환영이다. 그들은 이런저런 환영을 만나기 위해 모든 걸 실행하고 이용하면서 나머지는 희생한다. 그러나 환영은 지체하지 않고 곧 사라진다. 그러면 우리는 비록 첫 번째 환영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 있을지언정 다른 환영을 쫓아 나선다. 내가 알베르틴을, 첫해 바다 앞에서 보았던 소녀를 쫓아다니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사실 내가 처음 사랑했던 알베르틴과, 지금 내가 거의 그 곁을 떠나지 않는 알베르틴 사이에는 다른 여인들이 끼어 있었다. 다른 여인들, 특히 게르망트 공작 부인이. 그러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게르망트 부인의 친구가 된 것이 더 이상 부인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알베르틴을 생각하기 위해서라면, 왜 그토록 질베르트 때문에 걱정하고, 왜 그토록 게르망트 부인 때문에 괴로워한단 말인가? 환영의 애호가였던 스완이라면 죽기 전에 이런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단 한 번의 만남을 위해, 또 금방 도주해 버리는 비현실적인 삶을 만져 보기 위해, 우리가 추구하고 망각하고 다시 찾는 환영들, 발베크의 길들은 이런 환영들로 가득했다. 그 길의 나무들, 즉 배나무며 사과나무며 타마레스크가 나보다 오래 살아남으리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그 나무들로부터 아직 영원한 휴식의 시각을 알리는 종이 울리기 전에 마침내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충고를 들은 것 같았다. 

 

 


 

04. 리브벨의 레스토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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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우리는 어느 화창한 날 리브벨로 점심 식사를 하러 갔다. 식당의 커다란 유리문과 차를 마시는 복도 모양 홀의 유리문이, 햇빛을 받아 금빛으로 물든 잔디밭과 동일 평면에 열려 있었으므로, 그 빛나는 거대한 레스토랑은 잔디밭의 일부를 이루는 듯했다. 분홍빛 얼굴에 검은 머리칼이 불꽃처럼 꼬인 한 종업원이 더 이상 보조 요리사가 아닌 근무조의 조장인 탓에, 전보다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넓게 트인 그곳에 달려들었다. 그래도 그는 타고난 활기 덕에 때로는 식당 안 멀리, 때로는 가까이, 하지만 정원에서 식사하기를 좋아하는 손님들의 시중을 들며 밖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곤 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달리는 어느 젊은 신을 묘사한 일련의 조각상들처럼, 어떤 조각상은 녹색 잔디밭으로까지 뻗은 건물의 불이 환히 켜진 실내에, 또 다른 조각상은 우거진 나뭇잎 아래나 야외 생활의 밝은 빛 아래서 보였다. 그런 그가 한순간 우리 옆에 있었다. 알베르틴은 내가 하는 말에 멍하니 대답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응시했다. 잠시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있으면서도 그 사람을 가질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내 눈에 그들은 둘만의 신비로운 밀담을 나누는 듯 보였으며, 내가 옆에 있어서 침묵을 지키는, 또 어쩌면 내가 모르는 예전 만남의 연장이거나, 아니면 그가 그녀에게 던진 시선의 연장에 지나지 않을 뿐인지 모르지만, 나는 거기서 상대가 감추려 하는 것을 방해하는 제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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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부터 나는 그 고통스러운 인상을 영원히 잊기 시작했는데, 나 스스로는 결코 리브벨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으며, 또 그곳에 처음 왔다고 단언하는 알베르틴에게서도 그곳에 다시는 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기 때문이다. 또 내가 동반한 것 때문에 즐거움을 빼앗겼다고 믿지 않게 하려고, 나는 그 날렵한 다리의 종업원이 그녀 외에 다른 사람은 쳐다보지 않았다는 사실도 부인했다. 이따금 리브벨에 돌아가는 일이 있었지만, 예전에 이미 그랬던 것처럼 홀로 술을 많이 마셨다. 마지막 잔을 비우면서도 하얀 벽에 그려진 장미 문양의 로자스를 바라보았고, 내가 느끼는 즐거움을 거기에 갖다 놓았다. 이 세상에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 그 로자스뿐인 듯했다. 나는 나의 도주하는 눈길로 번갈아 로자스를 뒤쫓고 만지고 잃어버렸으며, 또 그 로자스에만 만족하면서 나의 미래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마치 저기 앉아 있는 나비 주위를 빙빙 돌면서 그와 더불어 최상의 쾌락을 맛보는 행위 중에 삶을 마감하려는 한 마리 나비처럼, 평소에는 별로 주의하지 않지만 아주 작은 예기치 못한 피할 수 없는 사고만 일어나도 지극히 심각한 상태가 되는 그런 습관적인 병적 상태와도 흡사한 악이, 비록 가벼운 형태일지언정 내 몸 안에 자리 잡게 내버려 두는 것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순간은 어쩌면 최근의 어떤 격심한 고통도 내게서 그 고통을 야기한 여인들이 가지고 있는 진통제를 필요로 하지 않았으므로 한 여인을 단념하기에 특별히 선택된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05. 숲, 산과 바다 풍경, 비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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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나는 자주 혼자 있고 싶었다. 스스로 나의 일뿐 아니라 기쁨도 포기하게 만든다고 비난해 온 이 삶이 끝나기를 바라면서도, 나느 그날을 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가끔은 나를 사로잡는 습관이 갑자기 파기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대부분의 경우 환희에 찬 삶을 살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한 옛 자아가, 현재의 자아를 잠시 대체할 때였다. 특히 어느 날 알베르틴을 잠시 그녀의 아주머니 댁에 둔 채로 말을 타고 베르뒤랭 부부를 만나러 갔다가 베르뒤랭 부부가 아름답다고 자랑하던 숲에서 어떤 황량한 길로 접어들었을 때, 이런 탈주의 욕망을 느꼈다. 절벽의 형태를 그대로 따르는 길은 번갈아 오르막길로 올라가다가 작고 무성한 나무숲으로 에워싸이더니 이내 야생의 협곡으로 빠져들었다. 한순간 나를 둘러싼 헐벗은 바위들과 틈 사이로 보이는 바다가, 마치 다른 세계의 편린들처럼 내 눈앞에서 떠다녔다. 나는 그 산과 바다 풍경을 알아보았다. 그것은 엘스티르가 「뮤즈와 만난 시인」과 「켄타우로스와 만난 젊은이」라는 경이로운 수채화 두 편의 배경으로 삼았던 풍경이었는데, 나는 그 수채화들을 게르망트 공작 부인 댁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림에 대한 추억이 지금 내가 있는 장소를 현세 밖에 재배치했으므로, 나는 엘스티르가 그린 그 선사 시대의 젊은이처럼, 만일 산책 중에 어느 신화적 인물과 마주친다 해도 전혀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갑자기 내가 탄 말이 뒷발로 일어섰다. 뭔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던 모양이다. 나는 말을 제어하고 땅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먹었으며, 그러다가 소리가 들려오는 것처럼 보이는 지점을 향해 눈물 가득한 눈을 쳐들었고, 햇빛 속에서 머리 위 약 50미터쯤 되는 곳에서 별로 분명하지는 않지만 뭔가 인간의 얼굴과도 흡사한 존재를 실은 두 개의 반짝거리는 커다란 강철 날개를 보았다. 처음으로 반인반신을 본 그리스인처럼 나 또한 감동했다. 눈물도 흘렸다. 소음이 바로 내 머리 위에서 왔다는 걸 인지한 순간 - 비행기가 아직 드물 때였다. - 내가 처음으로 보려고 하는 것이 비행기라는 생각에 눈물을 흘릴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신문에서 감동적인 말을 기대할 때처럼, 울음을 터뜨리기 위해 비행기의 모습이 보이기만을 기다렸다. 그렇지만 비행사는 가는 길을 망설이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앞에 - 습관이 나를 포로로 하지 않는다면 내 앞에도 - 모든 공간의 길, 삶의 길이 열려 있음을 느꼈다. 그는 조금 더 멀리 날더니 몇 초 동안 바다 위를 활주하면서 갑자기 결심한 듯, 중력과 반대되는 어떤 힘에 끌린 듯, 마치 자기 나라에 돌아가려는 듯, 금빛 날개를 가볍게 움직이면서 하늘을 향해 곧바로 돌진했다. 

 

 


 

06. 작은 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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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귀로는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내게 어떤 시적 인상을 주면서 마음속에 여행에 대한 욕망을, 새로운 삶을 살고 싶은 욕망으 불러일으켜 알베르틴과의 모든 결혼 계획을 포기하고, 우리 관계를 결정적으로 끊고 싶은 소망조차 품게 하면서, 또한 그 모순되는 성격 때문에 우리의 결멸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돌아갈 때도 각각의 역에서 우리가 아는 사람들이 함께 올라타거나 플랫폼에서 인사를 건네면서, 우리의 마음을 진정시켜 주고 잠들게 하는 이런 사교성의 지속적인 즐거움이 상상력의 순간적인 즐거움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역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역의 이름들은 (할머니와 함께 여행했을 당시 그 이름들을 들은 첫날 저녁부터 그토록 나를 몽상에 잠기게 했던), 브리쇼가 알베르틴의 청에 따라 이름의 어원을 보다 완벽하게 설명해 준 저녁부터는 보다 알기 쉬운 것이 되어 그 기이함도 상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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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여름의 끝이 다가오면서 발베크로부터 두빌로 가는 여행길에는, 저녁마다 황혼 빛에 반짝이는 산봉우리의 눈처럼 절벽 꼭대기가 잠시 장밋빛으로 반짝거리는 생피에르데지프 역이 멀리서 보였지만, 아침이면 그 근방에서 볼 수 있는 광경, 엘스티르가 내게 말해 주던 그 해뜨기 전에 모든 무지개빛이 바위에 굴절되고, 어느 해 그를 위해 모델을 서 주었던 소년을 모래밭에서 벗은 몸으로 그리려고 그토록 수없이 잠에서 깨웠던 광경도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높이 솟은 역의 기이한 모습이 첫날 저녁부터 발베크로의 여정을 계속하는 대신 파리행 기차를 타고 싶은 강한 욕망과 더불어 나를 엄습했던 슬픔조차 생각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지만.) 생피에르데지프란 이름은 내게 샤토브리앙이나 발자크에 관해 함께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어느 기이하고도 재치 넘치는, 화장한 오십 대 남자의 출현을 알렸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저녁 안개 속에서 예전에 나를 그토록 몽상에 잠기게 했던 이 앵카르빌 절벽 뒤로 내가 보는 것은, 마치 고대의 사암토가 투명해졌다는 듯 캉브르메르 씨의 숙부 되는 사람이 사는 아름다운 집으로, 나는 그 집이 라 라스플리에르에서 만찬을 하고 싶지 않거나 발베크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때면 언제라도 나를 반갑게 맞아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처럼 처음 순간의 신비로움을 상실한 것은 이 고장의 지명만이 아니었다. 고장 자체도 마찬가지였다. 어원을 논하면서 이미 반쯤 신비로움을 비운 고장의 이름은 한 단계 더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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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측면에 매달려 있는 듯 보이는 지나치게 사교적인 삶의 골짜기에서, 한 무리의 친구들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저녁의 시적인 외침은 더 이상 부엉이나 개구리의 울음이 아닌, 크리크토 씨의 "어떠세요?" 혹은 브리쇼의 "카이레"와 같은 인삿말이었다. 그 분위기는 더 이상 고뇌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순전히 인간적인 발현으로 가득 차 쉽게 호흡할 수 있었고, 어쩌면 지나치게 마음을 안심시켜 주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가 거기서 취한 이점은 사물을 오로지 실질적인 관점에서만 본다는 것이었다. 알베르틴과의 결혼이 내게는 미친 짓으로 보였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권

소돔과 고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