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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transcription/「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셀 프루스트

2권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____ 21. 발베크에서의 아침

 


 

사실 발베크를 떠나야 했다. 벽난로와 난방장치가 없는 이 호텔에 오래 머무르기에는 추위와 습기가 너무 깊이 파고들었다. 게다가 이 마지막 몇 주 동안의 일들을 나는 거의 금방 잊었다. 발베크를 생각할 때면 거의 변함없이 떠오르는 모습은, 화창한 계절에는 오후마다 알베르틴과 그녀의 친구들과 함께 외출해야 했으므로, 할머니가 의사의 명령에 따라 아침마다 나를 억지로 어둠 속에 잠들게 한 그 순간들이었다. 지배인은 내가 있는 층에서는 소음을 내지 않도록 명령했고, 그 명령이 잘 지켜지는지 몸소 감시하러 왔다. 햇빛이 너무 눈부셔 첫날 저녁 그토록 내게 적대감을 내뿜던 커다란 보랏빛 커튼을 나는 그대로 닫은 채 두었다. 하지만 프랑수아즈가 저녁마다 햇빛이 들어오지 못하게 자신만이 풀 수 있는 핀으로 커튼이나 담요, 붉은 면직 탁자 덮개, 또는 여기저기서 주워 모은 천들을 고정했는데도 정확하게 틈새롤 다 메우지 못해 방의 어둠이 완전하지 못한 가운데, 아네모네의 진홍빛 꽃잎이 뜯긴 듯 여기저기 양탄자 위에 뿌려져 그 꽃잎 사이로 벗은 발을 잠시라도 내딛지 않고는 못 배겼다. 창문 맞은편 벽에는 부분적으로 빛이 비치면서 어떤 것으로도 떠받쳐지지 않은 금빛 원기둥이 수직으로 놓이더니 마치 사막에서 히브리인을 앞장섰던 불기둥마냥 천천히 움직였다. 나는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이 내게 권하는 놀이, 해수욕, 걷기의 즐거움을 오로지 상상력을 통해서만 전부 동시에 꼼짝하지 않은 채로 맛보아야 했던 나는, 마치 꼼짝하지 않으면서도 한창 작업 중인 기계가 제질에서 빙글빙글 돌며 속도를 내듯, 그 기쁨에 내 가슴이 요란하게 고동치는 것이었다. 

내 친구들이 방파제에 있다는 건 알았지만 눈으로 볼 수는 없었다. 그동안 소녀들은 바다의 고르지 못한 사슬고리 앞을 지나가고 있었고, 바다 멀리 저편에는 이탈리아의 어느 작은 마을처럼 푸르스름한 바다 봉오리 한가운데 새인 양 앉아 있는 작은 도시 리브벨이 이따금 날씨가 갤 때면, 태양으로 아주 미세하게 재단되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친구들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프랑수아즈가 '신문기자'라고 부르는 신문팔이의 외침과 해수욕하는 사람들, 또 노는 아이들 소리가 바닷새의 지저귐마냥 부드럽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에 점철되어 내 방 전망대까지 올라오는 동안) 난 그녀들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었고, 곧 네레이드의 웃음마냥 잔잔한 물결 소리에 휩싸여 내 귀까지 올라오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계속 바라보았어요." 하고 알베르틴이 저녁이 되자 말했다. "당신이 내려오지 않나 하고요. 하지만 당신 방 덧문은 연주회 시간까지도 닫혀 있었어요." 사실 10시가 되면 내 방 창 너머로 음악이 터져 나왔다. 악기들 사이로, 만일 바다가 만조라면, 연이어 흐르는 물결 소리가 미끄러지듯 흘러나오면서 크리스털 소용돌이 속에 바이올린 선율을 감싸는 듯했고, 해저 음악의 간헐적인 메아리 위로 그 거품을 분출하는 듯했다. 나는 옷을 입고 싶었지만 아직 옷을 가져오지 않아 마음이 초조해졌다. 정오가 울리고 드디어 프랑수아즈가 들어왔다. 그리고 몇 달 동안,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안개 속에 파묻힌 모습을 상상하며 그토록 오고 싶었던 이 발베크에서 화창한 날씨가 얼마나 눈부시게 지속되었는지, 프랑수아즈가 창문을 열러 올 때면, 창문 밖 모서리에서는 한결 같은 빛깔로 접힌 똑같은 햇빛 조각이 어김없이 발견되었으나 그 조각은 윤기 없는 가짜 칠보의 빛깔보다 더 우중충해 보여 여름의 표시로서는 그다지 감동을 주지 못했다. 그러다 창문 위쪽 채광창에서 프랑수아즈가 핀을 뽑고 덮개를 걷어 내며 커튼을 당기면서 열어젖히는 여름날은, 우리 늙은 하녀가 내 눈에 드러내기 전에 감싸고 있던 천 조각들을 조심스럽게 풀어 헤치는 그 수천 년 지난 화려한 미라의 향기로운 황금빛 옷처럼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듯 그토록 아득해 보였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권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