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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transcription/「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셀 프루스트

3권 / 게르망트 쪽 ____ 02. 오페라좌

 


사실을 말하자면, 몇 해 전에 그토록 내 마음을 흔들었던 라 베르마의 목소리를 들을 가능성에 나는 별다른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예전에 내 건강이나 휴식보다도 더 좋아했던 것들에 대한 무관심을 확인하면서 뭔가 슬픔 같은 걸 느꼈다. 내 상상력이 엿본 현실의 소중한 조각들을 가까이서 보고 싶은 열정이 사그라져서가 아니었다. 이제는 내 상상력이 그 현실의 조각들을 위대한 여배우의 대사 낭송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엘스티르를 방문한 후부터 지난날 라 베르마의 연기와 비극 예술에 대해 가졌던 나의 내적인 신앙은 이제 몇몇 장식 융단이나 현대 그림들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나의 신앙이나 욕망이 라 베르마의 대사 낭송이나 그녀 자태에 더 이상 지속적인 찬미를 보내지 않게 된 후부터, 내 마음속에 지녔던 그 낭송과 자태의 '분신'은, 마치 고대 이집트의 죽은 자들이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양분을 줘야 했던 또다른 '분신들'처럼 점차 시들어 가고 말았다. 라 베르마의 예술은 하찮고 초라한 것이 되었다. 그 안에는 어떤 심오한 영혼도 살고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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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막이 올랐다. 과거에 내게 있었던 어떤 정신적인 자질이나 취향도 남아 있지 않은 걸 깨닫고 난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는 그 경이로운 현상의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세계 끝까지 가서라도 감상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마치 천문학자가 혜성이나 일식을 세밀하게 관찰하려고 아프리카나 서인도제도에 설치하는 그 감도 높은 판처럼 내 정신을 준비했으며, 몇 점 구름이 (배우의 불쾌한 기분이나 관객들의 뜻하지 않은 사건이) 최고의 집중력으로 이루어지는 공연을 방해할까 봐 마음을 졸였다. 그때 나는 공연을 위해 제단처럼 축성된 극장에 가지 않고는 최상의 조건에서 연극을 관람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으며, 라 베르마가 작은 붉은 커튼 아래로 나타났을 때에는, 비록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녀가 임명한 그 하얀 카네이션을 단 개찰원이나 옷차림이 허술한 사람들로 가득한 아래층 뒷좌석 위로 튀어나온 그 특별석 아랫부분, 그녀의 사진이 든 프로그램을 파는 여자들, 작은 공원의 마로니에 나무들, 당시 내 인생에 동반하며 내 속내를 들어주던, 그래서 내 인상과는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던 그 모든 것들이 라 베르마의 출현과 하나를 이루는 것 같았다. 「페드르」와 '고백 장면'과 라 베르마는 당시 내게 있어 어떤 절대적인 실존을 의미했다. 일상적인 경험의 세계로부터 물러난 그 실존은 그 자체로 존재하여 내가 그쪽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아무리 내 눈과 영혼을 크게 뜨고 깊숙이 그 안으로 꿰뚫고 들어간다 해도 나는 여전히 적은 것밖에 흡수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삶은 얼마나 상쾌해 보였는가! 옷을 입거나 외출 준비를 하는 순간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보내는 삶의 무의미함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저 너머에는 절대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는, 그 선하고 접근하기 힘들며 전부를 소유하는 게 불가능한 보다 견고한 현실인 「페드르」와 '라 베르마가 말하는 방식'이 있었으니까. 무대 예술의 완벽함에 대한 몽상으로 포화 상태에 빠진 나는 - 만약 누군가가 당시 낮이나 또는 어쩌면 밤의 어느 순간에라도 내 정신을 분석했다면, 그러한 몽상의 상당량을 추출할 수 있었으리라. - 마치 충전 중인 배터리와 흡사했다. 그래서 몸이 아파 병으로 죽을 거라고 믿으면서도 라 베르마를 들으러 가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런 순간까지 이르렀으리라. 그런데 지금은 멀리서 보면 창공의 푸른빛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평범한 사물의 시계 안으로 들어오는 언덕과 마찬가지로, 이 모든 것들이 절대의 세계를 떠나 그저 내가 거기 있음으로 해서 인식하는, 다른 것들과 비슷한 그런 것에 지나지 않았고, 배우들도 내가 아는 이들과 똑같은 본질로 만들어져 그저 「페드르」의 시구를 더 잘 낭송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 시구 역시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숭고하고도 개별적인 본질을 이루지 못한 채 다소간에 성공적인, 그것이 끼어 있는 방대한 플아스 시 목록 안에 다시 들어가려고 준비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아직도 내게 영향을 미치는 그 집요한 욕망의 대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지만, 반대로 해마다 모습을 바꾸면서 어떤 위험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갑작스러운 충동적 행동으로 몰고 가는 그 변하지 않는 몽상, 이런 몽상에 쓸리기 쉬운 성향은 여전히 존재했으므로, 나는 그만큼 더 깊은 절망감을 맛보았다. 아픈 몸을 이끌고 어느 성으로 엘스티르의 그림이나 고딕풍 장식 융단을 보려고 외출했던 날은, 내가 베네치아로 떠나려고 했던 날이나 라 베르마를 관람하려고 외출했던 날, 또는 발베크로 떠났던 날과 얼마나 흡사했던가! 내가 지금 희생의 대가를 치르는 대상도 얼마 안 가면 무관심해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지금은 그토록 잠 못 이르는 수많은 밤과 고통스러운 통증의 순간을 보내면서도 보러 가고 싶어 하지만, 그때 가서는 바로 그 옆을 지나치면서도 성안에 있는 그림이나 장식 융단을 보러 갈 생각조차 하지 않으리라고 예감했다. 이처럼 대상의 불안정한 성질을 통해 나는 내 노력의 덧없음을 간파했고, 동시에 예전에는 주목하지 않았던, 마치 다른 사람으로부터 피로해 보인다고 지적받으면 피로가 두 배로 커 보이는 신경 쇠약 환자마냥, 그 노력이 엄청났다는 것도 깨달았다. 하지만 그동안 내 몽상은 내 몽상과 관계되는 거라면 뭐든지 매력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항상 어느 한쪽을 향해 가는, 이를테면 동일한 꿈 주위에 집중된 관능적인 욕망에서조차, 나는 그 첫 번째 동인으로 하나의 관념을, 그걸 위해 내 삶을 희생해도 좋은 그런 관념의 존재를 인식했으며, 또 그 중심에는 언제나 콩브레 정원에서 오후 나절 책을 읽으면서 했던 몽상에서처럼 완벽함의 관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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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베르마가 무대에 등장했다. 그러자 오! 기적이 일어났다. 전날 밤에 아무리 애를 써도 생각나지 않다가 자고 일어나면 암기한 것이 모두 떠오르는 학과처럼, 그리고 기억의 열렬한 노력으로 뒤쫓아가 보지만 만나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더 이상 그들을 생각하지 않을 때, 저기 눈앞에 생전 모습 그대로 나타나는 망자의 얼굴처럼, 내가 그토록 본질을 포착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추구했을 때는 나로부터 빠져나갔던 라 베르마의 재능이, 이제 망각의 세월 후 이 무관심한 시간에 그 자명한 힘으로 감탄을 자아냈다. 예전에 나는 이 재능을 따로 분리하기 위해 어떻게 보면 내가 들은 것에서 배역 자체를, 페드르를 연기하는 모든 배우에게 공통된 부분인 배역을 제외시키려고 했다. 또 그 배역을 미리 연구하여 뽑아내고 나머지 요소를 통해서만 베르마 부인의 재능을 모으려 했다. 이처럼 그녀가 맡은 배역 밖에서 내가 파악하기를 원했던 재능은, 그러나 그 배역과 하나를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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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상은, 사실을 말하자면, 조금은 호의적이었지만 예전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단지 이 인상을 나는 더 이상 연극의 천재라는 조금은 추상적이고 그릇된 선입관에 대조해서 검토하지 않았으며, 또 연극의 천재란 바로 이런 것임을 깨달았다. 내가 처음 라 베르마를 들었을 때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면, 예전에 질베르트를 샹젤리제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내가 지나치게 큰 욕망을 품고 다가갔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두 환멸 사이에는 이런 유사성뿐 아니라 어쩌면 보다 심오한 유사성이 있었을지 모른다. 한 인간이나 작품이 (또는 연기가) 우리에게 야기하는 인상은 아주 특징적이며 특별하다. 우리에게는 '아름다움'이나 '스타일의 폭', '비장미' 라는 관념이 있어, 부득이한 경우 어떤 평범한 재능이나 단정한 얼굴에서도 이를 알아보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지만, 이내 우리의 주의 깊은 정신은 그 앞에서 어떤 지적인 등가물도 가지지 못한 형태가 집요하게 나타나는 걸 보면, 거기서 미지의 것을 끄집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정신은 날카로운 소리나 기이하게 묻는 듯한 억양을 들으면서 이렇게 질문한다. "이게 아름다움일까? 내가 느끼는 것이 찬미일까? 바로 이것이 색채의 풍요로움이며 고귀함이며 힘이란 걸까? 그러면 다시 정신에 응답하는 것은 날카로운 목소리이자 기이하게 묻는 듯한 어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존재로 인해 야기된 횡포한 인상, 순전히 물질적인 인상으로, 그 안에는 '연기의 폭'을 위해 어떤 빈 공간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바로 이런 사실로 우리가 귀 기울여 진지하게 듣는 경우, 우리를 가장 많이 실망시키는 작품이 실제로는 가장 훌륭한 작품들로, 거기에는 바로 우리 관념의 목록 중 이런 개별적인 인상에 일치하는 작품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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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 세계에서 느끼고 다른 세계에서는 생각하고 명명하며, 그리하여 이 두 세계 사이에 어떤 일치점을 설정할 수 있지만, 그 간격을 메울 수는 없다. 바로 이것이 내가 넘어서야 했던 거리감이자 균열이었다. 내가 처음 라 베르마의 연기를 보러 갔던 날, 나는 내 모든 귀를 기울여 들으면서도 '고귀한 연기와 독창성'이란 내 관념에 도달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으며 그러다 잠시 마음을 비운 후에야 박수를 쳤는데, 이 박수 소리는 내가 느낀 인상에서 생겨나지 않고 뭔가 "드디어 라 베르마를 듣는구나."라는 말을 하면서 느끼는 기쁨이나 선입관에 연유했다. 그리고 한 인간 또는 지극히 개인적인 작품과 아름다움의 관념 사이에 존재하는 커다란 차이는, 그 인간이나 작품이 우리에게 느끼게 하는 것과 사랑이나 찬미의 관념 사이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이나 찬미의 관념을 알아보지 못한다. 나는 라 베르마를 들으면서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질베르트를 만났을 때 그랬던 것처럼.) "내가 그녀를 찬미하지 않는 걸까?" 하고 중얼거려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여배우의 연기를 연구할 생각에만 온통 몰두해 있었으므로 그 연기에 담긴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내 생각을 가능한 한 폭넓게 열어 두려고 애썼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바로 이것이 찬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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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나는 비극 배우에게서 작가의 작품이란 탁월한 연기 창조를 위해 그 자체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그저 하나의 질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는 마치 내가 발베크에서 알게 된 위대한 화가 엘스티르가 별 특징 없는 학교 건물과 그 자체로도 걸작인 대성당에서 동일하게 가치 있는 두 그림의 소재를 발견한 것과도 같다. 또 화가가 거대한 빛의 효과 속에 집과 마차와 인물들을 녹여 동질적인 실체로 만들어 내듯이, 마찬가지로 라 베르마는 평범한 예술가라면 따로따로 드러나게 했을 단어들을 녹여 똑같이 평평하게 만들거나 들어 올리면서, 그 위에 두려움이나 다정함의 광대한 천을 펼쳐 보였다. 물론 예술가마다에겐 각자 고유한 억양이 있으며, 또 라 베르마의 발성법은 운문의 이해를 방해하지도 않았다. 하나의 운을 듣고, 다시 말해 앞의 운과 비슷하면서 다른 뭔가가 앞의 운에 의해 유발되어 새로운 관념의 변주를 끼워 넣을 때, 우리는 사상과 운율이라는 두 체계가 포개지는 걸 느끼는데, 바로 이것이 이미 조직화된 복잡성, 아름다움의 첫 요소가 아닐까?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권

게르망트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