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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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 풍경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발베크 해변에서 가까운 그곳은 광막한 들판에 둘러싸인 작고 귀족적인 군사 도시로, 화창한 날씨에는 멀리서 끊어지듯 이어지는 음향 안개가 떠돌면서 - 구불구불하게 늘어선 포폴러 장막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시냇물의 흐름을 그리면서 - 훈련 중인 부대의 이동을 드러내고, 길과 거리와 광장의 대기조차 끊임없는 군대 음악의 진동으로 물들며, 짐수레나 전차의 가장 평범한 소리가 환각에 젖은 귀에는 정적 속에서도 무한히 되풀이되는 나팔 소리의 아련한 호출로 이어진다. 그곳은 사실 파리에서 그리 멀지 않았으므로 급행을 타면 그날로 어머니와 할머니 곁으로 돌아가 내 침대에서 잠을 잘 수도 있었다. 이런 사실을 깨닫자마자 나는 고통스러운 열망에 사로잡혀, 파리에 돌아가지 않고 이 작은 도시에 남기로 결심할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그렇지만 기다려 줄 할머니 없이 자기 소지품을 감시하는 나그네의 헐벗은 영혼으로, 합승 마차까지 가방을 들어다 주는 짐꾼 뒤를 쫓아가는 걸 가로막을 의지가 내게는 없었으며,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잘 아는 그런 건방진 사람의 태도로 마차에 올라타서는 마부에게 기병대 병영 주소를 주는 걸 막을 의지도 없었다. 그날 밤 안으로 내가 머무르는 호텔로 생루가 자러 와서는 이 낯선 도시와 처음 접촉하는 데서 오는 불안감을 덜어 주리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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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생루의 방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닫힌 문 앞에 잠시 서 있었다. 뭔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뭔가가 움직이고 다른 것은 떨어지는 소리였다. 빈방이 아니라 누군가가 있는 듯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은 장작불 타는 소리에 자니자 않았다. 불은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듯 아주 서투르게 장작을 움직였다. 나는 방 안에 들어갔다. 장작 하나가 불에 굴러 떨어졌고 다른 하나가 타올랐다. 불은 움직이지 않을 때에도 경박한 사람들처럼 내내 요란한 소리를 냈는데, 불꽃이 타는 모습을 본 나는 그것이 불꽃임을 알았지만, 만일 내가 벽 반대쪽에 있었다면, 누군가가 코를 풀며 걸어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드디어 방 안에 앉았다. 리버티 벽지와 18세기 옛 독일산 천이, 건물의 나머지 부분에서 발산되는 투박하고 싱거우며 팽드미마냥 상하기 쉬운 냄새로부터 이 방을 보호했다. 바로 여기 이렇게 매력적인 방에서라면 행복하고 조용하게 식사도 하고 잠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탁자 위 사진들과 나란히 놓인, 연구 중인 책 덕분에 나는 생루가 방 안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마침내 친숙해진 벽난로 불길을 통해 내 사진과 게르망트 부인의 사진을 알아보았다. 불길은 열렬하면서도 고요하고 충직하게 기다리며 누워 있는 짐승처럼, 이따금 숯불을 떨어뜨리면서 잘게 부수거나 벽난로 내부를 핥았다. 생루의 회중시계가 똑딱거리는 소리가 나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렸다. 내가 회중시계를 직접 눈으로 보지 못했으므로 이 똑딱 소리는 줄곧 자리를 옮기는 것 같았다. 소리는 내 뒤에서 내 앞에서, 또는 오른쪽에서 왼쪽에서 오는 듯했으며, 때로는 아주 멀리 있는 듯 약해졌다. 갑자기 회중시계를 탁자 위에서 발견했다. 그러자 똑딱 소리가 정해진 장소에서 들려왔고 거기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그 장소에서 똑딱 소리를 들었다고 믿었지만, 소리에는 장소가 없으므로 소리를 들은 것이 아니라 실은 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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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자 나는 온 마을이 내다보이는 아주 높은 곳에 위치한 생루 방의 창문을 통해 새로운 이웃인 전원 풍경, 어젯밤에는 너무 늦게 도착한 탓에 이미 어둠 속에 잠들어 있어 보지 못했던 풍경을 알기 위해 호기심 어린 눈길을 던졌다. 그러나 이처럼 들판이 깨어 있는 이른 시간에 내가 십자형 유리창을 열면서 본 것은, 단지 연못가 옆 성의 창문에서 보이는 듯한 새벽안개의 부드러운 하얀 옷 속에 휩싸인, 아직은 아무것도 구별할 수 없는 들판이었다. 하지만 병영 마당에서 말을 돌보단 병사들이 말의 빗질을 끝낼 무렵이면 아침 안개가 걷히리라는 걸 나는 알았다. 그때까지는 헐벗은 언덕 하나가 이미 그림자가 제거된 채로 가느다랗고 꺼칠한 등을 병영 쪽으로 세우는 모습밖에 다른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서리가 끼어 빛이 스며든 커튼 너머 처음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 낯선 언덕으로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이 병영에 규칙적으로 출입하게 된 후부터 언덕을 눈으로 보지 않고도 언덕이 저기 있다는 의식, 따라서 우리가 부재하는 이를 혹은 죽은 이들을 생각하듯이, 다시 말해 그들의 존재를 더 이상 믿지 않으면서도 생각하는 그런 발베크의 호텔이나 파리에 있는 우리 집보다 더 현실적인 의식 덕분에, 그 반사된 언덕의 형태는 내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동시에르에서 내가 받은 아주 작은 인상들 위에, 또 이날 아침을 비롯하여 언덕을 바라보는데, 시각의 중심처럼 보이는 이 아늑한 방에서 생루의 명으로 준비된 초콜릿 차가 내게 주던 그 따뜻한 열기의 쾌적한 인상 위에 언제나 그 실루엣을 그려 넣고 있었다. (언덕을 바라보는 일 말고 다른 것을 하겠다는, 산책하겠다는 생각이 거기 낀 동일한 안개 때문에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이처럼 언덕의 형태를 흡수하여 초콜릿 차와 당시 내 모든 상념의 실타래에 연결된 그 안개는, 마치 변질되지 않은 순금 덩어리가 발베크에 대한 내 인상에 연결되듯, 거무스름한 사암토 외부 계단이 가까이서 보이기만 해도 콩브레에 대한 내 인상에 어떤 잿빛을 띠게 하듯, 내 생각이 전혀 거기에 미치지 않는데도 그때의 내 모든 상념을 적시러 왔다. 게다가 안개는 아침 늦게까지 버티지 못했는데, 태양이 처음에는 헛되이 안개를 향해 화살 몇 개를 쏘아 대다가 반짝이는 장식 끈을 달며 드디어는 안개를 물리쳤기 때문이다. 언덕은 잿빛 산등성이를 태양 아래 드러냈고 한 시간 후 내가 도시로 내려갈 때면, 햇살이 붉은 나뭇잎이나 벽에 붙은 선거 포스터의 붉고 푸른빛에 어떤 열광을 더해, 그 열광이 나를 들뜨게 하고 가슴을 고동치게 하여 나는 보도 위에서 노래 부르며 기쁨으로 펄쩍펄쩍 뛰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
그러나 두 번째 날부터 나는 호텔로 자러 가야 했다. 그곳에서는 필연적으로 슬픔을 맛보리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슬픔은 냄새를 맡을 수 없는 아로마와도 같은, 내가 태어난 이래 모든 새로운 방, 다시 말해 모든 방이 발산하는 냄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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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내 생각은 틀렸다. 나는 잠시도 혼자가 아니었으므로 슬퍼할 틈이 없었다. 옛 궁전에는 현대식 호텔에서는 쓰이지 않는 어떤 사치의 여분이 남아 있어, 이 여분은 온갖 실용적인 임무를 떠나 그 한가로움 속에서 일련의 삶을 누리고 있었다. 이를테면 목적 없이 왔다 갔다 하다 매 순간 마주치는, 항상 제자리를 빙빙 도는 복도, 회랑처럼 길게 뻗었으면서도 살롱처럼 장식된 홀, 이런 것들은 숙소의 일부를 이룬다기보다는 거기 그냥 살고 있는 듯하여 어느 방에도 포함될 수 없지만, 내 방 주위를 배회하다 곧 그들의 동반자를 내게 보여 주려는 듯 찾아왔고, 한가롭지만 소란스럽지 않은 이웃이자 과거의 평범한 유령들인 이 동반자들은 사람들이 예약한 방문 앞에서 소리 없이 남아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는지 오가는 길에 마주칠 때마다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요컨대 우리의 현 생활을 담고 있으며 추위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단순한 용기로서의 숙소라는 관념은, 사람들 무리만큼이나 현실적인 방들의 집합소인 이 처소에는 적용될 수 없었는데, 사실 그곳은 정적 속에 살지만 우리가 들어갈 때마다 만나거나 피하거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삶의 처소였다. 우리는 18세기 이래 낡은 금빛 기둥 사이로, 그림이 그려진 천장의 구름 아래로 펼쳐지는 데 익숙한 커다란 살롱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존경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 작은 방들에 대해 보다 친숙한 호기심이 들었고, 그 수를 셀 수 없는 방들은 놀란 듯, 뭔가 균형의 개념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듯, 커다란 살롱 주위를 달리다 정원까지 무질서하게 도망쳐 가서는 거기서 망가진 세 칸짜리 계단을 통해 쉽게 정원으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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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기를 마쳤을 때, 나는 햇빛이 비치는 하늘에 마음이 끌리면서도 겨울이 시작되어 그토록 눈부시고 차가운 늦가을 아침 냉기에 조금은 망설이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그물에 걸려 공중에 남아 있는 듯 보이는 나뭇잎이 한두 개 금빛이나 분홍빛 흔적만을 가리키는 나무를 보려고, 담요 속에 몸을 파묻은 채 머리를 들고 목을 내밀었다. 마치 탈바꿈 중인 번데기처럼 나는 같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여러 다른 부분을 가진 이중적인 존재였다. 내 눈은 열기가 없어도 색깔만 있으면 만족했고, 반대로 내 가슴은 열기에만 신경 쓰고 색깔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벽난로에 불을 붙인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나 보랏빛과 금빛이 감도는 아침의 그 투명하고도 부드러운 정경을 바라보면서, 거기에 좋은 파이프처럼 불이 붙어 피어오르는 난롯불을 쑤시며 싸늘한 아침에 부족하 열기를 인위적으로 덧붙였다. 불은 파이프 담배와 마찬가지로 물질적인 편안함에서 비롯된 속된 기쁨과, 동시에 그 뒤로 한 순수한 영상이 어렴풋이 그려지면서 보다 미묘한 기쁨을 주었다. 화장실 벽에는 하얀 꽃무늬가 뿌려진 새빨간 벽지가 붙어 있어 익숙해지기가 조금 힘들 것 같았다. 그러나 꽃들은 내게 새로워 보였고, 갈등을 일으키는 일 없이 그것과 접촉하게 했으며, 잠에서 깨어날 때의 상쾌함과 노래를 조정하여 강제로 나를 일종의 개양귀비 한복판에서 세상을 보게 했는데, 새로운 집이라는 그 즐거운 병풍 뒤에서, 부모님 집과는 다른 방향에 놓인 그 신선한 공기가 흘러드는 집에서 나는 파리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았다. 때로는 할머니가 몹시 보고 싶어서 또는 할머니가 아플까 봐 걱정이 돼서 마음이 무척 불안했고, 아니면 파리에 두고 온, 현재 진행 중인, 별로 진척될 기미가 없는 일이 생각났으며, 때로는 이곳에 와서까지 내가 매달릴 구실을 찾는 어떤 어려운 일이 생각나기도 했다. 이런 걱정들 때문에 는 잠을 이룰 수 없었으며, 내 전 존재를 한순간에 가득 채우는 이런 슬픔 앞에서 어쩔 줄 몰랐다. 그래서 나는 호텔에서 사람을 시켜 병영에서 생루에게 혹시 물리적으로 가능하다면 잠시 와 주었으면 좋겠다는 - 어려운 일이라는 건 알았지만 - 편지를 보냈다. 한 시간이 지나자 생루가 왔다. 그가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를 듣자 나는 걱정거리에서 해방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걱정이 내 힘을 넘어서는 것이라면, 그는 그보다 더 강하다는 걸 알았으며, 그래서 내 주의력은 그 걱정에서 벗어나 그걸 진정시켜 줄 생루를 향했다. 들어오자마자 생루는 아침부터 그가 그토록 많은 활동을 펼쳤던 밖의 공기를, 내 방과는 전혀 다른 활기찬 분위기를 내 주위에 퍼뜨렸고, 나는 곧 그에 적합한 반응으로 대처했다.
02.
병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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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생루의 친구들이 저녁 식사 중에 펼치는 전술론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자주 들판에서 벌어지는 연대 훈련을 보러 갔다. 마치 음악을 전공하는 누군가가 연주회를 들으면서 나날을 보내다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의 생활로 둘러싸이는 카페에 드나들면서 큰 기쁨을 느끼듯이, 각기 다른 지휘관들을 가까이서 보는 것이 내 나날의 소망이 되었다. 연병장에 이르기까지는 꽤 많이 걸어야 했다. 그래서 저녁이면 식사가 끝나자마자 잠을 자고 싶은 생각에 머리가 현기증이라도 이는 듯 자주 앞으로 떨어지곤 했다. 다음 날 아침이면 발베크에서 생루가 나를 리브벨로 저녁 식사 자리에 데리고 가서 해변의 연주회를 듣지 못했을 때처럼 군악대 소리도 듣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하여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피로로 몸을 일으킬 수 없다는 생각이 감미롭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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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힘이 넘쳤으며, 삶이 내 앞에 더 길게 펼쳐졌다. 어린 시절 콩브레에서 게르망트 쪽으로 산책한 다음 날 상쾌한 피로를 느꼈던 시절까지 되돌아갔기 때문이다. 시인들은 우리가 어려서 살던 이런저런 집이나 정원에 들어가면 예전 우리 모습을 잠시나마 되찾을 수 있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무모한 순례 여행으로, 성공하는 만큼이나 환멸로 끝나는 경우도 많다. 여러 다른 세월에 따라 함께 존재하는 그 고정된 장소들은 차라리 우리 마음속에서 찾는 편이 낫다. 그리고 잠을 푹 잔 다음 날 느껴지는 커다란 피로감이 그 일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이런 숙면과 커다란 피로감이, 전날 밤의 어떤 반영도 어떤 기억의 빛도 우리의 내적 독백을 비추지 않는 (내적 독백이 스스로 멈추지 않는 한) 가장 깊은 잠의 지하 갱도로 우리를 내려가게 하면서, 몸을 덮고 있는 흙과 응회암을 그토록 완전하게 뒤집어, 근육이 잠기고 그 가지를 비틀고 새로운 삶을 호흡하는 바로 그곳에서, 어린 시절의 정원을 되찾게 해 준다. 이런 정원을 다시 보기 위해서는 여행을 하기보다 우리 마음속으로 깊이 내려가야 한다. 땅이 덮었던 것은 더 이상 땅 위가 아니라 땅 아래에 있다. 죽은 도시를 방문하려면 여행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발굴해야 한다. 얼마나 덧없는 우연한 몇몇 인상들이 이런 유기체의 분해보다 더 정교한 정확성으로, 보다 가볍고 비물질적이며 현기증 나는 확실한 비상으로 우리를 과거로 돌아가게 하는지는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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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인데도 생루가 외출하지 못하는 날이면, 나는 그를 보러 자주 병영에 갔다. 병영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도시에서 빠져나와 구름다리를 건너야 했는데, 다리 양편으로 광대한 전망이 펼쳐졌다. 조금은 강한 산들바람이 거의 언제나 이 높은 지대에 불어와 병영 마당 삼면에 지어진 건물들을 가득 채웠고, 건물들은 바람의 동굴인 양 끊임없이 으르렁거렸다. 몇몇 임무로 붙잡힌 로베르를 그의 방문 앞이나 식당에서 기다릴 때면, 나는 그가 소개해 준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면서 (나중에 로베르가 없을 때도 그들을 만나러 갔다.) 창문 너머 100여 미터 아래 떨어진 곳에서 헐벗은 들판을, 하지만 여기저기 새로 심은 묘목이 아직 비에 젖은 채 햇빛을 받아 유약을 칠한 듯 반짝거리는 반투명 초록빛 모판을 만드는 들판을 바라보면서, 그들로부터 로베르 이야기를 듣곤 했는데, 그럴 때면 로베르가 얼마나 그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또 그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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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에서 나와 한 바퀴 돌고 나서, 나는 생루가 친구들과 숙식하는 호텔에서 그와 같이 날마다 저녁 식사 하는 시간이 될 때까지 두어 시간 동안 휴식을 취하며 책을 읽으려고 해가 지자마자 곧 내가 머무는 호텔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광장에는 저녁 하늘이 성의 원추형 지붕에 벽돌 빛깔과 잘 어울리는 작은 분홍빛 구름을 내려놓고 석양빛 반사로 그 벽돌 빛깔을 부드럽게 하면서 손질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어떤 움직임으로도 고갈될 수 없는 생명의 흐름이 내 신경에 몰려왔다. 광장 포석에 한 걸음 한 걸음 닿을 때마다, 내 발걸음은 마치 헤르메스의 날개가 발꿈치에 돋친 듯 통통 튀어 올랐다. 한 분수에는 붉은 미광이 가득했고 다른 하나에는 벌써 달빛이 물을 유백색으로 물들였다. 이런 분수들 사이로 아이들은 고함을 지르거나 원을 그리며 놀면서도 칼새와 박쥐같이 어떤 시간의 필연성에 복종하는 듯 보였다. 지금은 저축 은행과 군대 본부가 들어 서 있는 호텔 옆 옛 법원과 루이 16세 시대 오렌지 나무 온실은 이미 불 켜진 가스등의 창백한 금빛으로 안에서 조명되었고, 이 불빛은 아직 해가 있는 밖에서 보면, 마치 노란 거북 등껍질로 만든 머리 장식이 붉은빛 도는 얼굴과 잘 어울리듯, 마지막으로 반사되는 저녁놀이 다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18세기풍 높고 커다란 창문과 잘 어울렸으며, 또 내게 빨리 벽난로와 램프 불 곁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하는 것 같았다. 내가 묵는 호텔 정면에서 홀로 저녁놀과 싸우는 이런 램프 불을 위해 나는 어둠이 깊어지기 전에 간식을 먹으러 가듯 즐겁게 집으로 돌아갔다. 숙소에 들어가서도 나는 밖에 있을 때와 동일한 충일감을 유지했다. 이 충일감은 그렇게도 종종 평범하고 공허해 보이는 표면들, 벽난로의 노란 불길과 저녁놀이 중학생처럼 장밋빛 연필로 되는 대로 병따개를 뒤섞어 놓은 듯한 거친 하늘색 벽지와, 줄 쳐진 종이 한 묶음과 잉크병이 베르고트의 소설책 한 권과 함께 나를 기다리는, 둥근 탁자에 깔린, 무늬가 특이한 두꺼운 식탁보 같은 물건들의 표면을 볼록 튀어나오게 하여, 그 물건들은 이후에도 내가 찾고자 한다면 언제라도 계속해서 꺼낼 수 있는 어떤 특별한 삶을 가득 담고 있는 듯했다. 나는 이제 막 떠나온 병영을,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풍향계가 빙빙 돌아가는 병영을 즐겁게 생각했다. 마치 잠수부가 수면 위까지 올라온 관 속에서 호흡하듯, 나는 뭔가 건강한 생활과 자유로운 대기에 접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바로 그 연결점이 이 병영, 초록빛 유약을 바른 운하가 깊게 파인 들판을 내려다보는 이 높은 전망대라고 느꼈으며, 그리하여 병영 창고와 그 건물들 안으로 내가 원할 때면 언제라도 갈 수 있고 환대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소중한 특권처럼 여겨지면서 그 특권이 오래 지속되기만을 바라게 되었다.
03.
레스토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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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7시가 되자 나는 옷을 갈아입고 생루가 머무는 호텔에서 함께 식사하기 위해 다시 외출했다. 나는 그곳까지 걸어가는 게 좋았다. 어둠이 깊었고, 사흘 전부터 밤이 오기만 하면 눈을 예고하는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걷는 동안 게르망트 부인에 대한 생각을 잠시도 멈춰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로베르의 주둔지로 찾아온 것도 오로지 그녀에게 접근하기 위한 시도였으니까. 그러나 추억이나 슬픔은 유동적이다. 어떤 날은 추억이나 슬픔이 너무 멀리 가 있어 거의 눈에 띄지 않고 우리를 떠난 듯 보인다. 그러면 우리는 다른 것에 주의를 기울인다. 또 이 도시의 길들도 아직은 우리가 평소에 사는 곳에서처럼 단순히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가는 수단이 아니었다. 내게는 이 미지의 세계에서 주민들이 영위하는 삶이 경이롭게만 보였고, 어느 불 켜진 집의 창문은 내가 꿰뚫고 들어가지 못할 진정 신비로운 삶의 장면을 눈앞에 비추면서 오랫동안 나를 어둠 속에 붙들고 꼼짝 못하게 했다. 이쪽에서는 불의 정령이 군밤 장수의 좌판대가 놓인 선술집을 진홍빛 그림으로 보여 주었고, 그 안에서 두 명의 준사관은 허리띠를 의자에 풀어놓고 트럼프 놀이에 열중하면서, 마법사가 그들을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처럼 어둠 속에서 나오게 하여 실제로 그 순간의 모습 그대로 그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어느 걸음 멈춘 행인에게 불러내고 있다는 것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어느 작은 고물상 가게에는 반쯤 탄 촛불이 판화 위로 붉은빛을 비추면서 핏빛으로 물들였고, 그동안 어둠과 싸우던 커다란 램프의 밝은 불빛은 가죽 조각을 검게 태우면서 그 반짝이는 빛으로 단검에다 니엘로 상감을 입혔으며, 또 싸구려 복제화에 불과한 그림들에는 과거의 고색이나 거장의 유약마냥 진기한 도금을 입혀 모조품과 서툰 그림밖에 없는 이 지저분한 가게를 더없이 경이로운 렘브란트의 화폭으로 만들었다. 때로 나는 눈을 들고 덧문이 닫히지 않은 어느 거대한 오래된 집을 바라보았는데, 그 안에서는 수륙 양서의 남녀가 매일 저녁 낮과 다른 원소 속에 사는 데 적응하여, 어둠이 떨어지자마자 램프 불이라는 보고에서 끊임없이 솟아올라 돌과 유리 내벽의 가장자리까지 철철 넘쳐흐를 정도로 방을 가득 채우는 기름진 액체 속을 천천히 헤엄쳐 가면서 그들 몸의 움직임으로 끈적거리는 금빛 소용돌이를 번지게 했다. 나는 다시 가던 길을 계속 갔고 대성당 앞을 지나가는 어두운 골목길에 들어설 때면, 예전에 메제글리즈의 오솔길에서처럼 내 욕망의 힘 때문에 자주 걸음을 멈추곤 했다. 한 여인이 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불쑥 나타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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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루와 그의 친구들을 만나기로 한 호텔에서는 마침 축제가 벌어져 인근 사람들과 외국인들이 많이 모여 있었는데, 꼬챙이에 꿴 닭이 빙빙 돌아가고 돼지고기가 구워지고 아직 살아 있는 바닷가재가 소위 호텔 주인이 '영원한 불길'이라고 일컫는 것 속으로 내던져지는 그런 붉은빛이 감도는 부엌이 들여다보이는 안마당을 내가 지나가는 동안, 새로 도착한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안마당으로 밀려들면서 (뭔가 옛 플랑드르 거장이 그린 「베들레헴 인구 조사」에 어울리는 듯한) 주인이나 주인의 조수에게 식사와 숙박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고 (조수는 상대방의 안색이 충분히 좋지 않다고 생각되면, 되도록 시내의 다른 숙소를 가르쳐 주었다.) 그동안 한 종업원이 버둥거리는 가금의 목을 잡고 지나갔다. 그리고 이곳에 처음 온 날 내 친구가 나를 기다리던 작은 방에 가기에 앞서 건너갔던 큰 식당 또한, 이전 시대의 순박함과 플랑드르풍 과장법으로 그려진 성경의 한 식사 장면을 연상시켰으며, 수많은 생선과 영계, 뇌조와 멧도요, 비둘기가 갖가지 장식으로 꾸며져 김이 무럭무럭 나는 채로 숨을 헐떡이는 종업원들에 의해 운반되고 있었다. 그들은 그 음식들을 더 빨리 나르려고 마루 위를 미끄러져 가면서 거대한 벽에 붙은 탁자에 내려놓아 거기서 음식은 반토막으로 잘렸지만 - 내가 도착했을 때는 식사가 대부분 끝났으므로 - 손도 대지 않은 채 그냥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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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째 되는 저녁, 나는 두 번의 저녁 동안 서로 얘기를 나눌 기회를 갖지 못했던 그의 친구 가운데 한 명과 함께 꽤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으며, 또 그가 나와의 대화에서 느낀 기쁨을 낮은 소리로 생루에게 속삭이는 걸 들었다. 우린 소테른산 백포도주 한 잔을 앞에 놓고 비우지 않은 채 거의 온 저녁을 대화로 보냈으며, 육체적 매력에 근거하지 않을 때 유일하게 신비로워 보이는 이런 남자들끼리의 호감이라는 멋진 베일로 남들로부터 격리되고 보호받았다. 생루가 나에 대해 품고 있는 이런 감정은 발베크에서도 수수께끼 같았는데, 우리 대화의 재미와도 별개이며 모든 물질적 관계에서 벗어난, 그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이런 감정을, 그렇지만 생루는 마치 그 존재를 마음속에서 일종의 플로지스톤이나 가스처럼 느낀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인식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곳에서 단지 하룻저녁에 생겨난 이런 호감에는, 몇 분 사이 작은 방의 열기로 피어난 꽃보다 더 놀라운 데가 있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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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멀리서 펼쳐지는 차가운 깊은 밤, 이따금 들리는 기차 기적 소리가 이곳에 있는 기쁨을 더 생생하게 해 주고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다행히도 이곳 젊은이들이 검을 차고 돌아가야 할 시간이 아직 멀었음을 알려 주는 그런 밤뿐만 아니라, 거의가 게르망트 부인의 추억과 관계된 걱정거리였지만 또한 외적인 걱정거리로부터도, 친구들의 친절이 보태져서 그 깊이가 더해진 생루의 친절함과 작은 식당의 열기, 우리에게 제공된 음식의 섬세한 맛 덕분에, 멀리 떨어져 있는 듯 느꼈다. 이 음식들은 내 식욕과 마찬가지로 내 상상력에도 동일한 기쁨을 주었다. 이따금 음식을 뽑아낸 자연의 작은 조각들이, 소금기 어린 물방울이 몇 방울 남아 있는 꺼칠꺼칠한 굴 껍질 성수반이나, 포도송이가 달린 울퉁불퉁한 줄기와 누런 잎이 붙어 있는 가지가 아직 먹지 않은 음식을 마치 어떤 풍경처럼 멀리서 시적으로 에워싸, 식사하는 도중에도 계속 포도나무 아래서 낮잠을 자거나 바닷가에서 산책하는 듯한 인상을 불러일으켰다. 또 다른 저녁에는 요리사가 단지 음식물을 예술품처럼 자연의 액자 속에 제공하여 음식 본래의 특성을 살리기도 했다. 끓는 물에 익힌 생선이 길쭉한 토기에 담겨 식탁에 나올 때면, 푸르스름한 풀잎 위로 뚜렷이 드러난 생선이, 본래 모습 그대로지만 산 채로 끓는 물에 내던져져 약간은 휜 채로 조개류, 그리고 이와 유사한 극미동물인 게나 새우, 홍합 등에 둘러싸여, 베르나르 팔리시가 만든 도자기 그릇에서 나타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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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루의 레스토랑에 매일 저녁 똑같은 기분으로 간 것은 아니었다. 어떤 추억이나 슬픔은,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다가, 때로는 다시 돌아와 오랫동안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 레스토랑에 가려고 시내를 지나가는 저녁이면, 게르망트 부인이 거의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그리웠다. 마치 내 가슴 한 부분이 능숙한 해부학자의 손에 잘리고 도려내어져 같은 크기의 비물질적인 고뇌로, 사랑과 향수의 등가물로 대체된 느낌이었다. 상처를 꿰맨 자리가 아무리 잘 봉합되었다 해도, 한 존재에 대한 그리움이 이토록 사무쳐 몸속 내장의 자리마저 차지할 때면, 그리움은 내장보다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는 듯 보여 우리는 이 그리움을 지속적으로 느끼고, 더 나아가 우리 몸의 일부인 양 '생각하는데' 이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다만 우리 몸보다는 우리 자신이 조금 더 가치 있어 보인다. 산들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우리 몸은 억눌림에, 또 우수에 한숨짓는다.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이 맑으면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어쩌면 부인도 지금쯤 시골에서 나와 같은 별을 보고 있을지 몰라. 그리고 또 누가 알아.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로베르가 내게 '좋은 소식이 있어. 아주머니가 편지를 보내왔는데 널 보고 싶어 해. 이곳에 온대.' 라고 말할지."
04.
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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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 생루는 내 소식을 알려 주려고 할머니에게 편지를 써 보냈는데, 그 편지에서 동시에르와 파리 사이에 전화가 개통되었으니 할머니께 나와 통화를 해 보라는 제안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간단히 말해 바로 그날로 할머니가 전화로 나를 호출할 테니, 4시 십오 분 전에 우체국에 가 보라고 권유했다. 당시에는 전화가 오늘날처럼 아직 통용되지 않았었다. 그렇지만 습관이란, 우리가 접촉하는 성스러운 힘으로부터 아주 짧은 시간에 그 신비를 제거하는 법이므로, 즉시 통화가 이루어지지 않자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전화가 너무 오래 걸리며 불편하다는 생각뿐이었고, 하마터면 항의까지 할 뻔했다. 지금은 우리 모두가 다 그렇게 생각하지만, 나는 전화로 인한 갑작스러운 변화 속에 아주 짧은 순간이나마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현존하는 이가 우리 옆에 나타나는 그 경이로운 마술이 충분히 빨리 실현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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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호출 소리가 울리자마자 우리 귀만이 열려 있는 여러 환영들로 가득한 어둠 속에서 가느다란 소리, 거리감이 제거된 추상적인 소리가 들리더니 곧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말하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이, 그 목소리가 바로 우리에게 말하며 저기 있다. 그러나 목소리는 얼마나 멀리 있었던가! 얼마나 여러 번 나는 우리 귓전에 그토록 가까이 울리는 목소리를, 마치 긴 여행을 하기 전에는 결코 만날 수 없다는 듯 괴로워하지 않고는 들을 수 없었던가! 가장 달콤한 사이라 할지라도 실망스러운 점이 있으며, 손을 내밀기만 하면 언제라도 사랑하는 이를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에도 사랑하는 이로부터 우리가 얼마나 멀리 있을 수 있는지 나는 어느 때보다 더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토록 가까운 목소리는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실제로 우리 옆에 존재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영원한 이별의 전조이기도 했다! 얼마나 여러 번 멀리서 말하는 이의 얼굴은 보지 못한 채 이렇게 목소리를 들을 때면, 그 목소리는 내게 영원히 다시는 올라오지 못할 심연으로부터 부르짖는 듯했으며, 또 어느 날 목소리만이 (홀로, 또 내가 다시는 결코 보지 못할 몸에 더 이상 붙어 있지 않은 채로) 이렇게 돌아와 영원히 먼지로 변할 입술에 스쳐 가는 말들을 내 귀에 속삭이러 올 때면 나는 얼마나 그 입술에 키스하고 싶었으며, 그때 내 가슴은 얼마나 고뇌로 조이는 듯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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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내 귀에 가까이 댄 이 작은 종 모양 수화기에서 내가 들은 것은, 날마다 우리 애정의 균형을 잡아 주던 그 대립되는 억압적인 힘은 모두 떨쳐 버리면서 내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 놓는, 그 저항할 수 없는 서로에 대한 애정이었다. 할머니가 내게 좀 더 이곳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자, 나는 미칠 듯이 돌아가고 싶은 불안한 욕구에 사로잡혔다. 할머니가 지금 내게 준 자유가, 할머니가 동의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이 자유가,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할머니가 영원히 날 포기할 때도 난 여전히 할머니를 사랑할 것이기에) 내가 가질 자유만큼이나 갑자기 슬프게 느껴졌다. 나는 "할머니, 할머니!" 하고 외쳤으며 할머니에게 키스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옆에는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어쩌면 나를 방문하러 다시 올지도 모르는, 그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유령 같은 존재인 목소리밖에 없었다. "말씀하세요!" 라고 부르짖었지만, 할머니의 목소리는 나를 더욱 혼자 내버려 두더니 갑자기 들리지 않았다. 이제 할머니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고 나와 소통하지도 않았으며, 우리가 서로를 보며 목소리를 듣는 것도 아니어서, 나는 어둠 속을 더듬거리며 할머니를 계속 불러 댔고, 할머니가 나를 부르는 소리 역시 길을 잃고 헤매는 것 같았다. 아주 먼 유년 시절, 어느 날 군중 속에서 할머니를 잃어버렸을 때처럼, 할머니를 영영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할머니가 나를 찾고 있으며 또 내가 할머니를 찾고 있다고 할머니가 혼잣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느꼈던 그런 불안으로 가슴이 떨렸다. 그 불안은 더 이상 대답할 수 없는 이에게, 우리가 지금까지 말하지 못했던 것이나 우리가 불행하지 않다는 확신을 그토록 전하고 싶은 이에게, 내가 그 말을 하는 날 느낄지도 모르는 고뇌와도 흡사했다. 내가 조금 전 망령들 사이로 헤매게 내버려둔 것이 이미 사랑하는 이의 망령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그리하여 나는 홀로 전화기 앞에서 "할머니, 할머니." 하고, 마치 홀로 남은 오르페우스가 죽은 아내의 이름을 되풀이하듯 계속 불러 봤지만 헛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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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루에게 작별 인사를 하지 못한 게 무척 슬펐지만 그래도 그곳을 떠났다. 할머니 곁으로 돌아가는 게 내 유일한 관심사였으니까. 그날까지 이 작은 도시에 있으면서 할머니가 혼자 무엇을 할까 하고 생각할 때면, 나와 함께 있는 할머니 모습은 그려 보면서도 내 모습은 지워 버려, 이런 삭제가 어떤 효과를 자아낼지는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다. 이제 나는 지금것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던, 할머니 목소리에 의해 갑자기 환기된, 나로부터 실제 떨어져 나가 내가 이전에는 결코 알지 못한 어떤 나이에 이르러 체념한 할머니, 지난날 내가 발베크로 떠났을 때 '엄마'가 있으리라고 상상했던 텅 빈 아파트에서 이제 막 내게서 온 편지를 받은 할머니의 유령 같은 존재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되도록 빨리 할머니 품에 안겨야 했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권
게르망트 쪽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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