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대학생이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산속 캠퍼스에서 공부만 하다가 밖으로 나와 갑자기 넓은 세상을 마주한 나는, 내내 방황했고, 조금 불안했고, 가끔 허하고 우울했다. 대학생이 되기 전 난 자존감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스스로에 대한 믿음만큼은 꽤 견고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다. 바닥에서 어두운 감정들이 올라와도 목표 자체에 의심을 품은 적은 없었고, 아마 그 때문에 힘든 순간에도 꿋꿋하게 견딜 수 있었던 걸 거다. 하지만 더 넓은 세상 앞에서 내 마음의 중심은 생각했던 것보다 빈약했다. 스무 살의 나는 세상과 무분별하게 마주쳤고, 부딪쳤고, 그럴 때마다 어디를 바라봐야 할지 모른 채 휘청거렸다.
나라는 사람이 어려워졌다. 다양한 사람들이 내게 끌려서 다가왔는데, 그들이 나에게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는 건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나 또한 다양한 사람들에게 끌림을 느꼈는데, 내 속의 어떤 부분이 어떤 마음으로 그들을 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서서히 사람들이 보는 나와 실제 나 사이의 괴리를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의 난 아직 겉으로 드러나는 내 모습이 더 익숙했고, 속에서 올라오는 솔직한 감정과 생각들은 아무래도 어색하고 불안했다. 그래서 그 가까이로 성큼 다가서지는 못했다. 호기심에 슬쩍 들여다보다가도 뭔가 부끄럽거나 불편해지면 홱 하고 덮어버리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반은 내 의지로, 반은 어쩔 수 없는 흐름에 의해, 조금씩 조금씩 내 마음 안쪽에 다가서고 있었다.
나의 단단했던 겉모습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주 조용히, 비밀스럽게. 우리는 모두 가면을 쓰고 산다. 다른 말로 페르소나. 우리는 세상에서 생존하고 적응하기 위해서 저마다의 가면을 만들고, 가면의 도움을 받아 비교적 안정적인 일상과 인간관계를 구축하게 된다. 일단 주변이 안정되고 나면 우리는 가면에 금이 가는 것을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그 균열이 불러올 일상의 변화와 흔들림을 무서워한다. 그래서 가면 밑 틈새로 올라오는 생각과 감정들을 모르는 척 억눌러버리곤 한다. 나 또한 두려웠다. 그러나 스무 살의 나는 아직 어렸다.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더 강한 나이였다. 나는 겁을 내면서도, 가면 틈새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들에 슬며시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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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년 1학기, 난 아주 열심히 살았다. 새내기라는 새로운 신분에 나름대로 충실한 학교생활이었다.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고, 선배들과 번호를 주고받고, 함께 밥을 먹었고, 가끔 술도 마셔보았다. 각종 동아리에 들어갔고, 응원가를 배웠고, 축제에 참여했다. 놀러 다니기도 했고, MT도 몇 번이나 갔고…. 그러면서 수업도 열심히 들었다. 많은 새로운 사건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종종 설레기도 했고 재밌기도 했다. 그러나 그 생활 속에서 나는 점점 알 수 없는 회의감에 빠져들었다.
학기 말이었다. 난 혼자 버스 안에 있었다. 아, 이게 다 뭐 하는 거지, 갑자기 짜증이 일었다. 무엇에 대한 짜증인지 그땐 몰랐다. 학교에 대한 짜증이었나, 학교 사람들에 대한 짜증이었나, 많은 걸 하고 있지만 실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내 하루하루에 대한 짜증이었나. 마음이 허했다. 혼란스러웠다. 어른들 말대로라면 대학교 1학년은 인생에서 가장 신나고 즐겁고 행복해야 할 시기가 아닌가. 난 겨우 이렇게 살기 위해 그렇게 힘들게 공부해서 대학교에 들어온 건가. 줄곧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아무에게도 진정으로 나를 드러내지 못한 느낌이었고, 내 눈에도 다른 사람들의 진짜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결핍감을 느꼈다. 조금 더 깊고 진솔한 무언가를 원했다. 조금 더 깊고 진솔한 무언가…. 하지만 난 그 무언가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몰랐고, 속에 불평불만만을 품은 채 한참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고민했다. 이대로 전형적인 신입생의 일상을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조금 다른 태도를 취해봐야 하는 걸까.
2학기가 되었다. 나는 무리에 대해 생각했다. 꼭 어떤 무리에 속해 있어야 하는 것일까. 밥을 같이 먹을 사람이 꼭 있어야 하나, 같이 다닐 사람이 꼭 있어야 할까. 소속감에 대한 욕구, 소외감에 대한 두려움, 그것이 현재 나의 약점이며, 나를 구속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무리와 거리를 둘 수 있는 용기, 그들과 달라질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혼자 듣는 강의를 늘렸고, 학교 행사에 참여하는 빈도수를 줄였다. 하지만 그런 뒤로도 방황의 시간은 지속되었다. 내가 그런 사소한 용기를 낸다고 해서 설레는 일이 짜잔 하고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혼자만의 시간이 늘어나긴 했지만, 나는 남들과 다르게 사는 방법을 전혀 알고 있지 않았다. 내 개성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내 취향이 무엇인지도 모호했다. 내 시간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 누구를 만나고 싶은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난 어디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한 채 그저 평범하고 심심한 날들을 보냈다. 아무런 충족감이 느껴지지 않는 나날이 하루하루 지나갈수록, 내가 대학생활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되기도 했다.
언뜻 언뜻, 소심하게 마음이 끌리는 것들은 있었다. 하나는 음악이었다. 난 늘 음악을 좋아했다. 어릴 때 6년 정도 바이올린을 배웠었고, 오케스트라 활동도 했었다. 노래 부르는 것도 즐겼다. 특히 난 고등학교 때 귀로는 음악을 듣고 입으로는 노래를 부르며 머리와 손으로는 수학 문제를 풀고 있는 상태를 좋아했다. 그리고 내겐 늘 무대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뮤지컬이나 콘서트를 보러 갈 때마다 그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이 행복해 보여서 질투심에 가까운 기분을 느끼곤 했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 난 자연스럽게 음악과 관련된 동아리에 끌렸고, 여기저기 발을 담가보았다. 밴드, 아카펠라, 재즈…. 하지만 그때 음악의 세계는 나를 확실하게 끌어당기지 못했고, 나 또한 충분히 깊게 빠져들지 못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내가 음악을 좋아하기만 했을 뿐, 결코 잘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 타고난 음감은 있었고 박자감각도 좋아서 악기를 연주하든 노래를 하든 주변에 폐가 되지 않을 정도로는 했다. 그러나 나한텐 결정적으로 부족한 것이 있었다. 육체적인 표현력과 연습량. 음악은 기본적으로 몸을 가지고 하는 표현인데, 난 내 안의 느낌을 몸에 담아서 전달하는 일에 어려움을 느꼈다. 그러기엔 부끄러움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노래나 연주를 진짜로 잘하려면 고통을 동반한 신체적인 훈련과 연습이 동반되어야 하는데, 나는 늘 고통의 순간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장애물들을 돌파해보고 싶은 오기가 일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그 해 나와 음악은 살짝 스치기만 하고 조용히 멀어졌다.
두 번째는 건축. 2학기 때 학교에서 첫 건축 설계 수업을 듣게 되었다. 솔직히 말해 그때까지 난 건축이라는 분야에 대해 하나도 몰랐다. 나한테 창의력이나 미적 재능이 있다는 생각도 딱히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왜 건축과에 소신 지원했던 걸까. 한 가지 이유는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에 대한 막연한 끌림이었다. 무언가를 내 손으로 만들어보고 싶었고, 그에 대한 공적인 교육을 받아보고 싶었다. 두 번째는 소거법이었다. 고등학교 때 그렇게 고집을 피워 이과를 선택한 이후 이과에 속한 전공 목록을 여러 번 살펴봤는데, 아무리 봐도 그 중 그나마 가고 싶은 과가 건축과밖에 없었다. 의사는 그냥 왠지 되기 싫었고, 순수과학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고, 그렇다면 공대인데, 공대에 속한 학과 중에서 끌리는 게 건축뿐이었던 거다. 그래서 건축과에 지원했고 건축과에 들어왔다. 하지만 내가 이 일을 좋아한다는 확신도, 이 일에 재능이 있다는 확신도 전혀 없는 백지의 상태였다. 아니나 다를까 첫 수업 때 난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작업은 정말 너무 어려웠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만든 사람은 안다. 자기가 만든 것이 진짜 창작물인지 창작물인 척하는 무언가인지. 내가 그때 만든 것은 후자였다. 그때의 난 창작이라는 행위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나 태도를 전혀 갖추고 있지 않았고, 교수님의 가이드에 따라 흉내만 냈을 뿐이었다. 진지하게 고민했다. 난 창작에 재능이 없는 게 아닐까. 공부하고 연구하고 숫자 계산하고 그런 건 자신 있는데, 건축공학을 택해야 하는 건 아닐까.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일’과 ‘잘 해보고 싶은 일’. (우리 학교는 건축공학 전공(Architecture Engineering)과 건축 설계 전공(Architecture Design)을 구분하지 않고 신입생을 뽑은 뒤에, 2학년에 올라가면서 둘 중 세부 전공을 선택하게 되어 있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을 택하는 게 안전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쩐지 디자인 일에 승부욕 같은 것이 일었다. 조금 더 해보고 싶었다. 내 속에 어설프게 굳어져 있었던 무언가가 처음 접한 창작 행위에 의해 이미 조금 헤집힌 상태였다. 난 그 헤집힌 느낌을 왠지 그냥 두고 지나갈 수 없었다. 고민 끝에 나는 건축 설계 전공을 선택했다.
1학년을 마치고 겨울에 한 달 정도 유럽 여행을 가게 되었다. 내가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대학교 4학년이었던 언니가 엄마에게 대학교 졸업하기 전 꼭 유럽여행을 갔다 오고 싶다고 했고, 엄마가 ‘그러면 동생이랑 같이 다녀와라’ 해서 어쩌다 같이 가게 된 것이었다. 다른 건 잘 모르겠는데, 난 여행 운은 확실히 좋은 편이다. 여행이라는 게 나름대로 큰 결심도 필요하고, 돈도 준비해야 하고, 계획도 해야 하고, 이래저래 번거롭고 신경이 많이 쓰이는 일인데, 난 어쩌다가 우연히 누군가가 계획한 여행에 끼어서 따라가게 된 적이 많았다. 아무것도 몰랐던 나를 용케 데리고 다니면서 귀한 경험을 하게 해준 언니에게 지금도 고마워하고 있다. 당시 난 여행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나한텐 대학교가 온 세상이었고, 내 고민과 스트레스는 전부 대학생활과 관련되어 있었다. 학교 밖, 한국 밖의 세상에 대해서는 아직 관심이 없을 때였다. 그러나, 비행기를 타고 로마에 도착한 순간부터 나는 눈이 뒤집혀서 다른 모든 일들을 싹 잊어버렸다.
로마, 피렌체, 베로나, 베네치아, 바르셀로나, 마드리드에 들렀다. 아름다운 것들을 많이 보았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힘이 없어도 힘이 났다. 아름다운 것 앞에서 한껏 하찮고 평범해지는 기분이 좋았다. 그때의 나는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분석하거나 평가할 정도의 지식과 경험이 전혀 없었다. 무지했던 만큼, 난 여행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에 온 몸, 온 마음으로 순수하게 감동할 수 있었다. 모든 기분과 기억을 다 남기고 싶어서 매일 일기를 썼다. 매일 일기 맨 앞부분에는 그 날 갔던 장소를 빠짐없이 다 적어 넣었고, 각 도시의 지도와 각종 티켓들을 소중하게 수집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 센 강변 벤치에 앉아 있었다. 혼자였다. 여행 내내 혼자 있었던 적이 거의 없었는데, 이때 마침 잠시 언니랑 떨어져 있었다. 아마 언니는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나 그랬을 거다. 2월 중순이라 살짝 쌀쌀했다. 강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유롭게 음악을 듣는 사람이 있었고, 조용히 담소를 나누는 친구들이 있었고, 다소 시끄럽게 떠드는 청소년 무리가 있었고, 갈매기들이 깍깍 울고 있었다. 순간 갑자기 그 모든 소리가 너무나 아름답게 겹쳐져서 마음 속으로 들어왔다. 그때 난 어떤 낯선 장소를, 처음으로 제대로 ‘느꼈던’ 것 같다. 행복했다. 꼭 유럽에 다시 와야겠다고 결심한 순간이었다. 그땐 여행 실력을 길러서 혼자서 와야겠다, 혼자 와서 더 많은 것들을 더 내 마음대로 느끼고 싶다, 그렇게 생각했다.
유럽 여행을 계기로 나는 내가 발을 디뎌야 할 자리가 어딘지 저절로 알게 되었던 것 같다. 내 마음 가장 안쪽에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부분이 있었다. 나는 그곳에 터를 잡으면 되겠다고 느꼈다. 학교 생활에 대한 걱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내가 대학생활을 잘하고 있는 건지 자신이 없었고, 온전히 마음을 붙일 사람도 찾지 못했고, 전공으로 선택한 건축 디자인에 재능이 있는지도 확신하지 못했고, 앞으로 내 삶이 어떻게 굴러갈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유럽의 낯선 장소들 앞에서 느꼈던 때묻지 않은 감정들은, 이후 나를 이리저리 흔드는 흐름을 만날 때마다 잠시 몸을 누이고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는 고요한 집 같은 것을 마련해주었다. 나는 그곳에 자리를 잡고 둥지를 틀었다. 아직은 그다지 튼튼하지 못한, 겨우 내 몸 하나 쏙 들어갈 정도의 아주 작은 집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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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학기 때의 회의감을 계기로 사람들과 나 사이에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고, 그러고 나서 뭘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던 중 마침 운 좋게 유럽여행을 떠나게 되었으며, 그 경험을 통해 내 마음 안쪽에 더 깊숙이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소박하게나마 나만의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안정감이 생겼다. 집 안은 평화로웠다. 그 안에서는 갈등도 없었고, 모순도 없었고, 불안과 상처도 없었다. 그곳에서는 그저 혼자 아름다운 것들을 느끼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행복한 결말 같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내 겉모습으로부터 슬며시 떨어져 나와, 내 마음 안쪽에 겨우 막 도착했을 뿐이었다. 겉과 속, 밖과 안은 여전히 멀었고, 달랐고, 그 괴리로 인한 문제들은 숨을 죽인 채 나를 덮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1년의 방황 끝에 안정감을 갖게 된 나는 집 안의 평화로움이 마냥 좋았고, 집 안에만 있고 싶었다. 사람들과 있을 때보다 그 속에 있을 때의 내가 더 좋았다. 나는 집 주위로 나만의 세계를 더욱 단단하게 구축하고 싶어졌고, 그 일에 약간 집착하기 시작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나는 좋은 장소를 찾아다니고, 미술관에 가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2학년이 된 후로 난 건축 디자인에 진정으로 재미를 느끼고 그 일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건축에 대한 나의 애정이 나의 세계를 더 견고하게 만들어주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노력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내 겉모습, 가면을 깨고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여행을 하기 전, 건축을 좋아하게 되기 전, 원래 내가 갖고 있던 겉모습으로부터 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여태껏 날 바닥에서 구해주고 세상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준 가면에 금이 가는 것이 난 두려웠고, 그 두려움은 창작을 계속 해나가는 데 있어 큰 장애물이 되었으며, 결국 일에 대한 나의 순수한 열정을 멈춰 세우게 된다. 다음 두 챕터에서는 그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겉과 속의 문제. 겉과 속이 완전히 똑같은 사람이 어디에도 없다. 사람은 누구나 본인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여러 개의 겹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렇기에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속에 품은 것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 자체는 당연한 것이다. 이상한 것도 아니고 큰 문제도 아니다. 진짜 문제는, 나의 겉도 나의 속도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 난 이런 외면을 갖길 바란 적도 없고, 이런 내면을 타고나길 원한 적도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은 명백히 내 것이고 내 몫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겉과 속이 어떤 모양으로 생겨먹었는지 이해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바치는 일도, 그것들을 짊어지고 복잡한 현실을 살아내는 일도, 오로지 나에게 주어진 과제다. 문제집 하나가 던져진 것이다. 아무도 대신 풀어주지 않는다. 문제집이 저마다 다르니 옆 사람의 답을 베끼는 건 아무 소용이 없고, 답지를 힐끗 들춰보는 일도 삶에서는 허락되지 않는다.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은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인가. 친구에게는 어떤 사람이고, 가족에게는 어떤 사람이며,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사람인가.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가장 바깥에 있는 당신의 얼굴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으며, 가장 안쪽에 있는 당신의 마음은 어떤 감정에 물들어 있는가. 그 괴리를 인식하는 순간부터, 당신은 당신 자신을 향해 무수한 질문들을 쏟아내게 될지 모른다. 나 또한 그 질문들에 천천히 다가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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