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림, 설렘, 기쁨, 즐거움, 그리고 몰입. 인생에서 의미 있는 것을 만났을 때, 우리가 느끼게 되는 좋은 기분들이다. 우리는 이 좋은 기분들이 만들어내는 차마 거부할 수 없는 흐름에 이끌려, 어쩌면 다시는 벗어날 수 없는 관계 속으로 자신을 내맡겨버리게 된다. 그러나 어떤 대상에 계산 없이 마음을 쏟을 수 있는 시간은 늘 한정되어 있다. 순수한 열정의 유효 기간. 유효 기간이 끝나갈 때쯤 삶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내가 여기까지 대신 해줬으니, 지금부턴 네 힘으로 해나가야 해, 자, 이제 어떻게 하고 싶니, 너에게 저것은 무엇이니, 앞으로 저것과 너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니. 그 동안 단순해 보였던 삶은 그때부터 믿을 수 없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3학년이 된 나는 갑자기 수많은 질문들에 휩싸이게 되었다. 많은 선배들은 집에 돈이 많거나 부자 인맥이 있는 사람만이 한국에서 건축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아직 건축을 직업으로서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나는 불안해졌다. 내가 설계를 잘하고 못하는 것과 관계 없이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적인 장벽을 마주치게 된다면, 그때 난 어떻게 하지, 차선책을 마련해놓아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런 와중에 3학년 수업들은 1, 2학년 때와 달리 건축가로서의 진지한 직업정신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도시적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환경을 고려해야 한다, 안전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매 수업마다 각각의 교수님들께서는 자신이 가장 중시하는 가치를 강하게 피력하셨다. 나는 머리가 아파왔다. 모두 다 중요해 보였지만, 개인이 그걸 다 고려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건축이라는 일이 실제로 엄청나게 어렵고, 그만큼 책임 또한 무거운 것이 건축가라는 직업이라는 게 실감났다. 현실적인 제약. 나라는 사람의 역량, 나는 직업적인 건축가가 될 수 있는 걸까, 고민에 빠졌다.
앞으로의 진로에 대한 고민은 ‘건축가는 대체 어떤 직업인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졌고, 이는 곧 ‘건축이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로 연결됐다. 무엇이 좋은 건축일까, 좋은 건축가란 무엇일까,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게 진짜 건축이 맞는 걸까, 건축이 대체 뭐지,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됐다. 그런 상태에 놓여 있었으니 디자인에 집중이 잘 될 리가 없었다. 세 번째 설계수업은 좀처럼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뭔가를 만들려고 할 때마다 자꾸 생각이 비집고 들어와 방해했다. 2학년 때 ‘착실한 과정 – 그에 따른 좋은 평가’가 가져다 준 기쁨을 경험한 이후였기에, 과정이 삐끗 거리고 진도가 늦춰질 때마다 마음이 불안해졌다. 프로젝트가 망할까 봐 걱정됐다. 이번 프로젝트가 망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결과가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난 후회하게 될까, 스스로를 다그치게 될까, 못했다는 평가를 들으면 나는 어떤 기분에 빠지게 될까. 과연 그때도 나는 전과 같은 마음으로 이 일을 계속 좋아할 수 있을까? 무서웠다.
그 학기에 나는 나를 엄청나게 혹사시켰다. 설계 과제를 하느라 몇 일이나 밤을 새웠다. 전처럼 즐거운 기분이 아니라, 갑갑하고 조급한 기분 속에서. 그때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나를 힘들게 몰아붙였다. 이게 말이 되는가 싶지만, 진짜로 그랬다. 그때 내가 지키고자 하는 ‘나’는 누구였고, 혹사당한 ‘나’는 누구였을까. 그리고 나는 대체 무엇으로부터 나를 지키고자 했던 걸까. 수많은 것들이 나를 찾아와 흔들어대던 그 시기에, 그 중에서도 가장 두려웠던 것, 내가 진정으로 무서워하고 있었던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건축과 나로만 이루어진 세상은 더 이상 행복하고 평화롭지 않았다. 이쪽 저쪽에서 벽을 두드렸고, 그 두드림에 금이 가려고 하고 있었다. 속은 시끄러워졌다. 이 목소리 저 목소리가 나타나 서로 싸워댔는데, 그 중 어느 것이 내 목소리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나라는 사람이 조각 조각으로 쪼개지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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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년이 되었다. 학교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동기 남자애들은 거의 다 군대에 갔고, 대신에 복학생, 편입생들과 같은 학년이 되었다. 고학년이 된 사람들은 졸업 후 미래에 대한 걱정이 많아진 모양이었다. 전보다 학점을 열심히 챙기기 시작했고, 이런 저런 대외활동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다. 수업의 수준은 높아졌고, 과제는 많아짐과 동시에 어려워졌다. 다소 어수선해진 분위기 속에서 주어지는 일을 하나 하나 해내는 것만으로도 꽤나 바쁘고 피곤한 날들이 이어졌다. 나는 그때 건축에 대해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시점에 있었다. 내가 건축을 좋아하고 그 일과 어느 정도 잘 맞는다는 것도 알았으니, 건축에 대해서도 나에 대해서도 좀 더 제대로 알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이 건축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했고, 내가 하는 디자인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도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진지하고 깊은 대화를 나누기에는, 나도 사람들도 너무 분주하고 정신이 없었다.
역사에 자연스럽게 마음이 끌렸다. 모두들 앞만 바라보면서 닥친 일을 해치우는데 급급한 분위기 속에서, 역사 수업은 내게 조용히 대화를 청해왔다. 역사는 미래에 대한 생각을 잠시 멈추고 과거를 살펴보라고 말해왔다. 그리고 그 과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지금의 나를 조금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라고 했다. 역사 수업을 듣고 있으면 주변으로 산만하게 흩어지던 에너지가 나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커리큘럼 상 그 학기에 동양건축사 수업을 수강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하고 싶어 지난 해에 들었던 서양건축사 수업을 다시 청강하기로 했다. 불어난 과제량으로 시간과 체력이 딸리는 상황에서도 나는 학점에 들어가지도 않는 서양건축사 수업에 꾸역꾸역 출석했다. 내가 이해한 바로, 동양건축사 수업의 요지는 이러했다. 우리는 한국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서구에서 수입된 교육 체계를 통해서 건축을 배우고 있고, 그 결과 우리 문화의 맥락과 동떨어진 가치관을 저도 모르게 따라가고 있으며, 우리는 한국의 건축과 학생으로서 적어도 이 상황을 명확히 인지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수업에서 나는 동양의 전통 건축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과 그에 내재되어 있는 철학과 가치에 대해서 배웠는데, 교수님 말대로 그건 나에게 아주 낯설었다. 한 번에 와 닿지 않았다. 반면 유럽 건축에 대해 배우는 서양건축사 수업이 비교적 더 편안하게 다가왔다. 그 아름다움에 저절로 공감이 됐고, 그에 담긴 철학도 동양의 것에 비해 이해하기 쉬웠다. 나는 동양건축사 교수님이 던지는 메시지에 분명히 마음이 동했다. 그러나 기존에 갖고 있던 내 미적 감각과 사고 방식은 서양의 것을 더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나는 한국 사람인데, 뭐가 어떻게 된 걸까, 이 모순적인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처음으로 내가 나고 자란 한국이라는 나라와 그 나라에 살면서 무비판적으로 흡수해 온 교육 시스템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한국 건축의 정체성 문제, 나아가 한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 문제에 슬며시 다가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건축을 좋아하는 마음은 꾸준하게 지속되고 있었다. 세 번째 설계 수업을 듣게 되었다. 이번 주제는 경복궁 동쪽에 작은 갤러리를 짓는 것이었다. 난 지난 학기에 다짐한 대로,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나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을 통해 좀 더 깊고 풍부한 메지지를 담아내고 싶었다. 주어진 땅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이해하고 싶었고, 갤러리라는 쓰임새에 대해서도 내 나름대로의 재해석을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중간에 생각지 못한 장애물을 만났다. 지금껏 디자인을 해온 방식 자체에 처음으로 문제를 지적당했던 것이다. 학기 초반, 몇 번의 과제를 거친 후 교수님께서 1대1 크리틱 때 나에 대해 파악한 바에 대해 말해주셨다.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아는 게 많은 것 같다, 분석을 잘하고, 분석한 내용을 정리해서 표현하는 것도 잘한다, 이는 좋은 능력이다, 하지만 이번 학기에는 그런 면을 깼으면 좋겠다, 많이 아는 게 꼭 좋은 것은 아니다.’ 내가 지금까지 해온 방식이 잘못됐다는 말씀은 아니었다. 하지만 뭔가 중요한 허점이 있고, 그 허점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더 정교해져서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그 이후로 교수님께서는 내가 뭔가를 구상해 갈 때마다, 너무 미리 다 생각해버린 것 같다, 너무 급하게 건물을 완성시키려고 하고 있다며 이전 단계로 돌아가라고 하셨다. 생각하고 나서 만들지 말고 만들면서 생각하라고, 좀 더 거칠고, 정리가 되지 않은, 날것의 무언가를 가져왔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나는 그게 너무 어려웠다. 이전까지 난 유치하거나 설익은 아이디어는 그림으로 그리거나 손으로 만들기 전에 생각으로 먼저 다듬거나 폐기했고, 머릿속에서 어느 정도 정리된 후에야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었다. 그게 나한테는 그냥 당연했다.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던 부분에 문제제기가 들어오자 나라는 사람 자체가 문제처럼 느껴졌다. 생각 없이 손을 움직이는 게 나는 왜 이렇게 어려운 거지, 하고 당황스러웠다. 내가 만드는 행위 그 자체에 집중을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생각을 안 하고 손만 움직이고 있으면 뭔가 답답했다. 손이 모형을 만드는 동안 머리는 딴생각을 하다가 다른 더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마음이 그 새로운 아이디어 쪽으로 기울어버리면 만드는 걸 멈추고 싶어졌다. 머리는 너무 빨랐고, 그에 비해 손은 너무 느렸다. 난 계속해서 머리로만 앞서가는 결과물을 가져갔고, 그러면 교수님은 제동을 걸고 다시 처음 단계로 돌아가라고 하셨다. 그게 몇 차례 반복되면서 진도가 늦어졌다. 불안해졌다. 이전 학기 같았으면 디테일을 고민하고 있었을 시기에, 전체적인 방향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스트레스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4월, 5월, 시간이 흘렀다. 난 조금씩 지치기 시작했다. 학기 중후반이 되자, 뭔가 전체적으로 상황이 꼬여버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설계 수업, 역사 수업, 그 외 다른 수업과 과제들, 그리고 커리큘럼 외 활동까지, 분명히 엄청 많은 걸 하고 있는데, 뭐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건지 가늠이 안 됐다. 내 뜻대로 굴러가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고민들은 계속 가지를 뻗어나가기만 할 뿐 정리될 기미가 없었고, 설계는 진도가 안 나갔고, 해야 할 일은 줄어들 줄을 몰랐고, 체력은 점점 바닥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쉬지 않고 나를 계속 일으켜 세웠다.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이대로 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신경이 곤두세워졌다. 학기가 끝나기 2주 전쯤 헤매고 헤맨 끝에 드디어 교수님도 나도 납득할 만한 프로젝트의 전체 컨셉을 겨우 정할 수 있었다. 남은 2주 동안에 건물 디자인을 시작해서 완성까지 해내야 했다. 그 2주 동안 난 대학생이 된 이후로 가장 예민했다. 그 예민함이 주변 사람에게 튈까 봐 모든 친구와 연락을 끊고 혼자 일에만 몰두했다. 난 어떻게든 있는 힘을 쥐어짜내서 건물을 디자인하고, 모형을 만들고,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드는 것까지 해냈다. 마감 기한은 어찌어찌 맞췄다. 최종 프레젠테이션을 마쳤다. 시간이 부족했던 만큼 마지막 결과물에는 아쉬운 점이 많았다. 주변의 평가 또한 그저 그랬다. 하지만 모든 게 마무리되고 나서, 나는 결과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중요한 건 나였다. 막상 끝나고 나니 막판에 왜 내가 그렇게까지 스트레스를 받았던 건지, 스스로 잘 이해가 안 됐다. 나 자신을 너무 괴롭혔고, 지나치게 예민해졌고, 무엇보다 그 때문에 과정이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설계 프로젝트를 끝내고 이토록 기분이 헛헛하고 허무한 건 처음이었다. 마지막에 교수님께서는 나에게 본인이 생각하는 기준의 완성도를 이뤄야 한다는 생각이 강한 것 같다고, 그게 내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조급해지는 면이 있고 그럴수록 속도를 늦출 필요가 있다고. 나는 그 말씀에 동의했다. 나 또한 다시 그런 스트레스에 갇히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극복해야 할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문제를 마주하는 일이 결코 간단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았다. 뭐랄까, 덩어리가 커 보였다. 아주 많은 다른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혀서 딸려올 거란 느낌이 들었다. 그때 난 그 문제들을 하나 하나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부딪친 장벽이 뭔가 엄청나고 거대한 무언가라는 사실은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에게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두려움이 건축을 순수하게 즐기던 마음을 앗아가 버렸다는 것도. 그때까지 난 결과에 있어서 스스로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과정이 힘든 적은 많았지만 늘 결국엔 내가 처음에 목표했던 결과물을 내놓았다. 이번엔 그렇게 하지 못할까 봐, 실망스러운 결과물을 내놓게 될까 봐, 그래서 나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잃을까 봐 난 두려웠던 것이다. 지난 해 두 번의 프로젝트가 비교적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칭찬도 받은 탓에, 괜한 자존심이 생겨 있었던 점도 있었다. 적어도 저번처럼은 해야 한다, 그런 압박 같은 게 있었던 것이다. 이번 학기에 좋은 결과물을 내지 못한 게 되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또 좋은 평을 받았다면 자존심이 자만심이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점차 받아들였다. 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강한 사람이 아니구나. 그리고 내가 그렇다는 걸 인정할 만큼 겸손하지도 못했구나. 욕심을 버리고 초심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에 대해 좀 더 객관적으로 알아야 했다. 가진 것 쌓은 것 이룬 것 하나 없는 평범한 아이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학기가 끝난 후, 모형 사진을 찍으러 혼자 설계실로 걸어가던 중이었다. 학기 내내 나를 조였던 긴장감이 서서히 풀어지고 있었다. 걸으면서 그냥 떠오르는 대로 이런 저런 생각들을 했다. 그러다 문득, 제대로 된 생각을 하는 게, 나 자신과 대화를 하는 게, 너무나 오랜만이라고 느꼈다. 최근 몇 주 동안 잠시 생각에 잠길 정도의 여유조차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나에게 여유를 주고 싶었다. 마음껏 생각하고, 충분히 고민하고, 나 자신과 지겨워질 때까지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 마침 나에겐 1년의 공백기가 마련되어 있었다. 우선 다음 학기에는 한국을 잠시 떠날 계획이었다. 첫 유럽여행 때 유럽에 꼭 혼자 다시 오겠다 결심한 뒤에 틈틈이 교환학생 준비를 했고, 그 결과 3학년 2학기에 이탈리아에 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바로 학교로 돌아오면 커리큘럼이 꼬이기 때문에 그 다음 한 학기는 휴학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 1년 동안 디자인은 하지 않을 것이었다. 난 공부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공부를 해야 하는 타이밍이 온 것 같다고. 시험을 치기 위해 하는 공부 말고, 진짜 공부. 여행도 공부가 될 것이었고, 책도 공부가 될 것이었고, 혼자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리는 시간도 다 공부가 될 것이었다. 나는 아직 나약하고 어렸다. 그 학기에 내 앞에 나타난 각종 어려움 앞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이를 악 물고 그저 넘어지지만 않게 버텨내는 것 정도였다. 더 강해지고 단단해지기 위해서는 기초가 필요했다.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튼튼한 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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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나를 찾아왔던 여러 가지 문제들. 미래를 불안해하는 주변 친구들, 한국 건축의 정체성 문제, 손보다 머리가 빨리 움직여버리는 디자인 방식의 문제, 정해진 시간에 맞춰 어느 정도 이상의 완성도에 도달해야 한다는 집착, 여태껏 내가 쌓아온 것에 대한 자존심과 그것이 무너져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 여유 시간의 부족, 그리고 부실한 기초. 그땐 이게 다 별개의 문제 같아 보였지만, 어쩌면 하나의 커다란 문제가 각기 다른 얼굴로 내 앞에 나타났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 시기에 마주쳤던 어려움을 계기로, 그 동안 내가 삶을 살아왔던 방식 자체가 통째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주 조용하게, 조금씩.
그것은 가면의 문제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까지, 나는 지금까지 학교라는 집단과 한 번도 쉬지 않고 관계를 맺어왔고, 각각의 집단에 성공적으로 적응하면서도 내게 중요한 가치를 지켜내려는 과정에서 나만의 사회적인 가면을 만들어왔다. 사람들을 대할 때면 그 가면을 썼고, 가면을 쓰고 지내는 내 모습을 바탕으로 사람들 속에서의 내 사회적 이미지가 구축되었다. 학기 말에 나에게 ‘이번에도 너는 실패하면 안 돼. 빈틈 없이, 실수하지 말고, 넘어지지도 말고,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네가 목표했던 바에 반드시 도달해야만 해.’ 이렇게 다그쳤던 목소리. 그건 그 가면을 지켜내려는 나였다. 가면은 그 동안 나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 줬다.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게 해줬고, 좋은 학교에 진학하도록 해주었고, 여러 가지 업적과 주변 사람들의 인정도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그 가면과 내가 사이 좋게 지내던 시기는 지나간 것이었다. 이제 그 가면은 나를 괴롭히고 있었고, 나는 반항을 시작해야 했다. 물론 가면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것을 의식하는 사람과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뉠 뿐, 사회적인 가면은 누구나 갖고 있다. 그 또한 나의 소중한 일부다. 다만 나는 그걸로는 부족했던 것이다. 나는 또 다른 나를 필요로 했다. 원래 쓰던 가면은 내가 유럽여행과 건축을 계기로 새로이 갖게 된 소중한 세상을 어지럽히고 훼손하려 했다. 나는 그것을 잠시라도 나로부터 떼어내야 했다. 그리고 그 소중한 세상을 보호하고 지켜낼 수 있는 또 다른 나를, 꼭 키워내야만 했다.
계속 학교와 가까이 있으면 원래의 가면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터였다. 학교와 멀어지고 싶었다. 불안한 사람들로부터, 뭔가를 일방적으로 주입하면서 숨돌릴 틈을 주지 않는 학교의 교육시스템으로부터, 그리고 지금껏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높은 기준을 요구하며 살아온 ‘학생으로서의 나’ 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학교와 나를 서로 떨어뜨리고, 나와 건축의 관계만 남기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 난 2학년 때 건축을 좋아했던 그 순수한 마음을 유지하고 지켜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을 품은 채, 나는 혼자 유럽으로 떠났다. 나에게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곳. 크고 작은 아름다운 것들에 매일같이 감동했던 곳. 난 그때 얼핏 발견한 그 부드럽고 말랑한 마음을 손에 쥐고 이제껏 나만의 세상을 만들고 키워올 수 있었던 것이었다. 바로 그 유럽이었다.
좋아하던 것과의 관계가 잘 흘러가다가 예상치 못한 장벽에 부딪쳤을 때, 그래서 이제 순진하게 마냥 웃고 떠들 수는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그래서 더 이상 그것이 무조건적으로 사랑스럽지 않게 되었을 때, 우리는 새로운 위험 앞에 놓이게 된다. 상실의 위험이다. 우리는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관계를 손에서 놓거나, 아니면 어떻게든 그것을 상실하지 않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거나. 어느 쪽이 더 현명한 선택인지 그건 상황마다 다르지만, 나의 한계를 인정하든, 대책을 마련하든, 그것은 나라는 사람에 대해 더욱 적나라하게 알게 되는 계기가 된다. 나는 그때 후자를 택했다.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일에 대한 열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이전의 나로부터 탈피하여 새로운 삶의 방식을 구축하려 했다. 나는 내가 또 다른 성장을 위한 여정을 시작한 것이라 믿었고, 한국을 떠나 혼자가 되면 나에게 꼭 맞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당연히 찾아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나를 찾아 떠난 그 5개월 간의 유럽 생활은, 다른 한 편으로 나 자신으로부터의 도망이기도 했다.
당신은 그런 적이 있는가. 당신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나머지 세상을 있는 힘껏 바깥으로 밀어내본 경험. 당신이 쓸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죄다 동원해서 사람들로부터 도망쳐본 경험. 혹시 당신이 쫓아낸 그 나머지 세상에, 또다른 소중한 것이 포함되어 있지는 않았는가. 소중한 한 가지에 집착하느라고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또다른 소중한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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