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마음을 품어본 적이 있는가. ‘나를 찾고 싶다.’ ‘나다워지고 싶다.’ ‘진짜 나에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다.’
혹은 이런 생각.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고 싶다.’ ‘예전의 나로부터 해방되고 싶다.’ ‘그 동안 나를 가두고 있던 그것, 날 끊임없이 괴롭히던 그것과 영원히 작별하고 싶다.’
어쩌면 여행이라는 행위의 본질이 아닐까. 이전의 나와 헤어지고 싶다는 생각. 진정한 나를 만나고 싶다는 욕구. 현재의 불만족스러움에서 벗어나 새로운 행복을 스스로 발견해내고 싶은 마음. 그래서 여행은 모험이면서 동시에 도망이다. 여행에는 용기와 의지가 필요하다. 낯선 장소에서 자신만을 위한 무언가를 찾아내려면. 그러나 그런 동시에 여행자는 속으로 두려워한다. 자기가 원래 살던 세상에 버려두고 도망쳐 온 것을 여행지에서 돌연 다시 만나버릴까 봐.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방식의 여행이 얼마든지 더 있을 것이므로 모든 여행이 그렇다 일반화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어쨌든 내 5개월 동안의 교환학생 생활은 그랬다. 스물 두 살의 난, 한 편으로 용감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두려움으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그런 종류의 여행자였다.
계획했던 그대로 흘러가는 여행 같은 것은 세상에 없다. 예상치 못한 흐름이 끼어들지 않을 수는 없다. 여행이란 건 삶과 비슷해서, 통제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뜻대로 안 된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여행에게 삶보다 더 나을 것을 요구한다. 삶이 내가 생각한 대로 굴러가지 않을수록 여행에 거는 기대는 더욱 커져만 간다. 여행에서라도 내가 원했던 삶이 펼쳐져야 하지 않겠어, 하고 싫은 것을 배제하고 이상적인 상황을 연출해내기 위해 애를 쓴다. 돈, 시간, 노력을 아낌없이 바쳐가면서. 나 또한 그랬다. 유럽에 사는 5개월 동안 나는 좋아하는 일만 하고, 좋아하는 것만 보고, 좋아하는 사람만 만나고 싶었다. 금전적으로 조금 무리해서라도 이 5개월만큼은 그렇게 지내고 싶었다. 내가 내 생활을 다소 인위적으로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무언가를 외면하고 있다는 것, 무언가로부터 도피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난 그때 그래야만 했다. 소위 ‘나를 찾기’ 위해서. 내가 삶에서 무엇을 원하는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는,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만 살았을 때 어떻게 되는지 한 번 시도해봐야 했다. 게다가 그것은 생애 한 번뿐 없는 기회였다. 먹고 사는 문제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대학생이라는 신분으로 장기간에 걸쳐 가족과 학교를 벗어나 타지에서 내가 원하는 삶을 시도해볼 수 있는 이런 기회는, 아마 두 번 다시 주어지지 않을 터였다. 한 번 주어진 것도 행운이었다. 나는 이 행운을 허무하게 낭비하지 위해서 5개월 간의 삶을 고집스럽게 내가 원하는 바대로 끌고 나갔다. 원치 않는 것들로부터 열심히 도망 다니면서.
나름대로 합당한 명분이 있는 도망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5개월의 시간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대학 생활 전체의 방향을 바꾼 거대한 전환점이었다. 난 이 여행으로부터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보물 하나를 얻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 나는 그것을 얻어오는 대신, 그 대가로 내가 갖고 있었던 무언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그러고 나서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내가 원래 세상에 내버려두고 도망쳤던 것이 가만히 다시 나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자신을 두고 갔던 것이 야속했는지, 약간 분노에 차 있었다. 한국에 두고 갔던 것, 유럽에서 가져온 것, 그리고 그 대가로 유럽에 두고 온 것, 그건 다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 뒤에 다시 시작된 한국에서의 삶은, 이전과 어떻게 달라졌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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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마지막 날, 한 학기 동안 살게 될 이탈리아 토리노에 도착했다. 내가 다니게 될 학교는 토리노에 있는 작은 경영대학으로, 건물이 단층 짜리 건물 하나뿐이라 대학교가 아니라 학원 같은 느낌이 났다. 교환학생은 약 80명 정도의 미국인과 2명의 한국인이 전부였다. 2명 중 한 명이 나였고, 나머지 한 명은 나와 같은 대학 의류학과에 다니는 언니였다. 학교에서는 나와 언니를 룸메이트로 배정해주었고, 우리는 학교와 걸어서 5분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5층짜리 아파트에 세를 들어 살게 되었다. 매달 말 집주인 아주머니께서 집에 방문하시면 현금으로 직접 월세를 내는 신기한 방식이었다. 집은 현관과 화장실, 거실 겸 부엌, 같이 쓰는 침실로 이루어져 있었고, 거실 겸 부엌에는 작은 발코니가 딸려 있었다. 둘이 살기에 꽤 넓직했다.
나는 총 4개의 수업을 듣기로 했다. 현대 건축(Modern Architecture), 현대 디자인사(History of Modern Design), 이탈리아 문화(Italian Cultre), 그리고 이탈리아어 (Italian Language I). 이 중 이탈리아어는 학기 초반에 집중적으로 배우고 10월 중순에 종강하는 일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10월 중순까지는 월, 수, 목 3일, 그 이후부터는 수요일과 목요일에만 학교에 가면 되었다. 설계 수업도 수업 목록에 있었으나 듣지 않기로 했다. 직접 디자인을 하는 일은 당분간 멀리하고 싶었다. 널널한 시간표가 마음에 들었다. 어차피 초과학기를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수업에 무게를 싣고 싶지 않았다. 대신 나는 여행을 최대한 많이 하고 싶었고, 여행하지 않는 시간에는 혼자만의 시간을 실컷 즐기고 싶었다.
초반에 여러 가지 생각지 못한 난관들이 있었다. 첫째, 인터넷이 잘 안 됐다. 랜선과 공유기를 갖고 오긴 했는데, 집을 아무리 뒤져도 랜선 꽂는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룸메이트 언니와 함께 여기저기 알아본 뒤 통신사에서 유심칩을 넣어 쓰는 공유기를 개통해왔는데, 한 달에 쓸 수 있는 데이터량이 20기가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 20기가를 언니와 나눠 써야 했으므로, 카톡이랑 간단한 검색 정도는 할 수 있었지만 동영상 보기는 자제해야 했고 영화 다운로드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나와 언니는 영상을 보고 싶거나 보이스톡을 하고 싶을 때면 와이파이를 쓰러 근처 쇼핑몰에 가곤 했다. 시간은 넘쳐나는데 인터넷이 안 되니 집에서 뭘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지 막막하고 당황스러웠다. 한국에 있을 때 얼마나 인터넷에 의존하면서 살아왔는지 처절하게 실감한 시간이었다. 둘째, 돈 스트레스. 난 그때까지 엄마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받아왔고 혼자 자취해본 적도 없었다. 낭비나 사치를 한 적은 없었지만 비교적 부담 없이 돈을 써온 편이었다. 그래서 나한테 들어가는 모든 생활비를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계산하고 관리해본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다. 게다가 교환학생 생활은 내가 방향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결과적으로 쓰게 될 돈의 액수가 크게 차이가 날 것이었다. 마음의 부담이 컸다. 어디에 돈을 쓰고 어디에 돈을 아낄지 하나 하나 따지는 게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내가 그동안 경제관념이 너무 없었구나, 절실하게 깨닫고 반성했던 계기였다. 셋째는 요리. 이탈리아는 외식 비용은 한국보다 훨씬 비싼데 식재료는 저렴해서, 해먹는 것과 사먹는 것의 비용 차이가 굉장히 컸다. 여행을 원하는 만큼 하려면 생활비를 최대한 절약해야 했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직접 장을 봐서 해먹어야 했다. 근데 그때 내가 요리를 거의 하나도 할 줄 몰랐던 것이다. 룸메이트 언니가 하는 거 보고 따라 하거나 인터넷 레시피를 찾아보면서 어찌어찌 하긴 했는데, 맛있는 걸 만들어내는 건 어려웠다. 스스로에게 맛있는 밥 한 끼도 제대로 해 먹이지 못하다니, 내가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지막은, 외로움이었다. 한국에서 종종 느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외로움. 나에 대해 아는 사람,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 날 사랑해주는 사람이 정말 한 명도 없는 것으로 인한 외로움이었다. 나만의 시간을 충분히 마련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초반에 새로운 사람을 사귀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한참을 고민하고 흔들렸다. 기댈 사람 없이 5개월의 시간을 살아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졌던 것이다. 그동안 내가 나름 독립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꽤나 의존적이고 연약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모든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나는 이곳에 온 이유를 잊지 않으려고 애썼다. 나는 이곳에 나를 위한 공부를 하러 온 것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내가 여러 가지 면에서 모자라고 연약하다 하더라도, 그러기 위해서는 용기를 내어 혼자가 되어야 했다. 아무에게도 기대지 않고, 혼자가 되어 여행을 하고 책을 읽어야 했다. 첫 유럽 여행 때 혼자 파리 센 강변에 앉아 처음으로 장소를 오롯하게 느꼈던 그 순간 때문에, 그리고 이후에 피어난 건축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주변의 여러 가지 것들로부터 지켜내고 싶은 마음 때문에, 지금 이렇게 유럽에 와 있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감정적으로 기댈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쓸 수는 없었다. 나는 내 안의 의존적이고 나약한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주변 사람들과 감정적으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는 게 지금의 내가 진짜로 원하는 바라고 생각했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앞으로 하게 될 여행을 신중하게 하나 하나 계획해나갔다. 첫 여행지는, 밀라노에서 오랜 기간 유학생활을 하셨던 서양건축사 교수님께서 추천해주신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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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1 - 2015.09.13
밀라노, 파비아
밀라노 중앙역에 도착하니 한국인 교환학생이라는 신분을 벗고 다시 여행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숨을 크게 쉬었다. 시원했다. 이 짧은 여행의 목적지는 교수님께서 추천해주신 파비아의 한 수도원(Certosa di Pavia), 그리고 2015 밀라노 엑스포였다. 밀라노와 파비아의 다른 곳들도 시간 되는대로 여유롭게 둘러볼 생각이었다. 첫날 오후, 딱히 갈 곳이 생각나지 않아 두오모 성당 근처로 갔다. 성당 앞 광장에 모여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는 수많은 관광객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사람들은 밀라노 두오모에 어쩌다가 오게 된 걸까, 웃고 있다. 행복해서 웃는 걸까, 여행이란 게 뭘까, 여행은 행복해지려고 하는 걸까, 잘 모르겠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여행을 해나가야 하는 걸까, 생각이 많아진 것 같다고, 예전처럼 여행에 단순하게 몰입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비교적 한적한 레푸블리카 광장으로 가서 좀 걸은 뒤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셨다. 다시 머리가 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기차를 타고 밀라노 옆 소도시 파비아로 향했다. 낮에 도시 구경을 먼저 하고 오후에 수도원에 갈 계획이었다. 파비아에 도착할 때쯤 구름이 걷히고 날이 좋아졌다. 신이 나기 시작했다. 파비아는 작지만 아기자기하고 따뜻한 동네였다. 도시가 작아서 지도로 길을 찾지 않아도 감으로 대충 걷다 보면 교회가 나오고, 공원이 나오고, 광장이 나왔다. 처음에 만난 교회와 그 옆에 붙은 수도원이 정말 아담하고 예뻤다. 포근한 분위기였다. 이후 이곳 저곳을 구경하면서 걸어 다니다 보니 커다란 강이 나왔다. 쨍쨍한 햇빛 아래에서 한참 동안 강가를 산책했다. 강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내내, 바로 전날 밀라노 두오모 앞에서 했던 생각이 무색하게, 마냥 행복하다 느꼈다. 파비아라는 도시에는 뭐랄까, 때묻지 않은 순수함 같은 게 있었다. 이곳을 알게 되어 진심으로 기쁘다고 생각했다.
파비아 역에서 기차를 타고 한 정거장 이동했다. 파비아 수도원 역이었다. 여긴 시골인 듯했다. 인적이 드물고, 건물도 듬성듬성 있고, 그 외 주변은 온통 나무와 풀밭 천지였다. 저 멀리에 담장 너머로 교회 꼭대기가 보였다. 수도원 안으로 들어가려면 넓은 풀밭을 가로질러 담장을 따라 꽤 긴 거리를 걸어가야 했다. 가는 길에는 괴상하게 생긴 나무들이 많아, 무슨 마녀의 성에 들어가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즐거웠다. 자유롭다 느꼈다. 그러던 중에 어느 순간 갑자기,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가슴 속에 뭉쳐 있던 덩어리 같은 게 확 풀려나는 느낌이 들면서 눈물이 핑 하고 돌았다.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 작게 소리내어 ‘행복하다’고 속삭였다.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였다. 안으로 들어서자 엄청나게 커다란 공간이 펼쳐졌다. 밖에서 보면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이런 곳이 숨겨져 있었다니 놀라웠다. 한참 동안 수도원 구석 구석을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관광객이 들어갈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되어 있어서 아쉬웠다. 이런 곳에 살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졌다. 일주일, 아니 한 달 정도, 이런 수도원에서 지낸다면 어떨까. 매일 아침 교회의 종소리를 듣고, 종일 방 안에서 고요한 하루를 보내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잠이 들고…. 한 번쯤 경험해보고 싶다 생각했다. 수도원에서 나와 역으로 다시 걸어갔다. 음악을 들으면서 갔다. 가수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가슴에 더 가까이 와 닿았다. 반대쪽에서 뛰어오던 조깅하는 아저씨와 눈이 마주쳐 서로 웃어 보였다.
세 번째 날에는 밀라노 엑스포를 구경하러 갔다. 사람이 북적이고 규모도 너무 거대해서 재미보다 힘든 게 더 컸다. 대단한 행사이긴 했다. 얼마나 많은 인력과 돈이 투자되었을지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하루 만에 세계 여행을 한 기분. 국력에 따른 전시 퀄리티의 차이가 많이 느껴졌다. 한국의 위상에 대해, 그와 함께 북한의 상황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됐다. 이제 다시 토리노로 돌아가야 했다. 다시 이런 저런 걱정이 떠오르고, 생각이 많아졌다. 자꾸 생각이 많아지는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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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노에서의 생활, 본격적인 적응이 시작되었다. 내가 마주한 첫 번째 큰 숙제는, 넘쳐나는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채로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었다. 시간이 많아지면 마냥 즐거울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았다. 불안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나에겐 언제나 열심히 해야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내가 그것을 열심히 하든 하지 않든, 어쨌든 ‘할 일’은 항상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것을 잘 해내는지 아닌지를 기준으로 내 삶의 가치를 매겼고, 나 또한 그 일들을 잘 해낼 때마다 내 삶이 잘 굴러가고 있다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게 없었다. 주어진 의무 같은 건 없었다. 어떻게 살든 내 마음이었다. 낯선 자유는 불안을 수반했다. 해야 할 일이 없어지면서 내 삶의 질을 평가해주던 기준까지 함께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이곳에서 하는 모든 경험에 대해 잘했다 못했다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한 사람, 나 하나밖에 없었다. 어떤 삶이 잘 사는 삶인가,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해야 했다. 이는 어려운 작업이었다. 주의가 흐트러지면 ‘왜 교환학생 생활을 그런 식으로밖에 못 지냈어?’라고 비판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했고, ‘다른 사람들은 교환학생 때 뭘 할까’ 하고 자꾸 남과 나를 비교하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했다. 아무도 내가 교환학생 때 어떻게 살았는지 큰 관심 없을 거고, 그러니 비교가 무의미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선택에 대한 확고한 기준이 잡혀 있지 않기에 그런 것이었다. 나만의 기준이라는 게 단번에 생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일단은 비워야 했다. 내 기준을 당장 세우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남의 기준이 새어 들어오지 않게 하려면, 일단 내 하루하루를 백지 상태로 깨끗하게 만들어야 했다. 나는 뭔가 의미 있는 경험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을 꾹 누르고,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살아보려고 노력했다.
아무렇게나 살기. 점점 익숙해졌다. 생각보다 빨리 몸에 익었다. 9월 후반부터는 큰 노력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머릿속은 점점 조용해졌고, 마음은 편안해졌다. 아마도 그게 빠른 시간 안에 가능했던 건, 내가 있던 곳이 한국 사람이라곤 룸메이트 언니밖에 없는 외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의식해왔던 남들은 거기 없었으니까. 그들은 상상 속에만 존재했다. 그러니 머릿속에서 떠드는 목소리들만 가라앉히면 되는 것이었다. 나는 여유가 무엇인지 알아갔다. 달력은 매일 텅텅 비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그날 하고 싶은 것을 하면 되었다. 이유 같은 건 필요 없었고, 의미 같은 것도 필요 없었다. 아무도 내가 그날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게 좋았다.
나는 집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강가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강 이름은 포 강(Fiume Po)이었다. 도시 옆에 흐르는 강 치고는 녹음이 짙고 푸르렀다. 가끔씩 카누를 타는 사람들도 보였다. 여행도 계속 했다. 9월 말에는 교환학생으로 네덜란드에 와 있었던 친구를 만나러 암스테르담에 갔었고, 10월 초에는 짧게 혼자 피렌체에 다녀왔다. 여행 중에도 점점 생각이 없어져서, 발이 이끄는 대로 아무렇게나 돌아다녔던 것 같다. 10월 중순쯤, 주말에 혼자 카메라를 들고 토리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광장(Piazzale Monte di Cappuccini)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룸메이트 언니는 다른 곳으로 여행을 가고 없었다. 그날이 내가 기억하기로, 교환학생 기간 통틀어서 가장 완벽하게 여유롭고 평화로운 하루였던 것 같다. 내 옆에 아무도 없는데도 혼자서 온전히 행복했고,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고 있는데도 가슴 속에 전혀 허전한 구석이 없었다. 이전에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건축마저도 마음 언저리 어딘가로 치워져 보이지 않았다. 자유로웠다. 불안함 없이, 행복하게 자유로웠다.
한편 수업이 기대했던 것보다 재미있었다. 이탈리아어 수업은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게 오랜만이라 그런지 은근히 열의가 생겼다. 수업에서 배운 것을 밖에 나가서 바로 써먹어보는 것도 재미가 쏠쏠했다. 이탈리아 문화 수업은 딴짓 하면서 흘려 들은 날이 더 많지만 가끔씩 주의를 끄는 내용들이 있었다. 가장 좋았던 건 현대 건축과 현대 디자인사 수업이었다. 교양 과목이라 수업 내용이 아주 깊지는 않았지만, 서양 건축의 역사를 이탈리아 사람이 설명해주니 서양 문화의 기반에 깔려 있는 철학이 어떤 것인지 훨씬 자연스럽게 이해되고 흡수되는 것 같았다. 동양인의 입장에서는 이해해야 하는 내용이지만 그들에게는 몸 속에 깊이 체화되어 있는 내용이니까. 수업을 듣고 나면 집에 와서 한국 건축과 관련된 이런저런 고민들을 일기에 적곤 했다. 현대 디자인사 교수님과는 조금 친해져서 가끔씩 수업 끝나고 집 가는 길에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마음의 여유도 생기고, 수업에 흥미도 느끼고, 친구가 없어서 가끔 외롭고 심심한 것만 빼면 나름대로 괜찮은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그러던 중, 또다시 여행을 가게 되었다. 여행지는 서양건축의 시초, 서양 건축 하면 가장 처음에 나오는 건물,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그리스 아테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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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8 - 2015.10.20
아테네, 히드라 섬
그리스에 도착. 태양이 강렬했다. 토리노는 쌀쌀해지기 시작했는데 여기 오니 다시 여름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호텔에 도착해 얇은 옷으로 갈아입고, 시내 구경을 하러 밖으로 나갔다. 시내는 아주 활기찼다. 북유럽, 중부 유럽에 비해 고상한 느낌이 덜해서 그런지 어딘가 정겨웠다.
식사를 하고 가게 구경을 좀 하다가 아크로폴리스 쪽으로 향했다. 아크로폴리스에 다다르려면 오르막길을 계속 올라야 했다. 숨이 차오르고, 날씨는 점점 뜨거워졌다. 반바지를 가져오지 않은 걸 후회했다. 한참을 올라오니 아테네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공터가 나왔다. 올라가다 지친 사람들이 모여서 쉬고 있었다. 위에서 보는 아테네의 풍경은 그동안 내가 가 본 유럽의 어느 도시보다 소박하고 자연스러웠다. 왠지 마음이 산뜻하고 깨끗해졌다.
다시 등산, 한참을 더 오르고 나서야 아크로폴리스에 입성, 드디어 눈앞에 파르테논 신전이 나타났다. 사실 반쯤은 의무감에 보러 온 것이었기 때문에 크게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만나는 순간 그 아름다움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주위를 이리저리 서성이다가 신전이 한눈에 보이는 자리에 걸터앉아서 한참을 가만히 쳐다봤다. 아무 생각도 안 했던 것 같다. 내가 건축과 학생이라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난 그 앞에서 그저 별볼일 없는 작고 평범한 한 사람일 뿐이었는데,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좋고, 대단하고,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오후 4시 반이었는데 햇빛은 여전히 뜨거웠다.
그 다음날,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바닷가 선착장으로 갔다. 아테네에서 바다 건너 남쪽에 있는 섬에 가기 위해서였다. 이름은 히드라(Hydra), 그리스어로는 이드라(Υδρα). 토리노에서 이것저것 검색해보다가 알게 된 곳이었다. 도로가 없어 운송수단으로 당나귀를 쓰는 곳이라 해서 끌렸던 것 같다. 아침 공기는 차가웠다.
섬까지 타고 갈 배는 생각했던 것보다 꽤 컸다. 좌석도 넓고 편안했다. 전날 비행기 타느라 4시에 기상하고 오늘은 배 때문에 7시에 기상했더니 배에 타자마자 잠이 쏟아져서 정신 없이 졸았다. 중간 중간 다른 섬에 정박할 때마다 문밖으로 바다 내음이 흘러 들어왔다. 냄새를 맡자 바다를 눈으로 보고 싶어져서 잠이 깼다. 자리에서 일어나 바다를 보러 나가려고 하자, 선원이 데크로 나가지 못하게 저지했다. 아쉬운 대로 창밖으로 바닷물을 지켜봤다.
최종 정박지인 히드라 섬에 도착했다. 섬에 도착하자 배가 너무 고파서 우선 바로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간단히 끼니를 해결했다. 힘이 좀 나자 다시 밖으로 나갔다. 섬은 아름다웠다. 마음 내키는 대로 실컷 돌아다녔다. 건물 틈새로 언뜻 언뜻 보이는 투명한 바다 빛, 색색깔로 칠해진 문과 창문들, 담장을 타고 올라 봉우리를 맺은 이름 모를 꽃들, 골목골목마다 숨어 있는 고양이들, 길 밖으로 울려 퍼지는 어느 부부의 대화소리, 그릇 덜그럭거리는 소리, 닭 우는 소리, 아기 울음소리…. 사진도 실컷 찍었다. 어떤 여행에서보다 사람들의 삶이 자세히 들여다보였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그곳에서 당연하고도 힘겨운 현실을 살아내고 있었다. 내 눈에는 그 당연함이 아름다워 보였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쉬지 않고 섬 안을 오르락 내리락 하다 보니 힘들어져서 선착장 근처로 돌아와 바다가 보이는 자리에 앉아 레모네이드 한 잔을 마시며 잠시 쉬었다. 바다 쪽에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상쾌해졌다. 다시 힘을 내서 섬의 동쪽으로 갔다. 섬마을 끝자락에 있는 망루 같은 곳으로 올라갔다. 그 위에 걸터앉자 섬 전체와 항구, 바다가 한눈에 보였다. 깨끗하고, 푸르렀다. 시골이라 벌레도 많고 더럽거나 불편한 것도 많은데, 별로 불쾌하지 않았다. 섬 전체를 감도는 이 잔잔한 평화로움이 모든 사소한 나쁜 것들을 온화하게 품어주는 것 같았다. 사람과 자연이 서로 ‘잘’ 공존하게 해주는 것, 어쩌면 그게 건축의 시작이 아닐까 싶었다.
갑자기 요즘 내가 생각을 너무 안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삶에 대해서 건축에 대해서 혼자 충분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기로 해놓고, 처음 맞은 무한한 여유에 취한 나머지 내게 다가오는 수많은 메시지들을 대충대충 흘려 보내고 있는 건 아닐까. 긴장감을 조금 되찾자고 생각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을 더 기르고 싶었다. 다만 너무 열심히 하려 하지는 말고, 내가 즐길 수 있는 선에서.
다음날 토리노로 돌아가면, 사흘만 있다가 다시 여행을 떠날 예정이었다. 다음 여행지는 베네치아. 찬란한 10월의 베네치아였다. 어떤 여행지도 건드린 적 없었던 내 마음 속 어느 부분을 흔들어버린, 가장 특별했던 여행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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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3 - 2015.10.26
비첸자, 베네치아
베네치아에 가기 전, 비첸자에 들르기로 했다. 서양건축사 시간에 배운 빌라 로톤다(Villa Rotonda)도 볼 겸 해서. 비첸자는 적당히 한가하면서도 볼거리가 은근히 풍성한 도시였다. 바르셀로나가 가우디의 도시라면, 비첸자는 안드레아 팔라디오의 도시였다. (팔라디오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건축을 대표하는 건축가다.) 길을 걷다 어떤 건물이 눈에 띈다 싶으면 팔라디오의 건물이었다.
빌라 로툰다도 팔라디오가 설계한 건물이었다. 빌라 로툰다는 저택이라 시내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유명 관광지가 아니라 대중교통 찾기가 번거로워서 그냥 걸어가기로 했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시내 외곽의 한적한 동네를 지나 언덕을 오르고, 그 다음엔 흙길로 된 내리막을 한참 걸었다. 3박 4일치 짐을 배낭에 다 지고 걸으려니 꽤 힘들었다. 드디어 빌라 로툰다의 정문이 나왔다. 매표소에서 표를 사고 로툰다 쪽을 바라보았다. 양 옆으로 벽이 세워져 있는 기다란 길 끝에 밝은 상아색 빛깔의 빌라 로툰다가 보였다.
길을 따라 천천히 다가갔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장면이 너무 깔끔해서, 누가 그려놓은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깨끗하게 파란 하늘, 깨끗하게 푸른 잔디, 그 가운데 완벽한 대칭, 완벽한 비율을 띠고 있는 빌라 로툰다의 정면. 너무 완벽하고 조화로워서 비현실적이었다. 이상한 괴리감 같은 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가까이 가서 앞모습, 옆모습, 뒷모습,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름다움이라는 게, 어려운 개념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멀리 있는 게 아닌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굉장히 단순한 것일 수도 있겠다, 지금 여기에 아름다움이 있는 것 같다. 내가 그 건물에서 느낀 것은, 아주 순수하고 강한 의지였다. 누구나 보면 감탄할 만한, 아름다운 무언가를 창조하고 싶다는 의지. 조금은 조급하고 성급한 의지이긴 했다. 이것이 좋은 건물인지 아닌지, 이런 식의 아름다움이 과연 건축적으로 바람직한 것인지, 그건 생각해 볼 문제였다. 그러나 어쨌든 난 그 순간에 아름다움에 도달해보겠다는 누군가의 열렬한 욕구를 읽었고, 그 덕분에 멀게 느껴졌던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이 내 몸 바로 옆으로 확 다가온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다른 건 몰라도, 팔라디오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강렬한 경험이었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판판하게 압착해 눌러 담은 화폭 속에 나를 잠시 끼워 넣었다가 뺀 것 같았다. 잔상이 오래 남았다. 저녁에 기차를 타고 베네치아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그 잔상이 날 계속 감싸고 있었던 것 같다.
베네치아에서의 첫날. 아침에 숙소 주인 아주머니께서 베네치아의 역사에 대해 열띠게 이야기해주셨다. 원래 베네치아 사람들은 다른 민족의 공격을 피해 토르첼로라는 작은 섬에 모여 살고 있었다, 손재주가 좋아서 바느질과 어업으로 먹고 살았다, 그러던 중 아시아 쪽으로 진출해 무역에 손을 뻗게 되었고, 그로 인해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나라를 통째로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 사람들은 그 돈으로 산호섬 위에 직접 도시를 건설하기로 했다, ‘바다를 거느리는 민족’이라는 명성에 대한 자부심 때문에. 어떻게 보면 미친 짓 같은데, 한편으로 왠지 감동적이었다. 여기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무엇인지, 어떤 종류의 특별한 에너지를 지니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당시 베네치아에서는 2015 베니스 비엔날레가 한창이었다. 본 전시는 크게 아르세날레(Arsenale), 쟈르디니(Giardini) 두 장소에 나뉘어져 있었고, 그 외에 도시 곳곳의 성당이나 건물에서도 각종 작은 전시를 볼 수 있었다. 나는 숙소에서 아르세날레까지 걸어서 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 리알토 다리를 지나, 산 마르코 광장에 들렀다. 바닷물이 살짝 넘쳤는지, 광장에 물이 한 가득 얕게 고여 있었다. 물 위로 산 마르코 성당과 두칼레 궁전이 거울처럼 투명하게 비쳤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반쯤 홀려서 광장 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다가 그만 신발 안쪽이 다 젖어버리고 말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물 위로 지나가라고 놓은 나무 판자로 만든 길이 있고 사람들이 그 위로 걸어가고 있었다. 난 그 무리에 합류하여 바닷가 쪽으로 나간 뒤, 바다를 따라 걸었다. 강렬한 아침 햇살, 청록색 바닷물, 그 위를 다니는 곤돌라와 수상택시…. 지나칠 정도로 생생하고 아름다웠다. 이런 광경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지구에 인간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를 건설한 옛 베네치아 사람들과 지금 이 도시를 지켜내고 있는 이탈리아인들이 존경스러워졌다.
베니스 비엔날레는 엑스포와 달리 원래 있는 오래된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는 듯했다. 국가관도 있고, 개인 작품 전시도 있었다. 현대 미술은 정말 어려웠다. 이해되는 것보다 이해가 안 되는 게 훨씬 많고, 감동적인 것보다 난감한 것이 훨씬 많았다. 머릿속이 어지럽고 피곤했다. 하지만 뭐랄까, 그곳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엄청나게 거대한 에너지 같은 것이 몸에 와 닿았다. 뭔가를 온 힘을 다해 표현하려고 하는 사람이 세계에 이렇게나 많구나, 그리고 그것을 이해해보려고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 또한 이렇게나 많구나, 싶었다. 처음으로 예술이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말로 하지 않고 이렇게 복잡한 방식으로 돌려 말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 작품 전시관 끄트머리에 한 다큐멘터리 작품이 있었다. 은사자상 수상작이라고 표시되어 있어서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갔는데, 한국 작품이었다. 한국 대기업의 비인간적 노동자 착취를 고발하는 내용. 잠시 동안 완전히 빠져들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열심히 세계에 우리나라의 문제를 알리려고 하고 있는데, 난 그동안 정치나 사회 문제에 별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새삼 부끄러워졌다.
전시장에서 나와 아르세날레 근처 동네를 돌아다녔다. 주요 관광지에서 조금 떨어진 섬 끝자락이라 그런지 다른 곳보다 비교적 한산했다. 하루 중 가장 따스한 시간대라 걷기 좋았다. 집집마다 좁은 골목 사이로 빨래를 널어놓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산 마르코 광장으로 돌아와 산 조르조 마조레 섬으로 가기 위해 수상버스를 탔다. 바다로 나왔다. 바닷물이 태양빛에 반짝이면서 힘차게 넘실거렸다. 습기 찬 바닷바람이 빠르게 얼굴을 스쳤다. 그 순간, 갑자기 미친듯이 행복해졌다. 온 주위가 완벽하게 아름답고 행복하다고 느꼈다. 흥분이 될 정도였다. 속에서 뭔가가 막 흘러나오려는 듯한 꿈틀거림이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절로 떠올랐다. 함께 있으면 좋겠다고, 이 장면을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 느끼고 싶다고 생각했다.
산 조르조 마조레 섬.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이 가운데 우뚝 서 있는 본섬 동쪽의 자그마한 섬이다. 성당 뒤쪽에는 커다란 정원이 있고, 섬의 가장자리에는 배들이 줄을 서서 둥둥 떠 있다. 성당 뒤뜰을 두리번거리던 중, 예쁘게 정돈된 돌길을 발견하고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한참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작은 유리 박스가 나타났다. 얕게 고인 투명한 물 위에 가만히 놓여 있었다. 설명을 보니 차를 마시는 공간이라 했다. 한 일본인 작가(Hiroshi Sugimoto)의 설치 작품(Glass Tea House Mondrian) 이었다. 베네치아의 작은 섬에서 우연히 일본을 만난 것이었다. 근데 신기하게도 그 작품이 지니고 있는 일본다운 깔끔함과 단아함이 이 섬의 분위기와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조용하고 우아하게, 원래부터 그곳이 자기 자리였던 것처럼 놓여 있었다. 놀라웠다. 동양의 것과 서양의 것이 각자의 색을 지키면서도 서로 충돌 없이 공존하고 있었다.
다음날엔 아침 일찍 숙소에서 나와 쟈르디니로 향했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분위기가 어제보다 다소 혼잡했다. 쟈르디니는 전시장이 공원과 함께 조성되어 있어서 훨씬 다니기 좋았다. 그리고 아르세날레와 달리 국가별 전시관 디자인이 제각각 다양했다. 한국관도 쟈르디니에 위치하고 있었다. 전시를 본 뒤에는 부라노 섬과 무라노 섬에 다녀왔다. 날이 흐려 그랬는지 좀 지쳐서 그랬는지, 그다지 큰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그리고, 베네치아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체력이 떨어지고 있는 게 느껴졌지만 의지를 잃지 않고 일출을 보러 가기로 했다. 5시 40분쯤 일어나서 씻지도 않고 카메라를 들고 주섬주섬 숙소 밖으로 나왔다. 새벽에 밖에 나오는 건 오랜만이었다. 공기가 차고 맑았다. 조용한 어둠 속에서 수상버스를 타고 아카데미아 다리로 향했다. 대운하의 구부러진 부분을 돌자, 붉게 물들기 시작한 하늘이 얼핏 보였다. 해 뜨기 직전에 아카데미아 다리에 도착했다. 낮에는 그토록 북적이던 아카데미아 다리에 10명 남짓한 사람들이 듬성듬성 서서 해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그들의 일원이 되어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태양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옅게 낀 구름이 일출을 아름답게 장식했다. 하염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해가 더 뜨기 전에 새벽의 산 마르코 광장에 가 보고 싶어서 그쪽으로 걸어갔다. 처음 보는 고요한 산 마르코 광장이었다. 광장의 동쪽이 바다를 향해 트여있는 덕에, 바다 쪽으로부터 붉은 태양빛이 흘러 들어와 광장을 가득히 채우고 있었다. 아직 일을 시작하지 않은 곤돌라들은 바닷가를 따라 가지런히 매달려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차분한 분위기 속에 설렘과 생기가 조용히 감돌고 있었다. 이 시간대에만 볼 수 있는 베네치아의 또다른 얼굴이었다.
날씨가 좋으니, 낮에는 부라노 섬에 한 번 더 가 보기로 했다. 부라노 행 수상버스를 타고 있던 중, 버스가 토르첼로 섬 정류장에 섰는데 그 순간 갑자기 토르첼로 섬에도 가보고 싶어져서 배에서 내렸다. 숙소 아주머니께서 해주셨던 이야기 때문인 것 같다. 토르첼로 섬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가을을 맞아 여러 색으로 물든 나무로 둘러싸인 좁은 운하를 따라 산책했다. 운하를 흐르는 물이 별처럼 얌전하게 반짝였다. 토르첼로 섬은 정말 작았다. 섬 자체가 그리 작진 않은데, 사람이 걸을 수 있도록 닦인 길이 몇 갈래밖에 없었다. 조용하니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세상과 떨어져 있는 느낌이 좋았다.
토르첼로 섬에서 다시 배를 타고 부라노 섬으로 갔다. 역시 날이 맑으니 전날보다 예뻤다. 왔던 곳이라 길이 익어서 좀 더 구석구석으로 다닐 수 있었다. 본섬으로 돌아와서는 종탑에 올랐다. 마지막으로 베네치아를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싶어서였다. 시간 제한 때문에 오래 있지는 못했지만, 3일 동안 갔던 곳들을 하나 하나 애정을 담아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기차역으로 가기 전, 아쉬워서 시간이 될 때까지 괜히 섬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기차에 오르자 그제서야 온몸이 쑤신다는 것을 알았다. 발은 아프다 못해 발가락이 따끔거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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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이 지나가고, 11월이 되었다. 밖에 서서히 찬 기운이 돌았다. 10월 말에 써머 타임이 해제되어 밤이 확 짧아졌다. 네다섯 시만 되면 어둑어둑했다. 교환학생 생활이 후반부에 접어들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갈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한국에 돌아가도 지금처럼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 남의 기준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을까, 걱정이 문득 문득 떠올랐다. 하지만 고민으로 이어질 정도의 걱정은 아니었다. 잔잔한 나날이 흘렀다. 날이 추워지고 밤이 길어져 그런지 잠이 많아졌다. 밖에 안 나가고 집에 있는 날이 늘어났다.
왠지 기분이 점점 가라앉았다. 새로운 자극이 없어 무료해진 탓인 것 같았다. 그 틈을 타고 이런 저런 잡생각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친구를 사귈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또 떠오르고, 귀한 시간을 허투루 쓰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함도 올라왔다. 무료함에 빠져들던 그때의 나에게 그나마 약간의 생기를 불어넣어주었던 것은 사진이었다. 그 동안 여행 다니면서 사진을 엄청 많이 찍었고 나름대로 잘 찍으려고 노력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전체적인 분위기나 구도의 차원에서였지 기술적으로 잘 찍고 싶은 욕심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카메라의 세세한 기능에 대해 공부할 생각을 안 했었다. 그냥 대충 자동 모드로 해놓고 찍었던 것 같다. 근데 베네치아 여행 때부터 ‘내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 같다’ 는 느낌이 어렴풋하게 피어나기 시작했고, 그러자 카메라에 대해 기술적으로도 잘 알게 되면 표현할 수 있는 폭이 늘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나는 사진 관련 책을 인터넷으로 다운받아 카메라 공부를 시작했다. 심심할 때 집에서 책을 읽으며 카메라의 이런 저런 기능을 시험해보고, 날씨가 괜찮으면 집 밖에 나가 공원이나 강가, 거리의 사진을 찍곤 했다.
그 사이에 세 번의 여행이 있었다. 11월 초에는 네덜란드에 있는 친구와 또 만났는데, 이번엔 벨기에에서 만나서 함께 여행을 했다. 11월 중순에는 혼자 기차를 타고 이탈리아 중부 지방에 있는 아씨시에 갔었고, 그 다음엔 포르투에 다녀왔다. 브뤼셀에서 만난 맛있는 음식들과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아씨시 호텔에서 훤히 내려다보이던 움브리아의 풍경과 성 프란체스코 성당, 포르투에서 만난 색색깔의 타일과 알바로 시자의 건축, 모두 좋았지만 어쩐지 그리 강렬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슬슬 여행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던 것일까. 아니면 베네치아가 너무 강렬했던 것일까. 여행지에 가도 전만큼 의욕이 나지 않았고, 열심히 돌아다녀보려 해도 금새 피곤해지곤 했다. 여행 자체에서 만족감이 느껴지지 않으니 사진이라도 남기자 싶어, 사진 찍기에 다소 집착하기도 했다.
이래저래 일상에서도, 여행에서도, 권태와의 싸움이었다. 차갑게 가라앉는 날씨와 함께, 건축에 대한 열정도 조금씩 시들해졌다. 가끔씩 이런 저런 생각이 지나가기는 했지만, 의미 있는 행동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 교환학생 생활이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11월 말, 나는 마지막에서 두 번째 여행을 떠났다. 여행지는 스위스. 건축에 대한 나의 열정을 슬쩍 다시 일깨워 주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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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6 - 2015.11.30
스위스
스위스의 수도 베른은 토리노에서 기차로 5시간 정도 되는 거리에 있었다. 기차로 하는 해외 여행은 처음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다닐 땐 수하물 비용을 아끼느라 배낭에 짐을 꾸역꾸역 넣어 지고 다녔었는데, 이번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넉넉한 캐리어에 5일치 짐을 아무렇게나 던져 넣고 끌고 나왔다. 기차에 탑승, 출발했다. 이탈리아와 스위스 사이의 바깥 풍경은 무척 아름다웠다. 호수도 지나가고, 눈 덮인 산이 지나가고…. 깜빡깜빡 졸다가 멋있는 풍경이 나오면 잠이 깨서 창 밖을 바라보고, 그러다가 또 잠들고를 반복했다. 북쪽으로 갈수록 온도가 낮아지는 듯했다. 기차 안에 있는데도 한기가 느껴져 무릎에 놓여 있던 목도리를 칭칭 둘렀다.
베른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려 숙소로 걸어갔다. 건물들이 스위스답게 귀엽고 예뻤다. 중세 풍 분위기가 물씬 났다. 벌써부터 여기 저기에 크리스마스 장식이 많이 보였다. 숙소에 짐을 놓은 뒤 저녁 식사를 했다. 겨울 날씨가 되어 그런지 따뜻한 식당 안에 있는 게 좋아서, 식후 커피를 주문해 커피를 마시며 한참 동안 책을 읽었다. 그러다 보니 벌써 밤이 되었다. 식당에서 나와 거리를 산책하며 크리스마스 장식이 반짝이는 가게들을 구경했다. 토리노 집 주변은 저녁이 되면 그냥 전부 캄캄해지는지라, 이렇게 아기자기하고 활기찬 밤거리가 오랜만이었다. 4박 5일 내내 베른에서 자기로 한 건 그냥 여기가 수도라서 다른 도시로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하기에 편할 것 같아서였는데, 도시 자체도 기대했던 것보다 마음에 들었다. 바람이 찬데도 어쩐지 마음이 따뜻해졌다.
둘째 날에는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루체른으로 향했다. 그 옆에 있는 리기 산(Rigi)에 가보기 위해서였다. 스위스에 왔으니 산 한 군데 정도는 올라갔다 내려와야 하지 않을까 싶어 정한 여행지였다. 루체른에서 유람선을 타고 비츠나우 역에 가서 산악열차를 타면 리기 산 꼭대기에 다다를 수 있었다. 기차를 타고 1시간 정도를 가자 루체른에 도착. 루체른은 동쪽으로 커다란 호수를 끼고 있는 도시였다. 이곳 역시 생각보다 도시가 아름다워서, 산에 가기 전에 잠깐 돌아다녔다. 카펠 교, 호수 위를 유유히 헤엄치는 백조와 갈매기, 아기자기하면서도 정교한 건물과 간판들, 유난히 지붕이 뾰족한 성당…. 날이 살짝 흐려서인지, 호수의 옅은 안개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채도가 낮아 보였다. 이전에 찍어본 적 없는 분위기의 사진이 나온 것 같아 흡족했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 산 위에 올라가도 아무것도 안 보일까 봐 좀 걱정됐지만, 그래도 일정대로 올라가보기로 했다. 배를 타고 비츠나우로 가서 산악열차를 탔다. 산악열차를 타고 창 밖으로 설경을 보며 산을 오르는데, 아니나 다를까 엄청나게 두터운 구름이 급속도로 밀려왔다. 나 그냥 구름 속에 파묻혀 있다가 돌아오는 거 아닌가, 불안해졌다. 그러나 얼마 후, 열차가 그 두터운 구름을 통과해버렸다. 구름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온 것이다. 쨍 하게 파란 하늘과 태양이 보였고, 새하얗게 쌓인 눈이 햇빛을 받아 번쩍거려서 눈이 부셨다. 열차에서 내렸다. 역에서 조금만 더 걸어나가면 산 정상이었다. 눈이 깊게 쌓여 있어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걸어갔다. 얼굴에 닿는 뜨거운 햇빛, 발 아래로 펼쳐진 구름, 눈부신 눈밭, 저 멀리 언뜻 언뜻 보이는 산봉우리들, 어디서도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또 홀린 듯이 이리 저리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 순간은 아주 잠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름이 산꼭대기를 덮치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온 주변이 안개에 휩싸였다. 정말 운이 좋았던 것이었다.
루체른으로 돌아온 나는, 산에서 본 아름다운 풍경 덕에 조금 들떠 있었다. 베른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기 전 루체른의 밤을 구경했다. 작은 도서관에도 잠깐 들어가보고, 강가 주변을 거닐었다. 너무 오랜만에 기분이 고양되었던 건지, 다리 위에서 야경을 찍으려다가 그만 카메라 렌즈캡을 강물에 떨어뜨려 버리는 작은 사고가 있었다.
다음 날엔 바젤에 가기로 했다. 바젤도 베른에서 기차로 1시간 정도 되는 거리에 있었다. 바젤에서 가고 싶은 곳은 두 군데였다. 비트라 캠퍼스(Vitra Campus)와 바이엘러 파운데이션(Fondation Beyeler). 비트라 캠퍼스는 바젤에서 독일 국경을 살짝 넘어선 곳에 있었다. 스위스 바젤 역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독일 바젤 역에 내려, 그 다음에 탈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 풍경이 다소 휑했는데도, 왠지 모르게 자꾸 신이 나고 기분이 좋았다. 얼굴을 스치는 겨울 바람의 냉기도 싫지 않았다. 줄곧 음악을 들으며 이동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기차를 탄 뒤 한참을 걸어 비트라 캠퍼스에 도착. 비트라 캠퍼스의 탄생 배경은 이렇다. 비트라는 스위스의 큰 가구 회사인데, 공장 단지에 큰 화재가 나서 많은 건물이 훼손되었다. 그래서 새로운 단지를 짓기로 했는데, 이때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주도 아래 여러 신인 건축가에게 의뢰하여 건물을 디자인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자하 하디드, 알바로 시자, 안도 타다오, SANAA 등 당시에는 신인이었으나 현재 세계적인 건축가들의 초기 작품들이 한 자리에 잔뜩 모이게 되었다. 프랭크 게리가 사람 보는 안목이 아주 뛰어났던 것이다. 무슨 건축 테마 파크 같았다. 몇몇 건물은 방문자들에게 열려 있었고, 용도상 그렇지 않은 곳은 가이드 투어를 통해 둘러볼 수 있었다. 건물 외에도 전시 등 볼거리가 많았다. 가구 디자이너들에게도 흥미가 생겼다. 캠퍼스 곳곳에는 비트라의 대표 가구 디자이너인 임즈 부부(Charles and Ray Eames)의 가구가 놓여 있었고, 장 프루베(Jean Prouve)의 가구가 전시되어 있는 공간도 있었다. 그저께와 어제는 도시와 자연으로 놀래키더니, 오늘은 또 건축과 디자인이라니, 스위스라는 나라에 매력을 느꼈다. 여행 중 기분으로만 따지면 베네치아 다음으로 좋은 곳 같다고 생각했다.
다음은 바이엘러 파운데이션. 바이엘러 파운데이션은 바젤 역과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미술관으로, 이탈리아 건축가 렌조피아노가 디자인한 곳이었다. 늦은 오후에 도착했다. 트램에서 내리자마자 입구가 보였다. 들어가자 작은 정원이 나왔고, 조금 더 들어가자 건물이 보였다. 건물 앞에 얕게 깔린 물과 붉은색이 도는 돌벽이 서로 어울렸다. 정원에는 조각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정원을 한 바퀴 돈 후 미술관 안으로 들어갔다. 학생은 무료였다. 전시장으로 입장했다. 입장하는 곳 바로 앞에 길쭉하게 기프트샵이 마련되어 있고, 나머지는 전부 전시 공간이었다. 당시 진행되고 있던 전시 제목은 ‘Black Sun’으로, 러시아 화가 말레비치의 1915년작 ‘Black Circle’이라는 작품의 100주년 기념전이었다. 말레비치의 작품들과 그 외 말레비치와 연관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큐레이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전시 퀄리티가 그동안 가본 전시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 느꼈다. 작품의 선택과 배치는 물론이고, 각 작품에 대한 설명이 적힌 작은 안내 책자까지 완벽했다.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인지 의도가 쏙쏙 들어왔다. 전시 공간도 본 중 최고였다. 직접 가본 건물 중 가장 좋았던 곳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미술관 건물은 기본적으로 작품이 더 눈에 띄도록, 작품이 더 아름답게 보이도록 조용히 받쳐주려는 겸허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건물이 자신의 존재감을 죽인 것도 아니었다. 지나치게 나서지 않을 뿐이었다. 건물은 내가 작품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작품들을 쓱 내밀어 보여주면서도, 적절한 타이밍에 틈틈이 바깥 풍경을 보여주었다. 그 리듬감이 온화하고 얌전하면서도 세련되고 우아했다. 모든 공간은 저마다 다채로웠고, 이음새가 하나도 억지스럽지 않았다. 미술관 안에 있는 내내 마음이 편안했다. 배려를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렌조 피아노의 다른 건물에 가 보고 싶었다. 스위스에서의 네 번째 날, 나는 일어나자마자 베른에 있는 파울 클레(Paul Klee) 미술관으로 갔다. 미술관 주변은 아직은 좀 덜 발달된 외곽의 신시가지였다. 미술관 뒤쪽으로는 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파울 클레 미술관은 물결치는 파도 모양을 하고 있었다. 안으로 입장했다.
내가 그때까지 제대로 가 본 렌조 피아노의 미술관은 총 세 개였다. 전날에 갔던 바이엘러 미술관, 여기 파울 클레 미술관, 그리고 토리노 집 바로 옆에 피나코테카(Pinacoteca)라는 아주 작은 갤러리. 셋의 공통점은 모두 미술관 치고 밝다는 것이었다. 창이 많고 햇빛이 많이 들어온다. 외부와 내부가 서로 적극적으로 열려 있다는 건데, 보통 그랬을 때 정도가 지나치면 건물 안에 있을 때 마음이 조금 불안하기 마련인데 렌조 피아노의 건물은 그렇지가 않았다. 전시를 볼 때 전시실에 창으로 빛이 새어 들어와도 집중이 분산되지 않는다. 빛이 들어오는 방식도 항상 평범하지 않았다. 하나 하나 매력적이었다. 직접 와서 빛이 얼굴과 몸에 닿는 것을 느껴봐야만 그 진가를 이해할 수 있는 건축이었다. 파울 클레 미술관도 그랬다.
전시를 천천히 관람하고, 전시장 외의 공간도 구경했다. 신기했다. 건물의 모든 요소가 반드시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느낌이었고, 각 요소에 사용된 재료도 너무 적절했다. 게다가 사람들이 건물의 각 공간을 정확히 건축가가 의도한 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의 완성도였다. 이후 나는 누가 좋아하는 건축가가 누구냐고 물으면, 좋아하는 건축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한에서 가장 뛰어난 건축가는 렌조 피아노 같다, 언제나 이렇게 대답한다. 그 사람이 건축을 통해서 선물해주는 ‘좋은 기분’을 내가 직접 느껴봤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마지막 날에는 기차를 타고 뮈렌, 인터라켄, 스피츠에 잠깐씩 들렀다. 그리고 베른에 돌아와 토리노로 돌아가기 전 숙소에서 잠시 쉬었다. 5일동안 같은 방에 묵었던 싱가폴 아주머니가 잘 가라고 안아주셨다. 따뜻한 분이셨다. 토리노로 돌아가는 기차에 올랐다. 스위스 여행은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았다. 도시 하나 하나가 저마다의 매력을 갖고 있었고, 철도와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어 매일 매일 다른 도시에 가는 게 힘들지도 않았다. 훌륭한 건축가와 디자이너의 작품도 많이 만났고, 만난 사람들은 모두 온화하고 친절했다. 여행하는 내내 즐거우면서도 편안하고 안심되는 그런 나라였다. 다음에 조금 더 날씨 좋고 따뜻한 계절에 다시 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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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여행이 끝난 후 12월 초에는 여행하느라 밀린 과제와 발표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12월 3일 다소 부담스러웠던 과제들이 마무리되었다. 이제 마지막 기말고사만 남았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여러 가지 정리해야 할 것들도 있었다. 그 전에 마지막으로 한숨 돌리고 싶었다. 코모 호수가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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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04
바렌나
토리노를 떠나기 전, 마지막에서 두 번째 금요일이었다. 모처럼 맑은 날이라는 일기 예보를 믿고 기차를 탔다. 근데 예보가 틀렸는지, 밖에 안개가 자욱했다.
기차에서 사진에 대한 생각을 했다. 어떤 사진이 좋은 사진일까. 유럽에 온 이후로 사진을 정말 많이 찍었다. 처음엔 내 눈으로 본 아름다운 무언가를 기록하고 소유하고 싶어서 찍었다. 근데 찍다 보니 예쁜 사진을 찍기 위해서 자의적으로 프레임을 설정해서 장면을 연출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런 사진은 좋은 사진이 아닌 걸까?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작가가 그랬다. 사실을 그대로 담아내는 그림은 있을 수 없으며, 대신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장면을 다시 살피게 해주는 그림이 좋은 그림이라고. 나는 좋은 사진을 찍고 있는 걸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히 사진을 열심히 찍기 시작하면서 일상의 사소한 것들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 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여행을 할 때마다 그런 사소한 것들을 다 짚어내려고 노력하는 게 귀찮고 피곤할 때도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인지도 모른다.
바렌나 에시노 역에 도착했다. 호숫가로 걸어갔다. 너무 늦게 왔는지, 벌써 해가 지려고 하고 있었다. 하늘이 개이지는 않았지만, 구름이 그리 두껍지는 않았다. 옅은 회색 구름 뒤로 태양이 지고 있었다. 하늘과 호수가 온통 분홍과 보라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호수 물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맑았다. 호수 주변은 사람이 없고 조용했다. 적막한 동네에 물이 바람이 찰싹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호수를 보러 몇 시간씩이나 기차를 타고 온 건데, 막상 오니 딱히 흥분이나 감동은 없었다. 마음이 고요하고 차분해졌다. 사진을 좀 찍다가, 카메라를 가방에 집어넣었다. 카메라가 무언가를 방해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대신 생각을 했다. 곧 이탈리아를 떠날 거라는 사실을 상기해보았다. 생각보다 별 느낌이 없었다. 이곳에 사는 게 너무 익숙해져 버려서 실감이 나지 않는 듯했다. 교환학생 초반에 느꼈던 외로움에 대한 생각도 했다. 지금은 그런 외로움이 없었다. 혼자서 이런 인적 드문 조용한 마을에 와 있는데 무섭지도 외롭지도 않았다. 외로울 법한 상황에서 외롭지 않을 때도 있고, 사람들이 주변에 가득한데 외로울 때도 있다. 외로움은 대체 뭘까, 생각했다.
토리노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었다. 이해가 안 되는 내용이 더 많았지만 이따금 마음에 박히는 구절들이 있었다. 첫 번째 챕터의 제목, ‘두 세계’에 대해 생각했다. 나한테도 ‘두 세계’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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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노에서의 생활이 하나 둘씩 마무리되었다. 기말고사를 봤고, 에든버러 여행을 마지막으로 혼자 여행도 끝이 났다. 토리노를 떠나면 밀라노에서 고등학교 친구를 만나 함께 여행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겨울 여행에 필요한 것을 제외한 나머지 짐은 택배로 부쳤다. 대청소를 하고, 집주인 아주머니께 에든버러에서 사온 목도리를 선물로 드리며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네 달 동안 함께 지냈던 룸메이트 언니는 나보다 먼저 떠났다. 마지막으로 교환학생 담당자에게 집 열쇠를 반납했다. 그리고 짐을 끌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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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26일 동안 나는 한국에서 학기를 마치고 비행기를 타고 온 고등학교 친구와 함께 여행을 했다. 베네치아, 피렌체, 로마, 비엔나, 프라하, 하이델베르크, 런던, 그리고 파리에 갔다. 오랜만에 나를 잘 아는 친구를 만나면 마냥 반갑고 좋을 거 같았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나는 친구와 함께 여행하는 내내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24시간 동안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이 버거웠다. 예전에 다른 친구와 여행했을 때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도 왜 이렇게 힘든 거지 하고 당황스러웠다. 혼자 느끼고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대화와 타협의 과정이 귀찮았고,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딱 내 몸만 챙기면서 다니는 것에 익숙해져서 친구가 서로 의지하고 싶어할 때마다 불편했다. 그렇다 보니 본의 아니게 친구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뱉어버리는 일도 생겼다. 한마디로 성격이 나빠졌던 것이다. 결국 친구에게 혼자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고 중간 중간 따로 다니고 싶다고 했는데, 혼자 시간이 왜 꼭 필요한 것인지 내가 제대로 설명을 못하다 보니 서로 오해가 쌓이기도 했다. 오해나 다툼이 일어날 때마다 여행 중이라 체력적으로 힘들어서 그런 거겠지, 한국에 가면 나아지겠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여행은 시작일 뿐이었다. 토리노에서의 혼자 생활은 나라는 사람의 어딘가를 결정적으로 바꿔놓은 모양이었다. 그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가서도 나는 끊임없이 여러 가지 문제를 맞닥뜨려야만 했다. 나는 대체 어디가 어떻게 바뀌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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