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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essay/「결백한 침묵 - 프리퀄」 2019

5 / 생각이 많은 사람

2016년이 되었고, 스물 세 살이 되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집은 그대로였다. 그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아서 한국으로 돌아가면 되게 이상할 것 같다 생각했는데, 막상 집에 돌아오니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집은 편안하고 따뜻했다. 유럽에서의 생활에 대해서는 잠시 모두 잊어버리고, 오랜 여행으로 지친 몸을 누였다.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하고 난 뒤, 난 휴학 시기를 어떻게 보내면 좋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선 유럽에서 내가 경제관념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충격을 받은 탓에, 조금이라도 돈을 벌고 싶었다. 다음엔 내가 번 돈으로 여행을 가고 싶었다. 집 근처 학원에서 중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다. 오전 시간에는 학교에 가서 청강을 하고 싶었다. 건축학과는 커리큘럼이 빡빡해서 학기 중에 듣고 싶은 수업을 자유롭게 듣는 게 어렵기 때문에, 휴학 시기를 이용하고 싶었던 것이다. 여러 수업에 슬쩍 들어가서 분위기를 살펴본 뒤, <사진 예술의 이해>와 <서양철학사>를 청강하기로 했다. 

 

한편, 건축을 좋아하는 감정이 이상하게 옅어졌다. 대신에 내가 새로이 끌리기 시작했던 것은 철학이었다. 청강 과목도 철학을 위주로 찾아보았고, ‘지대넓얕(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라는 팟캐스트를 즐겨 들었다. 네 명의 패널 중 두 명은 서양철학 전공이고 한 명은 동양철학 전공이었는데, 철학을 그냥 학문으로만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과 결부시켜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그들이 하는 대화에 끌렸다. 그들은 자신만의 관점을 유지하면서도 겸손하고 열린 태도로 서로 말을 주고 받았다. 그걸 듣고 있다 보면 나 또한 그런 유의 대화에 참여하고 싶다는 욕구가 느껴졌다. 누군가와 편견 없는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내가 혼자 느꼈던 것들에 대해, 혼자서 생각했던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 하지만 나는 아직 내 속에 떠다니는 느낌과 생각들을 유려하게 표현할 줄 몰랐고, 현실에서 그런 대화 상대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대화에 능숙한 사람은 대화 상대가 누구던 간에 의미 있는 대화를 이끌어낼 수 있지만, 대화에 서툰 사람은 앞에 훌륭한 대화 상대가 있어야만 제대로 된 말을 꺼낼 수 있다. 그때 나는 초보였으니 훌륭한 대화 상대를 직접 찾아 다녀야 했다. 나는 서점과 도서관을 자주 드나들기 시작했다.

 

매주 학교에 가서 듣고 싶은 수업을 듣고, 버스나 지하철에서 팟캐스트를 듣고, 저녁에는 학원 아르바이트를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도서관이나 카페나 집에서 이런 저런 책을 읽었다. 사람들과의 거리는 조금 멀었다. 친구들과 약속을 잡아 종종 만나긴 했지만 내 세상에 틀어박혀 생각하는 것이 더 편안하고 즐거웠고, 친구들이랑 대화하는 것보다 책 속에서 작가의 이야기를 듣는 게 더 재미 있었다. 봄과 여름, 나는 나 혼자만의 세상에 더욱더 깊숙이 파묻혔다.

 

여기서 나는 이 시기 동안에 책 속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과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에 대해, 살짝 꺼내서 얘기해보려고 한다. 첫 번째 대화 상대는 팟캐스트 지대넓얕에서 소개받은, 인도의 철학자이자 명상가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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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2 - 2015.04.09

크리슈나무르티,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정현종 역, 물병자리)

 

크리슈나무르티를 알게 된 건 2월 마지막 날이었다. 팟캐스트 지대넓얕의 <나는 위대하다 – 크리슈나무르티> 편을 듣고 있었다. 김도인이라는 패널이 크리슈나무르티의 철학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고, 그것이 자신에게 왜 와닿았었는지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3학년 1학기 때 스트레스에 압도되었던 내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직접 읽어보고 싶어졌다. 3월 초 도서관에 가서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를 빌려왔다. 깨달음이나 명상에 관련된 책은 처음 접하는 거라 문장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몇 장 읽어보고 나서 이건 한 번 읽어서 이해될 책이 아니겠다 싶었다. 하지만 일단 읽기 시작했으니 읽어보기나 하자 하고, 읽다 말다 하면서 꾸역꾸역 끝까지 읽어 나갔다. 읽어도 읽어도 내가 이 사람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제대로 흡수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부분 부분, 마음 안으로 박히는 내용들이 있었다.

 

“우리는 얻어들은 것으로만 사는 사람들이다. 늘 들은 바에 따라 살았고, 우리의 의도나 성향에 이끌려왔으며 여러 조건과 환경에 맞추어 억지로 모든 것을 받아들여 왔다. 우리는 많은 영향을 받아 생긴 하나의 결과이며, 우리 안에는 아무것도 새로운 것이 없고, 우리 자신을 위해 발견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독창적이고도 원래 모습 그대로인, 그리고 명징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p.15

 

나는 그제까지 내가 ‘얻어들은 것으로만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저 문장을 읽는 순간에도 무슨 의미인지 바로 동의가 되지 않았다. 뭔가 혼나는 기분도 들고, 반발심도 들었다. 하지만 마음 속 어딘가 깊은 부분이 찔린 것 같았다.  

 

“이 터전, 이 삶이 우리가 아는 전부이며, 우리는 실존의 엄청난 싸움을 이해할 수 없는 나머지 그것이 두려워 여러 가지 기묘한 방법으로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한다. 또한 우리는 모르는 것을 두려워한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내일의 저편에 있는 것을 두려워한다. 결국 우리는 아는 것을 두려워하고 모르는 것도 두려워한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며, 거기에는 희망이 없다.”

p.20

 

두려움. 내가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렴풋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나는 3학년 1학기 말에 무엇이 두려워서 설계에 그토록 스트레스를 받았던 걸까. 교환학생 때는 왜 친구를 사귀지 않고 굳이 혼자 지내려고 했던 걸까. 겨울에 친구랑 같이 여행할 때는 왜 기분이 안 좋아지고 성격이 나빠졌던 걸까. 지금은 왜 친구들과 거리를 두고 혼자만의 세상에 좀 더 머무르고 싶어하는 걸까.

 

“우리는 파편들 속에서 살고 있다. 사무실에서는 이런 모습이고 집에서는 저런 모습이다.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외쳐도 마음속에는 독재로 가득 차 있다. 이웃 사랑에 관해 말하지만, 경쟁을 해서 그를 죽이곤 한다. 자신 안에 있는 파편적 존재를 알고 있는가?”

p.47

 

이는 자기 안의 여러 가지 모순되는 면들을 알고 있느냐는 물음이었고, 자신의 이면에 대해서 알고 있냐는 질문이었다. 또한 이는 내가 ‘나’라고 믿고 있는 모습이 사실은 내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과 갈등 없이 잘 지내고 있으니 자신이 꽤 착한 사람이라고 믿는 것, 괜찮은 학교에서 괜찮은 성적을 받고 있으니 자신이 꽤 똑똑한 사람이라고 믿는 것, 주어진 공부나 일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고 있으니 자신이 꽤 성실한 가족구성원 혹은 사회구성원이라고 믿는 것, 그런 믿음들이 다 허상일 수 있다는 말이었다. 나는 3학년 1학기 말에 나 자신을 괴롭게 한 적이 있었고, 지난 겨울 여행 중에는 친구를 괴롭게 한 적이 있었다. 나는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걸까, 의심이 들었다. 나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날 두렵게 했다.   

 

이후 크리슈나무르티는 쾌락, 공포, 폭력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인간의 욕망 중 첫 번째, 쾌락. 그는 기쁨과 쾌락은 다르다고 했다. 기쁨은 순간 일어나는 현상인데, 그때 그 좋은 느낌에 대해 생각으로 곱씹으면서 그것을 되풀이하고 영속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생길 때 쾌락으로 변질되는 것이라고 했다. 쾌락은 반드시 고통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니까.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오늘의 쾌락은 어제의 기쁨과 같을 수 없으니까. 그는 쾌락과 고통이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이후 그는 인간의 두 번째 욕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회적 인정, 지위, 권력에 대한 욕망. 그는 이러한 욕망이 타인을 지배하고 싶어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지배에 대한 욕구는 인간이 지닌 공격성의 한 형태라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공격성의 근본적인 원인이 공포라 했다. 삶을,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에 대한 공포. 우리는 그것이 무서워서 외적으로 타인이 인정이나 관심, 사랑에 기대려고 하며, 내적으로 그 공포를 어떻게든 대면하지 않기 위해 ‘도피의 네트워크’를 정교하게 구축한다.

 

공포로부터의 도피에서 비롯된 타인에 대한 지배욕은 곧 폭력을 낳는다. 그는 남을 죽이거나 상해를 입히는 것만이 폭력이 아니라고 했다. 상처가 되는 말을 내뱉는 것, 상대방을 무시하는 것, 두려움 때문에 올바르지 않은 무언가에 복종하는 것 또한 폭력이라 했다. 그는 폭력을 저지르지 않으려면, 자신이 무언가 혹은 누군가에 대해 분노를 느낄 때 그 분노를 비난이나 정당화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럴 때 화를 내면 안 되는 거야’ 하고 비난하거나, ‘그건 마땅히 화를 낼 만한 일이었어’ 하고 정당화하지 않고, 아무런 판단 없이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자기 안의 폭력성에 대해 이해하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했다.

 

이 사람이 맞는 얘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은 있었다. 하지만 아직 나는 잘 와닿지 않았다. 내가 어떤 쾌락을 갈망하고 어떤 고통을 두려워하는지, 내가 무엇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지, 내가 지닌 폭력성이 무엇인지도. 책의 내용은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이미지 형성, 방어 메커니즘에 근거하고 있다. 모든 관계 속에서 우리들 각자는 상대방에 관한 이미지를 만들며, 이 두 개의 이미지 - 사람들 자신이 아니라 - 가 관계를 갖는다. 아내는 남편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며 - 의식적으로 갖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미지는 있다 - 남편은 아내에 관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우리는 나라와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갖고 있으며, 그것에 더욱더 이미지를 보탬으로써 항상 그 이미지들을 강화시킨다. 그리고 관계를 갖는 것은 그 이미지들이다. 이미지가 형성되고 나면 두 사람 또는 많은 사람들 사이의 실제 관계는 완전히 끝나고 만다.”

p.92

 

그동안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종종 불만을 품었었다. 내가 나를 충분히 표현하기도 전에 자기들 마음대로 나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고, 그 이미지의 틀 속에서 나를 대하는 것 같다고. 그래서 뭔가 자유롭지 않다고. 그런데 나 또한 타인을 대할 때 그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또 어쩌면, 나 또한 나 스스로에게 어떤 이미지의 틀에 부합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생각이 복잡해졌다.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이미지와 이미지가 맺는 관계 말고, 진정한 모습으로 맺는 관계가 가능할까…. 다음엔 자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저항은 자유가 아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저항할 때 그것은 하나의 대응이고, 이 대응은 그것 자체의 패턴을 세워 당신은 그 패턴에 붙잡혀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

자유란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어떤 것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자유 의식, 모든 걸 회의하고 질문하는 자유이며 따라서 아주 강렬하게 집중적이고 능동적이고 활기에 차 있기 때문에 그것은 모든 의존, 예속, 순응, 수락을 내던진다. 그런 자유에는 완전히 혼자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그토록 의존적인 환경과 문화 속에서 자란 마음이 그런 자유 즉 완전히 고독하고 아무 리더십도 전통도 권위도 없는 그런 자유를 찾을 수 있을까?”

p.107-108

 

나는 3학년 1학기가 끝나고 ‘학교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런 마음을 품고 유럽에 갔다. 난 그곳에서만큼은 다른 사람들이 내 생활에 간섭하지 못하게 하고 싶어서 모든 사람과의 사이에 적정 거리를 두었다. 그렇게 해서 순간 순간, 자유롭고 행복하다는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그 느낌은 분명히 진짜였다. 하지만 그게 진정한 자유였을까. 나는 자유를 갈망하는 내내 문득 문득 올라오는 의존적인 마음을 억누르느라 애써야 했고, 또 그 자유로운 느낌을 계속 유지하고 싶은 집착 때문에 누군가를 서운하게 하거나 상처를 주기도 했다. 내가 자유를 추구했던 방식은,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결코 좋지 않은 방법이었다.

 

내용은 더욱더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시간, 사랑, 아름다움, 자의식, 생각, 과거, 명상, 그리고 내적 혁명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와 미래는 인간이 만든 환상이다. 인간은 현재의 삶을 대면하는 것이 두려워 생각을 통해 과거와 미래로 도망친다. 그러니 우리가 ‘시간’이라 부르는 것은 본질적으로 ‘생각’이다. 생각은 우리를 과거에 대한 슬픔이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 속에 가두어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삶을 살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생각은 몸집을 점점 더 키워나간다. 공포, 의존, 자기연민, 증오 등의 감정들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감정들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우리는 누군가를 갖고 싶은 마음, 누군가를 더 이상 만나지 못하게 되어 고통스러운 마음, 누군가에게 사랑 받지 못해 괴로운 마음, 자신을 충분히 사랑해주지 않는 사람에게 화가 나는 마음 등을 사랑과 혼동하곤 한다. 하지만 그런 감정들은 사랑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런 감정들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생각이 방해하는 것은 사랑만이 아니다. 생각 때문에 우리는 아름다움과도 멀어진다. 우리가 무언가를 바라볼 때, 생각이 우리와 그것 사이에 끼어들어 관념 혹은 이미지를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관념과 이미지의 필터를 통해서 세상을 보는 일에 점차 익숙해진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사물도, 어떤 사람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할 때, 아름다움은 절대로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되고, 스스로 그 생각이 구축한 관념과 이미지에 부합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자기 자신을 그 이미지의 필터를 통해서만 바라보기 시작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볼 수 없게 된다. 그러면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게 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도 없는 상태에 놓인다.

 

우리가 생각의 전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 문제는 평생 반복된다. 우리는 생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생각에 대해 진정으로 이해했을 때, 우리는 아주 고요한 침묵을 만나게 될 것이다. 거기에는 사랑과 아름다움이 있을 것이고, 자유가 있을 것이며, 무한하게 흘러나오는 에너지가 있을 것이다.

 

“어떤 값진 운동이던지, 어떤 깊은 뜻을 지닌 행동이든지, 우리들 각자 속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내가 먼저 변화해야 한다. 즉 세계와 내가 맺고 있는 관계의 본질과 구조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아는 것이 바로 행동하는 것이다. ”

p.187

 

그가 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였다. 나는 그것을 느낌으로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의 말대로 나는 보다 제대로 된 자유를 위해서 변화하고 싶다고 느꼈다. 그의 말대로 생각에 끌려 다니고 싶지 않다고도 느꼈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았다. 현재에 온전히 주의를 기울이는 것, 고요한 침묵, 무한한 에너지, 그런 설명들도 나한테는 그저 막연하게만 느껴졌다. 당시의 나에게는 너무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고, 수준이 높았다. 그 책에서 크리슈나무르티가 함께 하자고 하는 일은 막 스물 세 살이 된 내가 바로 받아들이고 실천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던 것 같다.

 

좀 더 쉬운 이야기를 싶었다. 나는 다른 이야기를 더 찾아다녔다. 서양철학사 수업이나 팟캐스트, 책을 통해 다양한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면서 혼자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이상에 대해, 두려움에 대해, 믿음에 대해,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서로 싸우는 사람들에 대해, 자유에 대해, 쾌락과 고통에 대해, 욕구와 두려움 사이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공허함에 대해.

 

4월 중순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삶의 본 모습은 공허함이 아닐까.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해 모두들 아둥바둥 거리고 있는 게 아닐까. 텅 빈 상태가 되는 게 두려워서 채우고, 채우고, 또 채워 넣는 것.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모두 다 그러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게 삶이야? 겨우 그게 삶의 동력이야?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다른 사람들의 삶의 모습도, 내 삶의 모습도 모두 이상해 보였다. 고작 그게 삶을 이끌어가는 동력이라면, 살아가는 일에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왜 살까. 난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걸까. 그러던 중, 한 친구로부터 아들러 심리학을 다룬 책 「미움받을 용기」 를 추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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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19 - 2016.04.30

고가 후미타케 ∙ 기시미 이치로, 「 미움받을 용기 」 (전경아 역, 인플루엔셜)

 

당시 난 책을 보는 눈도 딱히 없으면서 유행하는 대중서에 대한 쓸데없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근본적인 문제는 건드리지 않고 사람들이 듣고 싶어할 만한 말만 하는 책일 것 같다는. 이 책의 경우 책 제목만 보고 ‘당신이 현실에서 겪는 모든 문제는 미움 받을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 용기만 낼 수 있다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식의 내용일 거라고 지레짐작했던 것 같다. 하지만 막상 읽어보니 그렇지 않았다. 아들러 심리학이 제시하는 관점에는 분명히 주목할 만한 지점이 있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동안의 인간 관계에 대해, 나 자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 사람과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크게 바뀌었다.

 

책은 ‘인간은 변할 수 있다, 세계는 단순하다,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 고 주장하는 철학자와 그 주장에 맞서는 한 청년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책의 첫 부분, 청년이 철학자에게 다짜고짜 찾아와 ‘당신이 하는 말은 말도 안 된다, 세계는 혼돈과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고 다그친다. 그런 청년을 되려 반가워하며, 철학자는 이런 말을 꺼낸다.

 

철학자 : 어쩌면 자네는 선글라스 너머로 세계를 보고 있는지도 몰라. 그런 상태에서는 세계가 어둡게 보이는 것이 당연하지. 그러면 세계가 어둡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선글라스를 벗으면 되네. 맨눈에 비치는 강렬하고 눈이 부셔서 절로 눈을 감게 될지도 모르네. 다시 선글라스를 찾게 될지도 모르지. 그래도 선글라스를 벗을 수 있을까? 세계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자네에게 그런 ‘용기’가 있을까? 그게 관건이지.

p.13-14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와 연결되는 내용이었다. 그 책에서 ‘우리는 삶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 생각으로 도망친다’고 했던 내용을 「미움받을 용기」에서는 ‘세계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이 두려워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었다. 청년은 철학자의 말에 반박했다. 인간이 변할 수 있다고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말라고 했다. 청년은 자신의 친구를 예시로 들며, 과거에 고통스러운 경험을 겪은 적이 있는 사람일수록 변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말에 철학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철학자 : 아들러는 트라우마 이론을 부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네. “어떠한 경험도 그 자체는 성공의 원인도 실패의 원인도 아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받은 충격 - 즉 트라우마 - 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경험 안에서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낸다.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 라고.

p.36-37

 

‘과거의 고통스러운 경험 때문에 지금 나는 이런 모습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어’ 라고 단정짓고 변화를 거부하는 것은 핑계라는 말이었다. 이어 철학자는 우리가 흔히 ‘성격’이라 부르는 것을 생활양식(life style)이라 칭하며, 이는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과거의 경험에 의미를 부여한 방식에 따라 구축된 것이라 했다. 그는 생활양식은 강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과거의 어느 순간에 자신이 선택했던 것이고, 따라서 다시 선택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했다.

 

철학자 : 자네는 지금까지 자네의 생활양식이 뭔지 몰랐을 거야. 어쩌면 생활양식이라는 개념조차 몰랐을 테고. 물론 태어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지. 이 나라에서 태어난 것, 이 시대에 태어난 것, 지금의 부모 밑에서 태어난 것, 전부 내가 택하진 않았으니까. 게다가 그것들은 꽤 큰 영향력을 갖고 있지. 불만도 있을 테고, 다른 사람을 보고 “저런 환경에서 태어나고 싶었는데” 하며 부러워하는 마음도 있을 거야. 하지만 거기서 끝내서는 안 되네. 문제는 과거가 아닌 지금 ‘여기’에 있네. 자네는 지금 여기에서 생활양식을 알게 됐어. 그렇다면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는 자네 책임이야. 여태까지의 생활양식을 유지하는 것도, 새로운 생활양식을 선택하는 것도 모두 자네 판단에 달렸지.

p.61

 

나는 그때까지 트라우마나 성격 이론에 대해서도 잘 몰랐고, 성격을 바꾸고 싶다는 욕구를 강하게 느꼈던 적도 없었다. 그러나 당시의 내 성격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들과의 사이에 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 좋다, 그런 것들. 가끔 좀 외롭기도 했고 그게 누군가를 불편하게 할 때면 신경 쓰이긴 했지만, 굳이 그것을 고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인 때였다. 그렇지만 ‘성격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철학자의 이야기에 어쩐지 마음이 끌렸다.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었다.     

 

청년은 일주일 뒤에 철학자를 다시 찾아온다. 청년은 자기가 스스로를 싫어하고 있다고 했다. 철학자의 말대로 생활양식이 자기가 스스로 택한 거라면, 왜 굳이 스스로를 싫어하는 ‘생활양식’을 택하고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철학자는 이에 이렇게 답한다.

 

철학자 : 자네의 ‘목적’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받지 않는 것’이라네.

청  년 : …….

철학자 :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 목적을 이룰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해. 자신의 단점을 찾아내서 스스로를 미워하고 인간관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으면 되네. 그렇게 자신의 껍데기 안에 틀어박혀 있으면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아도 되고, 남에게 거절을 당했을 때도 이유를 댈 수 있지. 나는 이런 단점이 있어 거절당했다고, 이런 단점만 없으면 나도 사랑받을 수 있다고.

p.79-80

 

내 성격에 대해서 생각했다. 나도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아서 거리를 두는 걸까, 사실은 나를 좋아하고 있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을 향해 벽을 세우는 걸까. 잘 알 수 없었다. 

 

철학자는 ‘열등감’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라 했다. 인간은 누구나 무기력한 상태로 세상에 태어난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지금보다 더 나아지려는 ‘우월성 추구’에 대한 욕구를 갖게 된다. 도달하려는 목표에 실패했을 때 그런 자신에 대해 만족스럽지 않다고 느끼는 감정이 바로 열등감인데, 이러한 열등감은 노력과 성장의 촉진제가 되어준다.

 

안 좋은 것은 ‘열등 콤플렉스’다. 열등 콤플렉스는 열등감을 변명 삼아 앞으로 더 나아가기를 멈춘 상태를 말한다. “나는 어차피 ~라서 ~할 수 없다”는 식으로. 철학자는 열등 콤플렉스를 비롯하여 자신만의 ‘인생의 과제’를 회피하기 위해 그럴듯한 이유와 핑계를 갖다 대는 모든 시도들을 가리켜 ‘인생의 거짓말’이라고 했다. ‘인생의 과제’는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사회적으로 자립하게 될 때까지 반드시 직면해야 하는 인간관계로, 크게 ‘일의 관계’, ‘교우의 관계’, 그리고 ‘사랑의 관계’로 나뉘어진다. 철학자는 청년이 지금 인생의 과제를 회피하기 위해서 자신의 단점을 핑계 삼는 생활양식을 갖고 있는 것이며, 스스로를 좋아하고 싶다면 그 생활양식을 바꾸고 인생의 과제를 직면할 용기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2주일 후에 청년이 세 번째 방문을 했다. 청년은 용기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철학자는 무엇이 청년을 구속하고 있냐고 물었다. 청년은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부터 슬쩍 꺼내더니, 자신은 부모님을 비롯해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고 인정도 받고 싶기 때문에 이런 저런 일로부터 절대 자유로울 수 없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자 철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철학자 : 타인의 인정을 바라고 타인의 평가에만 신경을 기울이면, 끝내는 타인의 인생을 살게 된다네.

청  년 : 무슨 뜻이죠?

철학자 : 인정받기를 바란 나머지 ‘이런 사람이면 좋겠다’는 타인의 기대를 따라 살게 되지. 즉 진정한 자신을 버리고 타인의 인생을 살게 되는 거라네. 기억하게. 자네가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한다면, 타인 역시 ‘자네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라는 걸세. 상대가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더라도 화를 내서는 안 돼.

p.155

 

나는 주변 사람들 중 유독 나를 좋아해주거나 특별하게 여겨주었던 몇몇 사람들을 떠올렸다. 나는 그들이 해주는 인정과 평가에 기대고 있나. 그 인정과 평가를 잃을까 봐 혹시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청년은 서로 서로 인정해주면서 관계를 맺고 사회를 구축해나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냐며 반박했다. 철학자는 결코 그렇지 않다며, ‘과제의 분리’라는 개념을 내세운다. 어떤 행동이나 선택을 하고자 할 때, 그 전에 ‘이것이 누구의 과제인가?’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누구의 과제인지 구분하는 기준은 ‘그 선택이 가져온 결과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누구인가’ 이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식에게 공부, 취직, 결혼 등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타인의 과제의 간섭하는 것이다. 공부, 취직, 결혼으로 인해 생겨난 결과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부모가 아니라 자식이기 때문이다. 철학자는 매 순간 어디까지가 내 과제이고 어디서부터가 타인의 과제인지를 살피고 정확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고 말했다. 누구도 나의 과제에 개입시키지 않고, 자기 자신도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않고.

 

과제의 분리라는 개념은 그때의 나에게 확 와 닿았다. 지금 내가 과제의 분리를 하기 위해서 그동안 알던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제의 분리를 하기 위해 억지로 거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아직 과제의 분리가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내가 과제의 분리를 어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청년은 철학자에게 왜 꼭 과제의 분리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자신은 인정욕구를 계속 따라가고 싶다고 했다. 이유는 이러했다.

 

청 년 : 타인이 내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내게 어떤 역할을 바라는지 판단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반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은 굉장히 어려워요.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무엇이 되고 싶고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가. 그런 구체적인 그림이 떠오르지 않으니까요. 누구나 명확한 꿈이나 목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선생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p.179-180

 

철학자는 이에 이렇게 답했다. 청년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을 망설이는 이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고 다른 사람의 안색을 살피고 다른 사람의 소망을 거드는 인생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이유. 그것은 청년이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철학자는 청년에게 필요한 것이 미움받을 용기라고 했다.  

 

철학자 : 부모에게 미움을 받아도 괜찮다는 것도, 독선적으로 행동하라는 것도 아닐세. 그저 과제를 분리하라는 거지. 자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자네의 과제가 아니야. 역으로 “나를 좋아해야 한다”, “이렇게 애를 썼는데 좋아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라고 생각하는 것도 상대의 과제에 개입하는 보상적 발상이라네. 미움을 살 가능성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비탈길을 굴러가듯이 살지 않고 눈앞의 언덕을 올라간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일세. 만약 내 앞에 ‘모두에게 사랑받는 인생’과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 인생’이 있고 이 중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한다고 치세. 나라면 주저하지 않고 후자를 택할 걸세.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보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으니까. 즉 자유롭게 살고 싶은 거지.

p.188-189

 

나한테는 구체적인 그림이 있을까? 무엇을 하고 싶은가, 무엇이 되고 싶고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가. 나도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철학자의 말 중 한 가지에는 온전히 동의했다.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보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것.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것….

 

일주일 후, 청년은 다시 철학자의 앞에 앉았다. 청년은 ‘과제의 분리’라는 개념이 인간을 고립으로 이끄는 것 같다며 따졌다. 그렇게 따로 따로 떨어져 사는 것이 뭐가 좋으냐면서. 이에 철학자는 과제의 분리를 통해 서로 간의 거리를 확보하는 것은 인간관계의 목표가 아니라 출발점에 불과하다고 했다. 청년은 물었다. 그럼 그 목표가 무엇이냐고. 철학자는 ‘공동체 감각(social interest)’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공동체 감각은 모든 타인을 친구로 여기고, 그 사람들 속에서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여기다’ 라고 느끼는 마음 상태를 말한다. 과제의 분리는 자기에 대한 관심(self interest)를 타인에 대한 관심(social interest)로 돌리기 위한 첫 번째 작업이다. 자신과 타인의 과제를 분리하고 타인을 자신과 대등한 존재로 존중할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사람에게 진정한 관심을 기울이고 진정으로 그 사람을 위한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서 공동체 감각에 다가가게 된다. 철학자는 이 공동체 감각을 통해서만 자신의 진짜 가치를 실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철학자 : 공동체, 즉 남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끼는 것. 타인으로부터 ‘좋다’는 평가를 받을 필요 없이 자신의 주관에 따라 ‘나는 다른 사람에게 공헌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 그러면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실감하게 된다네.

p.236

 

공동체 감각에 대한 내용은 그때 나에겐 다소 뜬구름 같았다. 크게 울림이 없었다.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남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다는 욕구도 그다지 느끼지 못하던 때였다. 그래도 열심히 메모를 해 가며 계속 읽어 나갔다.

 

청년은 이후 한 달 동안 생각에 잠겼다. 타인을 위해 무언가를 공헌하는 것, 철학자는 그것이 인간관계의 최종 목적지라고 했다. 그게 다인가? 청년에게 그 말은 너무 막연했다. 구체적으로 뭘 해야 한다는 건지, 어디로 방향을 잡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청년은 자기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인생의 의미는 뭐지.나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난 걸까. 청년은 또다시 자기에 대한 생각에만 사로잡혔다. 그러다 결국 철학자의 서재로 다시 찾아갔다.

 

청  년 : 선생님은 ‘나에 대한 집착’에서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하라고 말씀하셨지요. 타인에 대한 관심이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동의합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어떻게 해도 나만 신경 쓰이고 나만 보입니다.

p.256

 

자의식이 브레이크를 걸어 타인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갖기가 어렵다는 말이었다. 철학자는 청년에게 자기에 대한 관심을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바꾸기 위해 거쳐야 하는 구체적인 단계를 설명해주겠다고 했다. 총 세 단계였다. ‘자기 수용’, ‘타자 신뢰’, ‘타자 공헌’. ‘자기 수용’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바꿀 수 없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을 객관적으로 인지한 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겠다는 용기를 내는 것을 말했다. 그 다음, ‘타자 신뢰’는 타인을 조건 없이 믿는 것을 의미했다. 철학자는 그 믿음을 배반하는 것은 타인의 과제이지 청년의 과제가 아니라며, 상처가 두려워 타인을 신뢰하지 않으면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 ‘타자 공헌’은 타인에게 최선을 다해서 무언가를 주는 것이다. 철학자는 사람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는 행복은 이 ‘공헌감’에서 온다고 말했다.

 

철학자 : 이제 인간이 인정받기를 원하는 이유가 명확해졌네. 인간은 자신을 좋아하고 싶다, 자신이 가치 있음을 느끼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공헌감을 원한다. 그리고 공헌감을 얻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원하는 거지.

p.289

 

청년은 이 말에, 인정을 통해서도 공헌감을 느낄 수 있다면 인정욕구를 충족시키는 것도 행복이 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인정욕구를 왜 부정해야 하냐고 말했다. 이에 대한 철학자의 답은 이러했다.

 

철학자 : 인정욕구를 통해 얻은 공헌감에는 자유가 없지. 우리는 자유를 선택하면서 더불어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라네.

p.290

 

청년은 철학자에게 설득되는 듯하다가, 또다시 반박했다. 청년은 자기 삶에 좀 더 대단한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그는 철학자에게 자아 실현에서 오는 행복도 중요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사회적 성공을 이룩한다든지, 개인적으로 특별한 목적을 달성한다든지,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남긴다든지 하는. 인생에 어떤 고매한 개인적 목표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었다. 철학자는 이에 이렇게 대답했다. 목표 같은 건 필요 없다, 인생에 산 정상 같은 건 없으니까. 인생을 등산에 비유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선(線)’으로 파악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인생은 선이 아니라, 점의 연속이다. 다시 말해 인생은 찰나의 연속이다.

 

철학자 : 우리는 ‘지금, 여기’를 살아갈 수밖에 없어. 우리의 삶이란 찰나 안에서만 존재한다네. 이걸 알지 못하는 어른들은 청년들에게 ‘선’의 인생을 강요하지. 좋은 대학, 대기업, 안정된 가정 등 이런 선로를 따라가는 것이 행복한 인생이라면서. 그래도 인생은 선이 아니라네.

p.301

 

청년은 ‘지금, 여기’에만 주의를 기울이면서 어떻게 살아가냐고, 마땅히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계획해가면서 살아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현재에만 집중하면 앞도 뒤도 보이지 않으니 눈앞이 캄캄해질 따름일 거라고 반발했다. 그러자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철학자 : 과거가 보이는 것 같고, 미래가 예측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자네가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지 않고 희미한 빛 속에서 살고 있다는 증거일세. 인생은 찰나의 연속이며,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아. 자네는 과거와 미래를 봄으로써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려 하고 있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든지 간에 자네의 ‘지금, 여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 미래가 어떻게 되든 간에 ‘지금, 여기’에서 생각할 문제는 아니지.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고 있다면 그런 말은 나오지 않을 걸세. 

p.308

 

청년과 철학자는 서서히 합의점에 다가갔다. 청년은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인생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 거냐고 물었다. 철학자는 ‘일반적으로 인생의 의미는 없다’고 했다. 인생의 의미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스스로 부여해 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청년은 스스로 의미를 찾아나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철학자는 자유를 선택하고자 할 때 인간이 불안해하고 헤매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답했다. 다만 ‘타자 공헌’이라는 길잡이 별만 놓치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것만 잊지 않는다면, 힘든 일이 생기더라도, 청년을 싫어하는 사람이 생기더라도, 절대로 길을 잃지 않을 거라 했다. 청년의 마음이 움직였다. 청년은 철학자와 아들러의 말에 따라 인생을 살아보고 싶어졌다. 그는 자신이 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걸어가보겠다고, 철학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떠났다.   

 

책을 덮고 생각했다. 마지막 부분에서 삶의 의미에 대해 논하는 부분이 기억에 남았다. 삶의 의미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우리는 모두 ‘지금, 여기’를 매 순간 진지하게 살아감으로써 스스로 그 의미를 부여해나갈 수 있다는 것. 공허한 마음을 이런 저런 것들로 채워나가는 것이 겨우 삶인가, 하는 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었다. 희미하지만 희망적인 기분을 느꼈다.

 

나의 성격, 현재 나와 사람들과의 관계, 과제의 분리, ‘지금, 여기’ 에 집중해서 살아가는 것…. 지금 내가 들여다봐야 하는 문제들이 좀 더 깊이 건드려진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책에는 한 가지 찝찝한 구석이 있었다. 청년과 철학자는 줄곧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화로운 서재에서 대화를 했다. 철학자는 도시 외곽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었다. 청년이 각종 이기심과 경쟁심에 물들어 있는 현실 사회로 돌아가도 철학자와의 대화에서 얻은 깨달음에 따라 살 수 있을까 싶었다. 또다시 다른 이야기가 필요해졌다. 그러던 중 나는 아담 스미스의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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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3

러셀 로버츠 ∙ 아담 스미스, 「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 (이현주 역, 세계사)

 

사실 내가 읽고 싶었던 책은 아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이었다. 팟캐스트 지대넓얕을 통해서 아담 스미스가 학교에서 배웠던 「국부론」 말고 「도덕감정론」이라는 책도 썼다는 것을 알았고, 개략적인 내용을 듣고 관심이 갔다. 난 그 두꺼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근데 그 책은 너무 길고 졸려서 아무리 꾹 참고 읽어보려 해도 도저히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도서관 참고도서 코너에서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을 발견한 것이었다. 한 미국인 경제학자가 「도덕감정론」에 담긴 아담 스미스의 도덕 철학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놓은 책이었다. 책을 집어 들고 바로 도서관 소파에 앉아 한번에 쭉 훑었다.

 

아담 스미스의 철학에 대해서 러셀 로버츠가 요약해준 내용을 한 번 더 요약해보겠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인 존재다. 그러나 타인의 행복에 관심을 기울이는 면 또한 인간 본성에 내재되어 있다.’ 이것이 아담 스미스의 기본 전제이다. 이기심과 함께 이타심 또한 인간 본성의 일부라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자기에 대한 관심’에 쉽게 사로잡히곤 하지만 이를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바꿀 수 있다는 아들러의 견해와 비슷한 지점이었다. 이기적인 인간이 이타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을 아들러는 ‘과제의 분리’와 ‘인생의 과제’라는 개념을 들고 와서 설명했다면, 아담 스미스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그는 우리 안에 있는 ‘공정한 관찰자’와 ‘사랑받으려는 마음’이 서로 맞물려 역동을 일으키면서 이타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공정한 관찰자란 우리 자신과 타인의 입장을 함께 고려하여 우리의 행동이 도덕적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주는 인간의 상상 속 인물이며, 인간의 모든 행동은 이 공정한 관찰자와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된다. 모든 인간은 공정한 관찰자를 내면에 갖고 태어난다. 공정한 관찰자의 판단이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니다. 어릴 땐 잦은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경험이 많아질수록 판단력은 점점 정교해져 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행동하기 전에 왜 굳이 공정한 관찰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걸까? 아담 스미스는 인간이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를 타고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자격을 갖고 싶어하며,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한다. 스미스는 사랑받고 싶어하는 마음을 잘못된 거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사랑스러워지기 위한 노력을 ‘올바르게’ 해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삶에는 이 올바른 노력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장애물이 있다. 우선, 다른 사람들의 과분한 칭찬이나 아첨. 아직 우리에게 그럴 만한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남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 상황.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우리 쪽에서 사랑받으려는 마음이 앞서서 스스로를 꾸며낸 것일 수도 있고, 상대 쪽에서 자신의 이득을 위해 거짓말로 아첨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혹은 누구의 탓도 아닌, 아주 우연한 상황일 수도 있다. 스미스는 이때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현명한 사람이라면 이러한 과분한 칭찬이나 아첨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자기 자신을 똑바로 볼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두 번째의 더 큰 장애물은 스스로에게 하는 거짓말이다. 다른 말로 ‘자기기만’. 우리는 종종 사랑받으려는 올바른 노력을 하는 대신, 스스로를 이미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여기고 싶어한다. 그래서 실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이상적인 모습으로 바꾸어 생각하곤 한다. 스미스는 이 자기기만이 인간의 최대 약점이며,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이기심이나 악한 마음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결점을 자기기만의 커튼 속으로 감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기기만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주위의 다른 사람들을 거울 삼아 자기기만에서 벗어날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사랑스럽고 존경스러운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고 자신의 그렇지 않은 점을 돌아볼 때, 또 실제로 별로인 사람을 보고 난 뒤에 자기한테서도 그런 면을 발견할 때, 스스로에 대한 허황된 생각을 깰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담 스미스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길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고 말한다. 부와 명예에 이르는 길과, 지혜와 미덕에 이르는 길. 현실에서는 첫 번째 길이 인기가 많다. 도덕적인 사람보다는 부자와 권력자들이 더 많은 사람들의 호의와 관심을 얻으니까. 사람들은 왜 부자나 유명인을 좋아하는 것일까? 스미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에게는 행복해 보이는 사람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 사람의 행복에 공감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 그리고 막연히 돈과 권력, 인기가 있으면 행복할 거라고 상상하기 때문에, 그런 걸 가진 사람들을 쫓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미스는 물질은 절대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고 강하게 말한다. (그는 실제로 돈이 꽤 많았다.) 그는 오히려 부와 명예가 가져다주는 관심에 중독되면 자유와 편안함, 안정감을 잃어버린다고 했다. 스미스는 그 불행의 길에 한 번 들어가면 웬만해서는 빠져 나오기 어렵다면서, 첫 번째 길로 발을 들이면 안 된다고 거듭 강조한다. 대신 그는 우리가 지혜와 미덕에 이르는 길을 걸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그 두 번째 길로 우리를 이끌어주기 위해, 진정으로 사랑스럽고 존경스러운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한 자질에 대해 말한다. 첫 번째는 행위의 적절성. 공감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 자신의 감정을 서로 맞춰가면서 주변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두 번째로 신중, 정의, 선행이라는 미덕이 필요하다. ‘신중’은 자기 할 일을 알아서 잘 하는 것, ‘정의’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 ‘선행’은 남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스미스는 개개인이 이런 과정을 통해서 매 순간 사랑받기 위한 사소한 선택들을 하나 하나 해 나갈 때, 한 명 한 명의 노력이 모여서 살기 좋은 사회가 만들어진다고 했다. 사랑받으려는 욕구와 공정한 관찰자가 만들어내는 인간의 도덕감정은,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손’인 것이다. 스미스는 사회가 사회구성원들의 자발적인 도덕감정을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시스템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과 욕구를 통제하고 제어하는 것을 경계했다. 또한 개개인에게는 시스템을 억지로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매일 매일의 일상에서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일에 더 주의를 기울이라고 조언했다.

 

내가 아담 스미스의 사상에 끌렸던 이유는, 다른 서양 철학자들과는 조금 다르게 인간의 본성을 다루는 데 있어서 솔직한 ‘감정’을 기초로 해서 이야기를 이끌어나갔다는 점과 이야기를 개인의 차원에서 끝내지 않고 ‘사회’의 영역까지 확장했다는 점이었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의 움직임을 존중할 때 질서 있고 살기 좋은 사회가 만들어진다는 그의 생각은 신선했고, 아름다워 보였다. 인간 존재에 대한 그의 깊고 따뜻한 신뢰가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정도로 인간을, 그리고 나를 신뢰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이야기가 다소 이상적으로 들렸다. 매일 매일이 각종 허구와 욕망들로 가득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고, 부와 명예에도 유혹되지 않고, 꿋꿋이 지혜와 미덕을 추구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생각만으로 삶을 이해하려 하는 시도가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철학자들의 논리적이고 건조한 말투도 약간 따분해졌다. 뭔가 답답했다. 좀 더 살아 움직이는, 좀 더 생경한, 좀 더 솔직하고 내밀한 이야기들을 듣고 싶어졌다. 나는 자연스럽게 에세이에 끌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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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4 - 2016.05.06

이병률, 「 끌림 」 (달)

 

이병률 시인의 여행 에세이는, 「미움받을 용기」를 읽어보라 추천했던 그 친구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이병률 시인의 산문은 유럽에서 돌아온 후 세 달여 동안 다소 딱딱하게 무뎌져 있었던 내 감정을 풀어헤쳤고, 그 감정의 흐름을 타고 가슴 안쪽에 있는 무언가가 흔들렸다. 나는 그것이 흔들리는 것이 조금 두려웠고, 그래서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흔들리는 순간을 기다려왔던 모양인지, 그가 건네는 이야기를 계속 읽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청춘을 가만 두라. 흘러가는 대로. 혹은 그냥 닥치는 대로.

청춘에 있어서만큼 사용법이란 없다. 파도처럼 닥치면 온 몸으로 받을 것이며 비갠 뒤의 푸른 하늘처럼 눈이 시리면 그냥 거기다 온 몸을 푹 담그면 그만이다.

주저하면 청춘이 아니다. 생각의 벽 안쪽에 갇혀 지내는 것도 청춘이 아니다. 괜히 자신을 탓하거나 그도 아니면 남을 탓하는 것도 청춘의 임무가 아니다. 청춘은 운동장이다. 눈길 줄 데가 많은 번화가이며 마음 들떠 어쩔 줄 모르는 소풍날이다.

가끔, 나의 청춘을 돌아볼 때마다 여전히 가슴 두근거리는 이유는 아무거나 낙서를 해도 괜찮은 도화지, 그것도 끝도 없이 펼쳐진 거대한 도화지가 떠올려져서다.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어질러야 할지 모르는 하얀 도화지 앞에서의 두근거림이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순결한 감정이며 인생에 있어 몇 번 안 되는 기회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청춘은 방해받는 것 투성이다. ‘하지 말라’는 말들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야 함으로 느낄 수도, 만날 수도, 가질 수도 없게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느껴야 하는 것, 만나야 하는 것, 사력을 다해 가져야 하는 것, 그래서 반드시 행복해야 하는 것, 그것이 청춘이다.

 

당신에게 中

 

생각의 벽이 느껴졌다. 나는, 생각의 벽 안쪽에 있었다.

 

세상으로부터 뭔가를 받을 것만 생각하지 않는

세상에게 뭔가를 줄 수도 있는 사람입니까,

 

누군가를 생각하는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거라고 믿어도 되는 겁니까.

 

그 한 사람을 생각하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나는 세상에 뭔가

어떤 식으로든 보탬을 주고 있다고 믿어도 되는 겁니까.

 

나는 뭔가를, 세상에 가져오는 사람입니까 中

 

내가 생각하는 사람, 내가 세상에 줄 수 있는 것, 내가 세상에 가져올 수 있는 것….

 

 

2016.05.19 – 2015.05.23

이병률, 「 내 옆에 있는 사람 」 (달)

 

무구한 눈빛은 사람을 사로잡는다. 그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살고 싶어서 일순간 발바닥에 힘이 들어가기도 한다. 그 눈빛이 내가 잃은 지 오래된 것이기도 하고 그 눈빛으로 내가 씻겨지는 기분마저 들기도 해서 마치 좋은 바람 앞에 서 있는 것만 같은 것이다.

커피를 맛있게 내리는 사람은 커피콩을 갈고 뜨거운 물로 커피를 내리는 동안 그 옆을 떠나지 않는다. 좋은 눈빛으로 주시하고 집중한다. 그런 사람이 내주는 커피는 이미 마시기도 전에 맛있다는 생각을 머릿속 가득 채워준다. 어떻게 보면 그 좋은 눈빛이 커피에 닿아서일 거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음식도 그렇고 일도 그렇고, 좋은 눈빛을 가진 사람은 잘되게 되어 있다. 잘하겠다는 그 마음이 눈빛으로 옮겨가면서 마침내 좋을 수밖에 없는 결과에 힘이 실리는 것이다. 눈빛은 그 사람을 가장 절묘하게 드러내주는 설명서이자 안내서 같다.

(…)

좋은 눈빛에 흔들렸으면 한다. 그것이 살아가는 것이다. 쉬지 않는 눈빛과 마주쳤으면 한다. 그것이 다행한 일이다.

플랫폼에 서서 왠지 모를 두근거림으로 기차를 기다릴 때의 눈빛, 한 번 마주쳤던 것으로 충분히 남아 있는 눈빛, 어느 한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것들과 같이 하고 싶은 것들을 적어나갈 때의 그 눈빛, 호젓한 밤 산마을에서 나뭇잎을 흔들며 마음을 휘젓고 가는 바람 소리 같은 눈빛, 아무한테도 알리면 안 될 것 같은 사랑을 혼자 품기 시작하면서의 눈빛.

 

 인생에 겉돌지 않겠다는 다짐은 눈빛을 살아 있게 한다 中

 

인생을 허투루 살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지닌 눈빛, 누군가를 흔들 수 있는, 올바르게.

 

나와 많이 다른 사람 앞에서는 두렵다. 비슷한 사람하고의 친밀하고 편한 분위기에 비하면 나와 다른 사람 앞에서는 본능적으로 속을 여미게 된다. 그럴수록 나와 같은 사람을 찾겠다면서 여러 시험지를 들이대고 점수를 매기는 게 사람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내가 좋아하는 기준과 중심들을 꺼내놓고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이해하는지 이해 못하는지를 시험하는 것은 참 그렇다. 사람은 저마다 다르고 각자의 박자를 가지고 살며 혼자만의 시력만큼 살아간다.

우리는 그 모두를 겪겠다고 ‘인간 소믈리에’의 자격으로 태어난 것. 남의 ‘다름’을 한낱 ‘이상함’으로 보겠다는 포즈로 살아가는 한 우리는 세상의 여러 맛이 차려진 특급 식당에 입장할 권리를 잃는다.

 

세상의 여러 맛을 보려고 사는 것 같아서 中

 

나랑 비슷하다 착각하고 좋아했던 사람들과, 나랑 다른 것이 무서워 밀어냈던 사람들.

 

우리가 기대는 것은 왜 사람이어야 할까요. 왜 사람을 거쳐서 성장하고 우리는 완성되어야 할까요. 혼자여서 불안한 것은 마땅히 이해되는 불안이지만 옆에 아무도 없어서 불안한 것은 왜 그토록 무서운가요.

나는 세상 모든 관계를 사랑으로 풀려는 사람입니다. 사랑이 밑에 깔려 있으면 안 되는 일이 없고, 얼굴 붉힐 일도 마음 뭉치는 일도 없어지거든요. 일도 사람도 사랑한다고 주문을 걸고 사랑을 앞세우면 일도 사람 관계도 나아지는 것을 수도 없이 목격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지금 당신에게 전달하고 싶은 마음은 그렇고 그런 사랑의 감정이 아니라 인생의 몇 번 올까 말까 한 그런 감정임을 알아주세요.

(…)

가능하면 사람 안에서, 사람 틈에서 살려고 합니다. 사람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닐 것 같아서지요. 선뜻 사랑까지는 바라지 않지요. 사랑은 사람보다 훨씬 불완전하니까요. 아, 불완전한 것으로도 모자라 안전하지 않기까지 하네요, 사랑은.

사람만 보고 살려고 하는데 그것도 어렵지요. 사람 냄새 참 좋은데, 사람 냄새 때문에 사람답게 살고 있는데 결국은 사람 냄새 때문에 골병이 들지요. 결국 우리는 아무도 없는 곳으로 숨으려 하지만 사람이 없는 곳에서의 삶, 그게 어디 가능하기나 한가요. 우리는 사람이 그리워 사람 없는 그곳을 탈출하고 맙니다.

(…)

사람으로 우리는 집을 지어요. 강렬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가져다 뼈대를 짓고, 품이 넓은 사람에 대한 기억을 가져다 지붕을 올리고, 마음이 따뜻했던 사람에 대한 기억을 데려다 실내를 데웁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은 인생의 중심을 받칠 만한 사건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것으로 지은 집은 바람에도 약할뿐더러 곧 녹아 내리지요.

그러니 눈을 감지는 말지요. 그건 세상과 친해지지 않겠다는 이야기니까. 세상은 그런 당신에게 아무것도 보여줄 게 없어요. 아무것도 보지 않겠다고 눈을 감은 당신에게, 세상은 사람한테로 나 있는 계단을 내줄 수 없어요.

(…)

그러니 내가 밑줄 친 사람이 되어주세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감히 당신에게 그어놓은 그 밑줄을 길게길게 이어나갈 것입니다.

 

매일 기적을 가르쳐주는 사람에게 中

 

5월과 6월, 나는 여러 가지로 조금 힘들었다. 그러나 가족과 친구들은 내가 힘든지 알지 못했다. 나는 내가 왜 힘든지 표현하고 설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왜 그럴 수 없는지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분명히 뭔가를 간절하게 말하고 싶어졌고, 뭔가를 절실하게 이해 받고 싶어졌는데, 그 마음만은 선명했는데,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나는 잘 가늠할 수가 없었고 그 누구와도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말의 가벼움과 무심함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말의 솔직하지 않음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말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무서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그 무렵, 나는 처음으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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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6-2016.06.27

이석원, 「 보통의 존재 」 (달)

 

6월 말, 서점에서 「보통의 존재」라는 책을 발견했다. 제목에 먼저 끌렸고, 책 표지가 예뻐서 바로 샀다. 저자 이석원은 밴드 ‘언니네 이발관’의 보컬이자 리더였다. 이름은 들어봤지만 음악을 들어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배경지식도 편견도 없었다. 책의 제목으로 보아, 작가 또한 독자가 자신을 아무 편견 없이 봐주기를 바라는 듯했다. 책을 펴고, 한 장 한 장 차분히 읽어나갔다. 그는 내가 그때까지 만난 작가 중, 누구보다 솔직한 목소리를 전하고 있었다.

 

서른 여덟이 되던 해 생일날, 나는 세잔의 전기를 선물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세잔이라는 위대한 화가가 일생을 통해 구현하려 했다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것’에 대해 강렬한 호기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서 주관성을 배제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는 지극히 주관적인 사람이었고 그러한 점을 당연하게 생각해왔기 때문에 세상의 사물과 사람을 오로지 나의 시각으로 보고 나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생각해왔던 것이다. 그러니 세상의 모든 것들은 내게 필요한 것과 아닌 것, 내가 관심 있는 것과 아닌 것으로 나눠질 수밖에 없었고, 내 편인 사람과 아닌 사람으로 구분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주관성이야말로 나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라 생각했다.

 

그런데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라니. 도대체 왜? 나는 의문에 빠졌다. 그리고 알고 싶었다. 태어난 날,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물음을 선물 받았다.

 

세잔 中

 

작가는 나에게 무언가를 ‘말해주려’ 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 안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말하고’ 있었다. 

 

인생이라는 바다 위를 표류하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구원을 꿈꾸기 마련인데 나에겐 그것이 ‘여행과 책’ 두 가지였다. 난 좀처럼 내 의지로 여행을 가본 적이 없는 사람으로 작업을 위해 스물여섯 살 때 런던에 가보고 역시 일 때문에 일본의 몇몇 도시를 찾았던 것 빼놓고는, 순수하게 여행이라는 것을 떠나본 적이 별로 없이 살아왔다. 여행에 대한 의지 자체도 그다지 없었던 데다가 집 떠나서는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이것저것 가리는 것도 많아서 그랬던 것 같다.

또 서점을 그렇게 좋아했으면서도 막상 책은 거의 읽지 못하는 희한한 습성을 갖고 있는 바람에 오죽하면 서른네 살이나 먹어 다짐했던 목표가 ‘여행과 책 읽기’였을 정도이다.

 

구원 中

 

자신의 꿈에 대해서 말하면서, 꿈을 좀처럼 실천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도 덧붙여 말한다. 그런 이야기 방식이 좋았다.

 

누구나 자신에 대한 기대라는 것이 있고 그것이 실제로 오르기 어려운 산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세월이 필요하다. 그 깨달음을 스물다섯에 얻는다면 그건 바보 같은 일일 것이고, 서른이라 한들 속단이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마흔 언저리쯤 되면 반드시 포기하고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온다. 그때가 되면 마지막 몸부림도 쳐보고 온몸으로 거부도 해보지만 결국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확인이다.

자신을 안다는 것. 그 잔인한 일 말이다.

 

어느 보통의 존재 中

 

그는 자신에 대해 적나라하게 아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실제로 그 고통을 느끼고 있는 중인 듯했다.

 

어렸을 때부터, 이상하게 대화를 하게 되면 난 항상 내가 정말로 관심 있고 얘기하고 싶은 건 들어줄 만한 친구가 없었고 마찬가지로 친구들의 이야기도 내게 관심 밖의 것들이었어요. 그것은 나이를 먹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생각이 비슷하고, 공통의 관심사를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처럼 어려운 일이었죠. 그래서 늘 고민했던 것은 나는 어떤 부류에 속하는 사람인가, 나와 동류의 사람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친구가 없어요 中

 

내가 그때 느끼고 있던 마음과 같았다.

 

타인을 사귈 때에 그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어떤 동기에서 동력을 받아 행해지게 될까. 고통이란 매우 강력한 사랑의 촉매제로 작용한다. 자신을 평화롭게 하는 이에게는 결코 간절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고통으로 자극받게 되면 엄청난 정열을 품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고통은 지극한 이해를 부르기도 한다. 잘못은 상대방이 했는데 정작 나는 어떻게든 상대방의 행동을 이해하고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나 자신을 설득하고 나 자신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상대로 인해 생겨난 분노의 감정이 상대방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과 판단을 바꿔놓는 이 아이러니. 바로 고통의 힘이다.

 

이해 中

 

이해. 누군가를 이해하고, 동시에 누군가에게 나를 이해시키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된 이상, 난 이런 유의 고통에 이미 다가서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두려웠다. 내가 어디까지 견딜 수 있을까,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고통이 내 역량으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어느 수준에 다다른다면, 나는 이해하기를, 이해받기를, 포기하게 될까.

 

2016.06.30-2016.07.02

이석원, 「 언제 들어도 좋은 말 」 (그책)

 

그는 「보통의 존재」를 출간한 후 6년 뒤에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이라는 산문집을 냈다. ‘이야기산문집’이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그 사이에는 「실내인간」이라는 소설을 한 권을 썼는데, 집필 과정 속에서 글 쓰는 일에 대한 깊은 고뇌를 겪은 듯했다. 그 시간을 거친 이후에 쓴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은 표면적으로는 연애 이야기를 줄기로 삼고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글쓰기에 대한 책인 것 같았다. 그에게 글이란 게 무엇인지, 아주 열심히, 간절하게, 설명하기 위한 책. 내 느낌은 그랬다.

 

 

소설을 읽을 때 뚜렷한 이야기나 재미 없이도 글이, 즉 문체가 마음에 들면 몇 날 며칠이고 읽어 내려갈 수 있듯, 누군가의 목소리나 말투 같은 것들이 마음에 들면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유별나게 재밌거나 대단한 것이 아니어도 계속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은 비슷한 이치이다. 이미 내용과는 상관없는 단계로 돌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목소리와 말투를 좋아하는데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확률은 그리 크지 않다.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p.228

 

그는 책을 읽듯이 사람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됨됨이

 

누군가 나로 인해 상처받았을 때

내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과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그의 상처에 집중하는 사람 중

나는 어느 쪽일까.

어느 쪽이어야만 할까.

p.282

 

사람은 상처를 남기고,

 

영혼의 짝을 기다리고 진정한 친구를 찾아 헤매던 날들이

내게 보상해준 것은 무엇일까.

나의 결핍은 친구나 가족, 연인이 메워줄 수 없다.

그들은 나의 결핍을 채워주기 위한 존재가 아니며

그들 자체로 각자의 결핍을 스스로 메워가야 하는

독립적인 존재들일 뿐이다.

p.316

 

다시 혼자가 된 나를 남긴다. 다만, 그 전과는 조금 달라진 혼자. 한 사람을 만나고 떠나 보낸 그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깨닫는다.

 

미처 생각 못하고 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내가 장편 소설을 쓴 뒤 근 일년을 글이라곤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실은 길든 짧든 나는 뭔가를 거의 매일 쓰고 있었던 것이다.

일기장에, 노트에, 하다못해 블로그에.

아마도 책에 실을 만한 게 아니라는 이유로, 나는 그것들을 별 것 아닌 걸로 치부하고는 썼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엄연히 나는 곳곳에 매일 똑같은 고민일지언정 내가 내 일을 찾기를 얼마나 바라는지를 절절히 기록하고 있었고, 물론 쓸데없는 것들도 많아서 그야말로 메모 수준의 하찮고 짧은 글 조각들도 많았지만, 아무튼 계속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글을 쓰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러는 사람들이나 쓰는 게 글이라고 자조 섞인 부러움을 표하던 나의 내면의 뭔가를 일깨우는 바가 있었다.

(…)

그날 밤, 나는 나도 모르게 써 온 일기장 곳곳에 내가 경구처럼 적어놓은 문구 하나를 마음속에 새기며 잠이 들었다.

바라고 또 바라고 포기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p.336-338

 

책 뒤에 짧은 글 몇 조각이 딸려 있었는데, 그 중 글쓰기에 대한 그의 생각에 대해 늘어놓은 글이 있었다. 그는 하루라도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 쓰는 것이 글이고, 그 마음만 있으면 조금이라도 자신이 원하는 글에 가까워지는 게 아닐까, 그 믿음을 가지고 계속 글을 쓸 수 있다면 재능에 준하는 무기를 가진 것이 아닐까, 라 했다. 그의 글을 읽고 언젠가 나도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용기가 느껴졌다. 어쩐지 나한테도 그런 비슷한 마음이 있는 것 같은데,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나도 나만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지 않을까. 일기장에 쓸 법한 이야기들을 책으로 써서 출판한 그의 용기에 감사했고, 누군가에게 진솔하게 말을 걸고 싶어하는 그만의 간절한 마음을 느끼게 해주어 고마웠다. 마지막은, 책 뒤에 딸려 있던 글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와 닿았던 글이다. 

 

 

여러 사람이 모여 있을 때 가장 말이 없는 어떤 사람이 실은 가장 많은 말을 하고 있다고 느껴질 때면, 난 그 사람에게 집중하게 된다. 좌중이 다들 즐거워 시끌벅적 하고 있는데 구석에서 혼자 술을 들이켜는 사람은 분명 그 자체로 엄청난 말을 걸고 있는 것일 테니까. 물론, 반대로 가장 열심히 말을 하는 사람이 가장 침묵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많다.

 

열심히 떠들고는 있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를 때. 한마디도 하고 있진 않으나 안에서는 수없이 많은 말들을 뱉고 있을 때. 어쩜 그런 나를 보면서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눈치를 채 줄까? 내가 지금 진짜로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 실은 내가 지금 자기한테 얼마나 많은 말을 걸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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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계속 생각했다. 나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사람들에 대해서도, 세상에 대해서도 매일 매일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포기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생각한 것들을 전해보려고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원하는 방식의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왜 그런 거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하냐고, 생각 좀 그만하라는 말도 간혹 들었다. 내가 학교에 다니고 있지 않으니 심심하고 시간이 많아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거라는 식의 말도 들었다. 화가 났지만, 그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내가 틀린 것도 아니고, 그들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다를 뿐이었다. 나는 무언가를 느꼈고, 그래서 생각을 한 거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것을 느낀 적이 없었고, 그래서 왜 그런 생각을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거다. 나는 사람과 사람의 다름이란 게 무엇인지, 생각이 아니라 감정으로, 몸으로, 아픔으로, 생생하게 깨달았다. 고통에 부딪칠 때마다 나는 다시 겁을 먹고 생각의 벽 안쪽으로 기어들어갔다. 사람과 사람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걸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완전한 소통은 불가능한 것일까. 나는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마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해 받고 공감 받고 싶은 마음이 강해질수록 나는 이상한 사람이 되었고, 외로움의 덩어리만 더 커졌다. 수렁이었다. 말은 어긋남을 불러왔고, 어긋남은 슬픔을 불러왔고, 슬픔은 고독을 불러왔고, 고독은 깊은 공허감을 불러왔고, 그 깊은 공허감은 나를 어딘가로 서서히 끌고 내려갔다. 나 말고 아무도 없는 곳, 아무도 새로이 만날 수 없는 곳, 세상에서 가장 어둡고 무서우리만치 고요한 곳,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나는 아주 아주 오랜만에, 바닥 가까이로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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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과의 재회였다. 그곳에 마음이 닿은 것은 아주 잠시였다. 그곳에 닿은 순간, 얼핏, 나는 죽음을 보았다. 여기에 발을 오래 디디고 있으면, 진짜로 죽고 싶어질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여기가 생각의 끝일 수는 없다고, 여기가 내 목적지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향을 바꿔 다시 위로 올라왔다. 어둠은 멀어졌고, 마음은 서서히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바닥에 닿았을 때의 기억은 내 안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그 전, 그러니까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는, 바닥에 떨어질 위기에 처해도 힘들고 무섭다는 막연한 감정을 어렴풋이 느꼈을 뿐 그것의 존재를 생각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했었다. 난 스물 세 살이 되어 처음으로 그것의 존재를 ‘알고 받아들이게’ 된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무서웠다. 하지만 확실했다. 나는 그것에 잡아 먹히고 싶지 않았다. 살고 싶었다. 나에게는 지켜야 할 것이 생겼으니까. 나는 카카오톡 상태 메세지에 ‘生’이라는 한자를 적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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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닥으로 다시 끌려 내려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후로 무언가를 지나치게 느끼지 않으려고, 지나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조심했다. 느낌과 생각을 틀어막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위험한 수준까지 가지 않도록 해야 했다. 여름이 도움을 주었다. 마침 그 해 여름이 아주 더웠다. 뜨거운 무더위에 몸이 힘들어하니 감정이 절로 둔감해졌다. 나는 감정 안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고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남은 여름을 지냈다. 건축에 대한 고민들을 다시 조금씩 떠올리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고 편안한 건축에 대한 생각을 했다.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삶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그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학원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뉴욕 행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시기는 17년 2월. 가까운 날짜의 표는 이미 너무 값이 올라서 학기를 지낸 후 내년 겨울에 가기로 한 것이었다. 어느새 8월이었다. 1년의 공백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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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알게 된 이후, 나는 그것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했던 모든 노력에 의미를 거두게 되었다. 중학교 1학년 때처럼 주변 아이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중학교 3학년 때처럼 목표에 매진하는 것, 고등학교 때처럼 주어진 일을 착실하게 해나가는 것, 대학교 때처럼 좋아하는 일에 빠져드는 것…. 그 모든 시간들은 분명히 나에게 기쁨과 행복, 성취감, 소중한 인연들까지 많은 것들을 가져다 주었지만 나를 바닥으로부터 구원해주지는 못했다. 그 동안 나는 여러 가지 면에서 현명해졌고 강해졌지만, 그 바닥을 두려워한다는 점에 있어서 만큼은 그대로였다. 바닥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흐름이 어쩌다가 나를 다시 바닥으로 데려왔는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그것으로부터 더 이상 도망치지 않는 것, 그것으로부터 삶의 의지를 지켜내는 것이 지금 나에게 닥친 과제인 것 같았다. 다른 유의 성장을 시작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나는 새로운 흐름의 시작 앞에 섰다. 그리고 곧 내가 이 길을 혼자 헤쳐나가는 동안에 무엇을 길잡이별로 삼아야 할지 깨달았다. 바로 사람이었다. 사람을 만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