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환학생 생활을 하게 될 이탈리아 토리노에 도착하기 전, 10일간 첫 혼자 여행을 했다. 여행지는 덴마크 코펜하겐과 독일의 베를린. 여행 중 썼던 일기의 일부를 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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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0
코펜하겐
코펜하겐에 무사히 도착했다. 숙소에 도착하니 피로가 몰려오고 그와 함께 외로움도 몰려온다. 낯선 곳에 혼자 존재하는 것으로 인한 외로움이다. 생소한 외로움이다. 이제 한국에서는 학교든 길이든 혼자 있을 때 전혀 외롭지 않은데. 외로움에는 사람이 없어서 생기는 외로움뿐만 아니라 장소가 낯설어서 생기는 외로움도 있는 걸까. 한국에서는 혼자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는데, 지금은 잘 즐겨지지 않는 것 같다. 외로움을 달래려고 친구들, 가족들과 연락을 했다.
혼자 낯선 거리를 걷는 기분은 참 이상하고 새롭다. 언니와 함께 여행할 때랑은 또 다른 느낌이다.
(언니와 했던 여행을 회상하며,) 여행을 할 때의 소소한 대화가 일상 속에서의 대화보다 더 즐거운 이유는, 오늘과 현재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지금 무엇이 보이는지, 지금 무엇이 들리는지, 오늘 무엇을 할지, 오늘 무엇을 볼지, 방금 종업원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방금 어떤 차림새의 사람이 지나갔는지, 그 사람이 어떤 노래를 흥얼거렸는지…. 일상에서의 우리는 서로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고 미래에 대해 걱정하느라고 그 순간의 현재를 의미 없이 흘려 보내곤 한다. 조금 더 행복할 수 있었던, 조금 더 특별할 수 있었던 수많은 ‘지금’들을 나는 얼마나 많이 흘려 보내고 놓쳐 버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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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1
코펜하겐
날씨가 정말 예술이다.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날씨다. 하루 만에 이 도시가 조금 익숙해진 건지, 어제의 두려움 섞인 두근거림과는 다른, 설레는 두근거림이 느껴진다. 행복하다. 이 날씨에 이 곳을 자유롭게 거니는 그 자체가.
뉘하운 항구는 정말 아름다웠다. 단지 보기에 예쁜 것이 아니라, 그 장소를 즐기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물길을 따라 나란히 서 있는 색색깔의 건물들, 그 앞에 즐비하게 늘어선 노천 테이블에서 여유롭게 수다를 떠는 사람들.
아말리엔보르 궁전에서 바닷가를 따라 쭉 걸어서 카스텔레트 요새가 있는 곳까지 왔다. 낮이 되자 바람의 시원함이 햇빛의 뜨거움을 이기지 못한다. 좀 더워졌다. 걷는 사람이 꽤 많다. 관광객도 있고, 산책 나온 사람도 있고…. 아름다운 공원이다. 한없이 푸르고 한가로운. 왼쪽은 녹음, 오른쪽은 바다라니, 이보다 걷기 좋은 길이 있을까.
SMK 내셔널 갤러리. 미술관에 오니 마음이 안정된다. 빨간 벽돌, 흰 벽, 유리가 서로 잘 어울린다. 전시실 하나가 너무 마음에 든다. 방 안에 큰 창이 두 군데 있는데, 창 밖으로 보이는 두 개의 장면이 마치 액자 속의 그림인 양 방 안에 전시되어 있는 조각과 함께 어우러졌다. 잊지 못할 장면이었다. 그 외에도 여기 저기 좋은 공간들이 많았다. 정신 없이 보던 중에 미술관 닫을 시간이 되어버려서 다급하게 직원에게 빨리 나가는 길을 물어봤는데 너무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사람들이 친절하니 아무거나 편하게 물어볼 수 있어서 좋다. 나오는 길에 마주친 푸른 녹음이 가득하게 보이는 거대한 창도 인상적이었다. 잠깐 보고 지나치기 아쉬운 장면. 이 미술관은 정말, 시간이 남는다면 다시 와서 더 꼼꼼히 살펴보고 싶다.
로젠보르크 성 건너편에서 사진을 찍으려는데, 마침 그 사이를 지나가는 버스 운전사가 사진 찍는데 방해해서 미안하다는 듯이 손을 흔들며 활짝 웃었다. 버스 운전사가 이런 배려를 해주는 건 진짜 처음이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생각지 못한 친절에 자꾸 행복해지는 코펜하겐이다. 저들이 나에게 친절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행복하기 때문이겠지. 청소부든, 미술관 직원이든, 버스 운전사든, 미소가 얼굴에 배여 있다. 행복한 사람은 잠깐의 친절, 잠깐의 미소만으로도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준다. 나도 행복해지고 싶다. 저들처럼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장소와 친해지니 외로움이 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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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2
코펜하겐
캐널 투어 중. 여기 사람들은 굳이 휴양지에 가지 않아도 휴양지에 있는 것처럼 사는 것 같다. 수영복 입고 보트를 타면서 놀고, 둥둥 떠 있는 배 위에서 책을 읽고, 대문 앞에 간이 의자를 내놓고 햇빛을 느끼면서 샐러드를 먹고, 남녀노소 할 거 없이 자전거를 타고 씩씩하게 질주해 다닌다. 갑자기 내가 너무 소극적인 사람처럼 느껴진다. 내가 여행자고, 그들이 여기 사는 사람들인데, 어찌 처지가 반대 같다. 역사나 건축이나 예술보다도, 사람들이 사는 모습 자체가 매력적인 도시다. 삶의 모습 한 장면 한 장면이 아름다운 풍경을 이룬다. 인위적인 느낌이 없다. 자연스럽고, 생동감이 넘친다. 가족들끼리 노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가족, 친구들 생각이 많이 난다.
2015.08.23
코펜하겐
두 번째 캐널 투어. 어제보다 날씨가 훨씬 시원하다. 오늘은 배 음악을 들으면서. 음악을 들으며 배를 타니 천국이 따로 없다.
앞으로는 여행 중 음악을 자주 들어야겠다. 평소보다 음악이 더 자세히 들린다.
어떤 건축가가 디자인했다는 해변가의 데크를 보러 바닷가로 왔다. 바닷가에 거의 다다르자 넓은 잔디밭이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잔디밭 위에 앉거나 누워 있었다. 역시나 수영복 입은 사람들이 많다. 사람이 많아서 데크의 모양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무척 잘 이용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디자인한 공간이 이처럼 자연스럽게 도시의 일부가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특별한 기억을 만들고 간다면, 건축가로서 정말 행복한 일이 아닐까? 누군가의 삶의 일부, 추억의 일부가 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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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4
코펜하겐에서 당일치기로 말뫼
코펜하겐은 아무래도 수도인지라 활기차게 북적이는 느낌이 있었는데, 말뫼는 좀 더 한적한 시골의 해안도시 같은 느낌이다. 오늘은 날씨가 흐려서 공기가 차갑고 으슬으슬하다.
걷다 보니 엄청나게 거대한 공원이 나타났다. 처음 보는 종류의 커다란 나무들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고, 그 사이로 물이 흐른다. 아마도 바다에서 흘러 들어온 물. 안 그래도 주변에 초록색 나무들뿐인데 비까지 세차게 내리니 물에서도 녹색 빛만 튕겨져 나온다. 그야말로 온통 녹색이다. 심지어 난간과 울타리, 가로등, 이정표, 휴지통, 벤치도 다 녹색이다. 청둥오리를 비롯해 크고 작은 새들이 무리를 지어 헤엄치고 있다. 나무들이 하도 커서 주변의 건물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잠깐 다른 세상에 들어온 것 같다. 물가를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도 우산을 쓰는 사람이 거의 없다. 조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많았다. 꽤 오랫동안 공원 안을 배회했다. 맑은 날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다.
가구 가게를 구경하고 나오니, 거짓말처럼 파란 하늘이 나와 있다. 기분이 좋아졌다. 스트뢰에 광장을 지나 성 피에트로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바깥에서 본 모습은 평범했는데, 내부가 정말 아름다웠다. 기둥과 벽, 천장이 모두 깨끗하고 부드러운 하얀색으로 칠해져 있는 아담한 성당이었다. 너무 하얘서 약간 결혼식장 같기도 한데, 부담스럽지 않게 소박하고 예뻤다. 창은 희미하게 색감이 도는 반투명 유리로 되어 있었다. 흰 벽과 잘 어울렸다. 밖으로 나와 성당의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고딕 성당들은 뒷모습이 참 예쁘다. 날씨가 이렇게 좋아졌으니 아까 그 공원에 다시 가지 않을 수가 싶다.
날이 좋아지니 낮에 말뫼에 도착한 순간 느꼈던 을씨년스러움이 싹 가셨다. 평화롭고 아늑하고 따뜻한 도시가 되었다. 날씨 때문에 울고 웃는 하루다.
혼자 여행을 하면 내가 보냈던 시간들이 어쩐지 약간 꿈같다. 내가 그곳에 존재했다는 것, 내가 그곳에서 무언가를 경험했다는 것을 증명해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나 자신밖에 없다. 그래서 더욱 순간 순간을 오롯하게 기억하고 싶다. 잊어버리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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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5
코펜하겐에서 베를린으로 이동
(코펜하겐 카스트럽 공항에서,) 여행 초반에 내 외로움이 자극되었던 건, 출발할 때의 시간이 밤이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인천 공항에서 밤 늦은 시간에 출발했고, 경유지인 두바이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이었다. 처음으로 혼자서 모든 것을 해내야 하는 상황에서 맞은 밤….
베를린 숙소에 도착했다. 짐을 풀고 간단히 계획을 세우고 오랜만에 친구들과 연락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베를린 필하모니 공연을 예매했다. 자기 전에 곡 예습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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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6
베를린
완전 완전 여유로운 아침이다. 구름이 살짝 두텁지만, 방에 햇살이 꽤 잘 들어온다. 여행 비수기인가보다. 숙소에 사람이 나밖에 없는 듯했다. 핸드폰으로 음악을 틀어놓고 편하게 아침식사를 했다. 그러고 나서 부엌에서 누군가 놓고 간 듯한 믹스 커피를 발견해서 방에서 커피를 마시는 중이다. 따뜻한 햇볕, 새하얀 침대, 커피, 그리고 오케스트라 선율…. 굳이 나가서 여행을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이 순간이 좋다.
카이저 빌헬름 교회. 전쟁의 흔적. 우리나라도 전쟁을 겪은 지 70년이 채 안 됐고 심지어 지금도 휴전중이지만, 나는 아직 전쟁이 무엇인지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 전쟁, 그것이 실제로 어떤 괴로움이었을지,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겪은 사람들은 어떤 두려움을 느끼며 사는지. 인간의 욕심으로부터 발사된 폭격으로 아름다운 교회의 탑이 붕괴되는 모습을 목격한 베를린 시민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현재의 욕심 때문에 도시와 역사가 파괴되었을 때의 그 심정은….
국회의사당 건물. 우리나라의 국회의사당 건물과 얼핏 비슷하지만 규모와 디테일 면에서 퀄리티가 압도적이다. 놀라웠다. 바람에 휘날리는 국기의 모습마저도 압도적이었다. 구겨지거나 접히지도 않고 그렇게 웅장하고 멋지게 휘날리는 국기는 처음 봤다.
소니 센터. 어떤 사람과 진정으로 친해지려면 단 둘만의 시간을 거쳐야 하듯, 장소와 친해질 때에도 장소와 나 둘만 있는 것이 좋다. 사람도 둘이 아닌 셋이 만나면 A에 대한 나의 생각이 B의 A에 대한 생각에 영향을 받아 A에 대한 나만의 솔직한 느낌을 갖기가 조금 어려워진다. 혼자 다니니 각각의 장소들과 진실하고 솔직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각 장소에 대해 느끼는 모든 감정들이,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은 순수한 내 느낌이라는 것이 좋다.
베를린 필하모니 건물, 성 마태 교회, 그리고 베를린 신국립미술관. 서로 섞이거나 맞추려는 노력 없이 각자의 개성을 더 분명히, 명확히, 강렬하게 드러내면서 한 장소에 공존하고 있다. 근데 그 모습이 조화롭다.
베를린 돔 앞 잔디밭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떤 남자애가 말을 걸어왔다. 나도 대화가 고팠던지라, 인사를 주고받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여행과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성격이나 취미에 대한 대화도 조금 했다. 그 애는 내가 베를린에서 갔을 만한 곳을 거진 다 맞추고는, 그곳들이 전형적인 관광지라며 살짝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약간 불만이었다. 내가 여행 초보이기는 해도 그렇게 수동적인 관광객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었지만, 영어로 그 뜻을 전달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름대로 흥미로운 대화였다. 사람에게 다가가거나 대화를 이끌어가는 방식이 한국에서 만난 사람들과 조금 다르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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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7
베를린
어제의 대화를 곱씹어본다. 여기서는 자유롭고 목적 없는 삶이 일반적인 걸까. 부러웠다. 그 애는 나이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았는데도, 여러 나라를 다니고 여러 가지 것들을 배우며 살아온 것 같았다. 정해진 목표를 정하고 그에 맞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개념이 별로 없는 듯했다. 나도 내 나름대로 정답을 찾는 삶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애에 비해서는 여전히 틀에 갇힌 모범생인 것 같았다. 내가 ‘아마 지금이 내 인생에서 제일 행복하고 자유로운 시기일걸, 일을 시작하면 힘들고 바빠서 이런 여행을 할 날도 없을 거야’ 라고 했더니, ‘너한텐 일이 그런 거야? 일하는 게 기대되지 않는 모양이네?’ 라고 대답했다. 순간 얻어맞은 것 같았다. 나는 교환학생, 휴학 기간이 끝나면 다시 학교를 다녀야 하고, 졸업한 뒤에는 일을 시작해야 할 거고, 회사원이 되면 지금보다 힘들 거고 자유도 없어질 것이다, 라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정해진 단계를 밟아 나가는 것이 맞는 걸까, 나는 과연 내가 원하는 삶 위에 있는가…. 교환학생 기간 동안 잘 생각해봐야겠다. 교환학생 생활마저도 우리나라 학생들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의 정답이 있는 것 같다. 외국인 친구를 사귀어야 하고, 그들과 함께 파티에 가서 놀아야 하며, 영어가 많이 늘어야 하고, 쉬는 날에는 여행을 해야 하는. 이런 평범한 교환학생 생활을 하기 싫다는 생각이 든다. 이 시간, 이 장소에서 나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그게 뭘까.
며칠 간의 여행으로 인한 피로가 덮쳐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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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8
베를린
숙소에 나 말고 사람이 생겼다. 어제 내가 일찍 들어와 잠들어서 인사를 못한 탓에, 잠에서 깨자마자 갑작스레 인사를 하게 됐다. 활발한 성격의 여자분이었다. 인사를 나누자마자 어제 밤에 방에서 시끄럽게 굴었던 파리 얘기부터 시작해, 여행 얘기, 일 얘기 등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동안이시라 처음엔 학생일 줄 알았는데 회사원이셨다. 디자인 회사에 다니시는데, 회사에서 욕을 먹고도 휴가를 길게 내서 독일로 여행을 오셨다고 했다. 넓은 숙소에 혼자 있으려니 밤마다 약간 으스스했는데 사람이 생겨 기뻤다.
바우하우스 아카이브. 순수하게 예술의 혁명과 번영을 위해서 지적 미적 욕구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바우하우스라는 비영리 단체를 만들었고, 그것이 수십 년 동안이나 이어졌다는 것이 대단하다. 학문이 직업과 돈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지는 요즘 사회에서도 이런 집단이 생길 수 있을까?
독일 국립 역사 박물관. 상설 전시장에서 독일 역사에 대한 내용을 훑고, 위층에 있는 기획전시 중 호모섹슈얼리티에 대한 전시를 둘러보았다. 성에 대한 편견을 다룬 전시로, 옛날부터 지금까지의 성 역할과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정리되어 있었다. 여성에 대한 편견을 거부하고 적극적인 삶을 살고 싶어했던 여성 정치인들의 이야기도 있었고, 그리스 신화 속 ‘헤르마프로디테’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의 자식으로, 한 몸에 여성성과 남성성을 동시에 지닌 존재) 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베를린 필하모니. 연주자들이 부럽다. 항상 공연을 볼 때면 내가 돈을 내는 사람은 나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더 행복해 보이고 그들이 더 즐거워 보인다. 음악가가 직업이라는 게 부러웠다. 일의 대가로 돈만 받는 게 아니라, 감동에 겨운 사람들의 박수를 받는다는 게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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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9
베를린
어젯밤 숙소에서 만난 언니와 얘기를 하느라 거의 새벽 3시 반이 다 되어서 잠들었다. 디자인과를 졸업해 디자인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언니라 디자인 일을 한다는 점에서 공감되는 바가 많아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베를린에 대한 이야기. 인종차별은 아직 좀 있는 것 같지만, 장애우나 동성애자들이 굉장히 자유롭게 다니는 것 같다는 얘기를 했다. 스스로가 소수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남의 눈치를 보지 않으며, 타인을 당당한 태도로 대하는 것 같았다.
카이저 빌헬름 교회의 예배당 안. 8각 기둥 모양의 신식 건물이다. 8면이 전부 파란색의 스테인드글라스로 되어 있어, 내부가 검푸른 빛으로 가득 차 있다. 예수 십자가상 맞은편 조금 위쪽에는 커다란 오르간이 있고, 연주자가 곡을 연주하고 있다. 의자에 앉아 한참 동안 연주를 들었다. 신앙심이 생길 뻔했다.
유대인 박물관. 홀로코스트 타워 안이다. 약간씩 기울어진 검은 벽들로 둘러싸인 엄청난 높이의 공간이다. 찌그러진 사각형 모양의 천장 가장자리의 매우 좁은 틈으로, 빛이 겨우 새어 들어온다. 그냥 거리를 거닐 땐 당연하게 여겨지던 빛이 여기서는 더 밝고, 더 멀고, 더 신비롭다. 내가 빛에 더 다가가려 할수록 빛은 더 멀어지는 듯하다. 불안감이 느껴진다.
아직 유대인 박물관. 이번엔 콘크리트로 된 직육면체 기둥들이 가득히 서 있는 정원이다. 기둥은 크기가 모두 동일하며, 모두 같은 각도로 기울어져 있다. 사람이 그 사이를 지나다니게 되어 있다. 바닥은 전체적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으며, 그 때문에 발걸음 하나 하나가 평소보다 무겁다. 다리에 충분히 힘을 주지 않으면 몸이 기둥에 부딪쳐 버린다. 기둥 사이로 동네가 보이고 위로는 하늘이 보이는데, 어쩐지 실제보다 조금 더 멀어 보이고, 약간 비현실적이다.
(인종차별적인 행동을 몇 번 겪고 나서) 유럽에 그저 여행하러 온 것이 아니라 잠시 살러 온 것이다 보니, 아무래도 바운더리 같은 게 느껴진다. 국적이나 인종으로 판단 받는 것은 처음이다. 건축을 볼 때도 그들의 세계와 나 사이의 거리가 느껴진다. 이전에 나는 내가 건축을 전공하고 있으니 건축의 세계에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했고, 유럽 곳곳의 건축물이 건축이라는 세계 속에 나와 함께 공존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은 이곳의 건물들이 베를린의 것이고, 독일의 것이며, 나는 이들의 세계 바깥 어딘가에서 온 이방인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 건물들과 나는 과연 같은 세계 속에 있는 것이 맞을까? 이들의 도시와 그 역사에 대해 알지 못하는 내가, 그저 건축을 전공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 건물들에게 섣불리 말을 걸 수 있는 것일까. 나와 세계의 거리는 생각보다 아주 멀다. 나 자신이 작게 느껴진다.
슈프레 강을 따라 걸었다. 저녁이 되자 서쪽 하늘이 은은한 무지개 빛으로 물들고 있다. 하늘의 색깔이 그대로 강물에 비친다. 걸으면서 오랜만에 길게 생각에 잠겼다. 이제 진짜로 새로운 생활의 시작이다, 한국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바쁜 현실을 탈피해 행복할 거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여기 또한 새로운 현실일 것 같다, 잘 지낼 수 있을까, 외롭지는 않을까, 난 과연 여기 오기 전 꿈꿨던 것처럼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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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혼자 여행 끝. 비행기를 타고 이탈리아로 향했다. 5개월 동안 살게 될 집과, 다니게 될 학교와, 함께 할 사람들을 만나러. 긴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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