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
베른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리스본으로.
월요일 아침, 그레고리우스는 취리히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동틀 무렵에 잠이 깬 그는 지금 길을 잃고 있다고 생각했다. 먼저 잠에서 깨어난 다음 중립적인 각성 상태에서 한 생각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먼저 생각이 들었고, 그다음에 의식이 깨어났다. 이 특이하고 투명한 각성은 그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것이었다.
_ 영원한 젊음. 젊은 시절 우리는 우리가 불멸의 존재라고 생각하며 산다. 죽을 운명이라는 인식은 종이로 만든 느슨한 끈처럼 우리를 감싸고 있어 피부에 거의 닿지 않는다. 인생에서 이런 상황이 바뀔 때는? 이 끈이 우리를 점점 휘감아 오고 마지막에는 목을 조일 듯하는 건 언제인가? 절대 느슨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부드러우면서도 굽히지 않는 압박을 느끼는 때는 언제인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서 이런 압박을 깨달을 수 있는 징후는 무엇인가?
그레고리우스는 다시 익숙한 장소에 있고 싶어 이곳으로 돌아왔다. 포르투갈어나 프랑스어나 영어를 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캐기의 편지가 왜 이 계획을,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이 계획을 갑자기 어려워 보이게 만들까? 부벤베르크 광장으로 내려가려면 밤이 좋겠다는 생각이, 왜 아까 기차에서보다 지금 더 절실하게 드는 것일까?
한 시간 뒤 광장에 섰을 때 그는 더 이상 그곳에 발이 닿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기가 생각해도 이상한 느낌이었지만, 현재 심정을 완벽하게 나타내는 표현이었다. 그는 부벤베르크 광장에 더 이상 '접촉'할 수 없었다.
거리뿐 아니라 광장 전체가 그에게 수십 년 동안 친근감을 주었지만, 이 거리와 건물들과 불빛과 소음은 그에게 도달하기 위한 아주 좁은 마지막 틈을 넘어서는 데 실패했다. 그에게 완벽하게 도달하기 위해,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그가 아주 잘 알고 있는 대상일 뿐 아니라 예전에는 언제나 그랬듯이 - 지금 실패하고 나서야 인식하게 된 - 그 자신이었음을 기억나게 하기 위해 넘어야 할 틈을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설명할 수 없는 이 끈질긴 틈은 그를 보호해주지 못했다. 틈은 완충 장치나 적당한 간격이나 느긋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를 공황 상태로 몰아넣었다. 스스로를 다시 발견하기 위해 불러오려던 친숙한 사물들이 이제 그 스스로를 잃게 만든다는 공포, 여기서도 아침 여명이 트는 리스본에서와 똑같은 일을 겪는다는 공포가 몰려왔다. 그러나 리스본 뒤에는 베른이 있었지만, 잃어버린 베른 뒤에는 더 이상 다른 베른이 없었으므로 지금 느끼는 공포는 더 불안했고 무척이나 위험했다.
_ 우스꽝스러운 무대. 우리가 중요하고 슬프고 우습고 아무 의미도 없는 드라마를 상연하기를 기다리는 무대로서의 세계. 이런 생각은 얼마나 감동적이고 매혹적인가, 그리고 얼마나 불가피한가!
그레고리우스는 교실에서 나오면서 이곳이 왜 이렇게 이상하게 느껴지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는 지금 복도와 자신의 내부를 그 옛날의 학생 신분으로 거닐었고, 수십 년 동안 선생으로서 복도를 오간 사실을 잊었던 것이다. '과거의 나'가 '현재의 나'를 잊을 수 있을까? '현재의 나'가 '과거의 나'의 드라마를 상연하는 무대 역할을 한다고 해도? 망각이 아니었다면 그건 무엇이었을까?
잠자리에 들기 전, 그레고리우스는 포르투갈 어학 CD를 들으며 이스파한에 있는 모스크의 사진을 보았다. 그는 리스본에서도 베른에서도 실패했고, 그리고 어떤 장소에서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더 이상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잠들었다.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의 책을 꺼내들고, 2주 전처럼 블라인드를 내리고 식탁에 앉아 책을 읽었다. 포르투갈 귀족이 파란 집 다락방에서 쓴 글이, 베른도 아니고 리스본도 아닌 올바른 장소에 있도록 도와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_ 내적인 넓이. 우리는 지금 여기서 산다. 예전에 다른 곳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과거다. 대부분은 잊어버렸고, 남아 있는 작은 부분들도 무질서한 기억의 파편들일 뿐이다. 단편적인 우연 속에서만 빛을 내다 사라지는 기억들…….
그러나 자신의 내부라는 관점에서 보면 상황은 아주 달라진다. 이 경우 우리는 현재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고, 과거로 깊숙이 들어간다. 이런 일은 깊은 감각, 다시 말해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라는 느낌은 어떤 것인지를 결정하는 감각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이 감각은 시간을 초월하고, 시간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난 늘 그곳에, 먼 시간의 저편에 있다. 결코 그곳을 떠난 적이 없다. 과거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거나, 그곳에서 출발하며 산다. 이 과거는 단순하고 짧은 일화 형태로 반짝이는 기억이 아니라 현재다. 시간이 몰고 온 수천 가지 변화는, 시간을 초월하는 현재의 이 감각과 비교하면 꿈처럼 덧없고 비현실적이며 환영처럼 기만이 심하다. 이 변화들은, 고통과 걱정거리를 안고 나에게 오는 사람들에게 내가 마치 완벽한 자신감과 용기를 지닌 의사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불안에 떨며 도움을 구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신뢰감은, 그들이 내 앞에 있는 한 나 스스로 이것을 사실로 믿도록 강요한다. 하지만 환자들이 나가자마자 난 그들에게 소리치고 싶다. 난 여전히 두려움에 떨며 학교 계단에 앉아 있는 소년일 뿐이라고, 내가 하얀 가운을 입고 이렇게 거대한 책상 앞에 앉아 환자들에게 충고를 하는 것은 정말 하찮은 일이고 사실은 거짓이라고, 우리가 같잖은 천박함으로 현재라고 부르는 현상에 속지 말라고…….
우리는 시간상으로만 광범위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공간적으로도 눈에 보이는 것들을 훨씬 넘어서 살고 있다. 우리는 어떤 장소를 떠나면서 우리의 일부분을 남긴다. 떠나더라도 우리는 그곳에 남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그곳으로 돌아와야만 다시 찾을 수 있는 것들도 있다. 단조로운 바퀴 소리가 우리가 지나온 생의 특정한 - 그 여정이 아무리 짧더라도 - 장소로 우리를 데리고 가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가까이 가고 우리 자신을 향한 여행을 떠난다. 우리가 낯선 정거장의 플랫폼에 두 번째로 발을 디디면, 그래서 확성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다른 곳과 확연히 구별되는 냄새를 맡으면 우리는 외형상으로만 먼 곳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 먼 곳에도 이른 것이다. 어쩌면 우리 스스로에게서 아주 외딴 구석, 우리가 다른 곳에 있을 때면 무척 어두워 보이지 않았던 곳에……. 그렇지 않고서야 승무원이 지명을 크게 외치고 기차가 멈추느라고 내는 끼익 소리를 들으면, 역 건물의 그림자가 우리를 삼키기 시작하면, 왜 그렇게 가슴이 뛰고 숨이 차는가? 그렇지 않고서야 왜 우리는 기차가 마지막으로 덜컥이며 완전히 멈추는 순간을 마술적이고 소리 없는 드라마라고 생각하는가?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은 플랫폼에 첫 발자국을 디딘 순간부터, 그 옛날 기차의 첫 덜컥임을 느꼈을 때 중단하고 떠났던 삶이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중단된 삶, 온갖 약속으로 가득한 그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것보다 더 흥분되는 일이 또 어디에 있으랴?
'지금'과 '여기'가 본질적이라는 확신으로 이것에 집중하는 행위는 오류이며, 또한 불합리한 폭력이다. 중요한 것은 확실하고 느긋하게, 알맞은 유머와 멜랑콜리로 '우리'라는 시간과 공간상의 내적인 경치 속에서 움직이는 일이다.
다음 날 취리히로 가는 기차를 탔다. 리스본행 비행기는 11시 조금 전에 이륙했다. 리스본에 도착했을 때는 이른 오후였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택시 운전사는 창문을 연 채 달렸다. 그의 가방과 나탈리 루빈에게서 온 책들을 방으로 날라준 종업원이 그레고리우스를 알아보고 폭포수처럼 포르투갈어를 쏟아냈다. 그는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25 /
리스본의 호텔.
친근함과 거리의 문제에서 왜 난 갑자기 문맹자가 된 걸까? 아니면 느끼지 못했을 뿐 지금까지 늘 그랬던가? 왜 나에게는 프라두의 친구 조르지 오켈리와 같은 사람이 없었을까? 신의와 사랑에 대해, 그리고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가?
26 /
파란 집. 아드리아나와 세 번째 만남.
"뭘 바라셨던 건가요?"
그레고리우스는 이렇게 말하며 자신이 마치 체스에서 결과를 예상하지 못하는, 대담한 수를 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데우와 같은 사람이 뭐가 옳은지 생각도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 충격 다음에, 그가 일해왔던 모든 것을 의심하게 하는 그런 비난을 받은 뒤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가리라고 생각하셨나요? 설마 그게 본심은 아니겠죠?"
그는 강경한 어조로 내뱉은 끝말에 스스로 놀라면서 이제 바로 쫓겨나리라고 생각했다.
아드리아나의 표정이 환해지면서, 거의 행복에 가까운 놀라움이 얼굴에 나타났다.
끝부분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다시 비통해졌다. 과거를 돌이킬 수 없이 흘러간 것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거부의 몸짓 같았다. 그러나 조금 전 그레고리우스의 공격을 받았을 때 그녀의 얼굴에는 기억의 폭정을 떨쳐버리고 과거의 감옥에서 탈출하려는 준비라고, 아니 준비가 아니라 절실히 바란다고 해석할 만한 뭔가가 스치고 지나가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레고리우스는 한걸음 더 모험을 했다.
"아드리아나, 아마데우는 이제 더 이상 기차 궤도를 들여다보지 않아요. 주앙에게도 가지 않아요. 더 이상 의사도 아니에요. 아마데우는 죽었어요. 그걸 알고 계시잖아요. 동맥류로 죽었다고요. 한 사람의 반평생이라고 할 31년 전, 이른 아침 아우구스타 거리에서요. 그날 전화를 받으셨잖아요."
도대체 왜, 도대체 왜 자기와 전혀 관계가 없는 이 노파를 얼어붙은 과거에서 끌어내어 흘러가는 현재 시간으로 데려오는 게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던 걸까? 그녀의 봉인된 정신을 깰 사람이 왜 자기라고 느꼈던 걸까? 어쩌다가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생각에 빠지게 된 걸까?
이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다.
아드리아나는 믿을 수 없는 일을 보는 아이와 같은 눈길로 시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들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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