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
호텔. 프라두가 아버지에게 쓴 편지
_ 오늘 아침 아버지의 운전사가 저를 역으로 데려다줄 때, 평소라면 매일 아침 아버지께서 앉아 계셨을 푹신한 자리에서 저를 갈기갈기 찢을 것만 같은 모순된 감정의 희생물이 되지 않으려면 이 감정을 말로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일을 표현한다 함은, 그 일이 지닌 힘은 보존하고 두려움은 제거하는 것이리라.' 페소아가 쓴 글입니다.
내가 의사가 된 이유도 결국은 그게 아니었을까? 아빠 척추의 끔찍한 질병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온갖 방법들을 동원하여 대항하기 위해, 아빠가 침묵하며 견디어야 하는 고통에 충분히 동참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아드리아나와 리타를 아빠에게서 멀어지게 한 그 비난, 그래서 사실로 확인된 그 질책을 피하기 위해…….
아빠, 왜 변호사가 아니라 판사가 된 거지? 왜 벌을 주는 사람의 편에 서게 된 거야? "판사라는 직업은 있어야 하니까." 아마 아빠는 이렇게 대답했겠지. 물론 여기에 반대할 말이 별로 없다는 건 잘 알아. 하지만 왜 하필이면 제 아버지가 그중 하나가 되어야 했나요?
예전에 멜로디가 한 말이었다.
"오빠 안에는 두 사람이 있었어요. 길 떠나길 원하는 여행자와 향수병을 앓는 사람."
그레고리우스는 사전을 내려놓고 따가운 눈을 비볐다. 날은 이미 훤하게 밝아 있었다. 그는 커튼을 치고 옷을 입은 채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지금 내가 나를 잃으려나 보다. 이 생각이 그를 더 이상 발이 닿지 않는 부벤베르크 광장을 방황하게 만들었다. 그게 언제였을까?
하지만 내가 나를 잃기 원한다면?
28 /
프라두가 다니던 중등학교에서 프라두의 편지를 계속 읽다가, 실우베이라의 집 방문, 실우베이라의 집에서 지내기로 함.
_ 아빠 , 왜 한 번도 아빠의 절망과 내적인 싸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어? 법무부에 쓴 사표 청원서를 왜 나한테 보여주지 않았어? 마치 전혀 쓴 적도 없다는 듯이, 왜 모두 없애버렸어? 자유로워지려던 아빠의 시도를 왜 엄마를 통해 들어야 하지? 자랑스러워야 할 일을 부끄러운 듯 이야기하는 엄마한테서?
아빠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 고통이었다면 그건 나도 어쩔 수 없었어. 고통을 당할 때 말의 힘이란 금방 고갈되고 마는 거니까. 하지만 고통이 아니라 살라자르와 인연을 끊지 못한 것, 피와 고통을 못 본 척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나 패배감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다면 왜 나와 이야기하지 않았어? 사제가 되려고 했던 아빠의 아들과!
실우베이라가 보이는 선의는 인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중등학교가 원인이었다. 아까 그는 그레고리우스에게 폐허가 된 학교에 대해 반복해서 물었고, 더 많이 알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그저 호기심일 수도 있었다. 동화 속의 저주 받은 궁전에 대한 호기심처럼. 그러나 지금 권하는 캠핑 장비들은 괴상한 그레고리우스의 행동을 그가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설사 이해가 아니더라도 그의 행동을 존중한다는 뜻이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이런 존중을 아무에게서도, 특히 삶이 온통 돈과 관련된 사업가에게서는 더더욱 기대하지 않았다.
마리아나 에사는 그의 눈을 보고 불면증을 읽어냈다. 하지만 그녀를 제외하면 실우베이라는 이곳에서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 프라두의 세계에서 살던 사람들이 그랬듯이, 말을 알아듣는 거울 정도로만 그를 취급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
두 사람이 악수를 함으로써 이 제안을 결정짓자마자 실우베이라가 포르투갈어로 말했다.
"난 주제라고 해. 자네는?"
29 /
호텔에서 실우베이라의 집으로 챙겨갈 짐을 싸고, 다시 프라두의 편지.
_ 아빠, 나와 아빠의 관계도 그랬어. 내가 지금까지 느끼고 행동한 모든 것을 통제한 강력한 문구, 숨어서 들끓는 문구가 내 안에 있다는 걸 얼마 전에야 깨달았어. 그 문구의 음험한 힘은, 거기에 내가 무의식적으로 진실이라고 인정한 타당성이 어쩌면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 온갖 교육에도 불구하고 - 내가 하지 못했다는 데 있어. 그 문구는 짤막하고 구약성서처럼 강압적이야. "타인은 너의 법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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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우베이라의 집으로 가기 전, 다시 프라두가 다니던 중등학교에 들러서 편지를 마저 다 읽음.
_ 접근하기 어려웠던 아버지, 어머니는 아버지의 침묵을 우리에게 옮겨야 하는 통역사였습니다. 아버지는 왜 자기 자신과 자기 느낌에 대해 말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셨나요?
사람들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정도로만 자기를 결정합니다. 아버지가 뭘 잃어버리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셨나요?
고통이나 굽은 등의 굴욕을 이야기하지 않는 아빠가 우리 모두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 영웅처럼 침묵하는 인내심, 허영심도 섞여 있던 그 인내심이 아빠가 욕을 퍼부으며 자기 연민의 눈물 - 우리가 닦아줄 수도 있었을 눈물 - 을 흘리는 것보다 우리를 더 압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건 아이들, 특히 아들인 나는 더욱 아빠의 용감함이라는 세력 범위에 포로가 되어 불평을 할 권리라고는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하기는커녕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아빠가 용감하게 견디어내는 고통 때문에 우리의 불평은 늘 억눌리고 삼켜지고 파괴되어버렸지.
왜 마음을 드러내는 게 창피한 뭐라도 된다는 듯이 평생 동안 행동했어? 예의에 어긋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감추어야 할 단점이라도 된다는 듯이?
편지는 여기서 끝났다. 그레고리우스는 편지지를 봉투에 넣다가 마지막 장 뒷면에 쓰인 메모를 발견했다. 내가 아빠의 상상에 대해 아는 게 있던가? 왜 우리는 부모의 상상에 대해 이다지도 모를까? 어떤 사람이 상상을 통해 받는 이미지에 대해 알지 못하면 우리는 이 사람에게서 과연 무엇을 알 수 있을까?
31 /
카실랴스의 요양원. 주앙 에사와 만남. 프라두, 조르지, 에스테파니아 에스피노자에 대한 이야기.
"아마데우는 아주 역설적이었소. 자신감에 넘치고 두려움을 모르는 행동 뒤에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시선을 느끼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이었소. 우리에게로 온 이유도 그거였소. 멩지스 사건 때문에 받은 비난으로부터 스스로를 변호하려는 것. 내 생각에 에스테파니아는 그가 드디어 법정 바깥으로, 자유롭고 활기찬 인생의 장소로 나갈 수 있는 기회였던 것 같소.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게 되든 간에 이번에는 오로지 그의 의지와 열정대로 살 기회…….
난 그가 이 기회를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오. 그는 자기 자신을 상당히 잘 알고 있었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를 아는 것보다……. 하지만 장애물이 있었소. 조르지를 향한 신의라는 그 철통같은 장애물."
「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들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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