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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 프라두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조사.
_"제가 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럼 도대체 뭘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죠? 영원이라는 관점요? 그런 건 없습니다."
_ 어떤 특정한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지 경박한 변덕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어떻게 구분하나요? 아버지, 그렇게 하시기 전에 왜 저에게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어요? 적어도 아버지의 행동을 이해라도 할 수 있도록 말씀을 하시지 그랬어요?
16 /
프라두 아버지가 살던 집. 프라두의 둘째 여동생 멜로디와의 만남.
삶의 숨쉬는 집이었다.
"마리아 주앙.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군요. 전혀 몰랐어요. 그러니까 오빠는 그때부터 이미 마리아 주앙을 사랑했던 것 같네요. 그 사랑은 멈춘 적이 없었어요. 오빠 인생에서 참 지순했던 사랑, 손을 대지 않았던 사랑이었지요. 아마 입맞춤도 해본 적이 없을 거예요. 하지만 아무도, 그 어떤 여자도 그녀와 견줄 수 없었어요. 그녀는 결혼했고 아이들도 있었지만,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어요. 오빠는 뭔가 심각한 고민이 있으면 그녀에게 갔지요. 어떤 의미에서는 마리아 주앙만, 오직 그녀만이 어떤 사람인지 알 거예요. 오빠는 비밀을 나누면서 사람들이 얼마나 친해지는지 알았어요. 이 분야의 대가, 명수라고 할 수 있었죠. 오빠의 비밀을 모두 아는 여자는 마리아 주앙이라는 걸 우린 모두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파치마는 괴로워했고, 아드리아나 언니도 그녀를 아주 증오했어요."
_ 다른 사람에게 뭔가 말을 할 때, 이 말이 효과가 있기를 어떻게 바랄 수 있을까? 우리를 스치고 흘러가는 생각과 상(像)과 느낌의 강물은 너무나 강력하다. 이 강물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하는 말이 우연히, 정말 우연하게도 우리 자신의 말과 일치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말을 쓸어내고 지워버린다. 혹시 남겨둔다면 기적이다. 나는 다른가? 내 마음의 강물이 방향을 바꿀 정도로 다른 사람의 말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인 적이 있었던가?
_ "그냥 말을 하는 거야. 알아? 사람들은 말하기를 좋아하지. 원래 그런 거야. 그게 다야. 그냥 말하기."
"마음이 만나지는 않고?"
내가 물었다.
"뭐라고!"
그는 소리를 지르더니 자지러지게 웃기 시작했다.
"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무자비하고 타협하지 않는 오빠의 비판을 좋아했어요. 하지만 그 비판이 사형집행처럼 느껴지고 파괴적으로 보이는 건 싫었어요. 그럴 때면 오빠와 부딪치지 않으려고 했어요. 기념비적 존재인 우리 오빠와……."
"편지에서 이 부분이 무척 마음에 와 닿았어요. 오빠가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그리움, 공을 가지고 노는 소년이 되고 싶은 소망이 묻어나는 것 같았거든요. 오빠는 벌써 네 살 때 글을 읽기 시작해서 손에 잡히는 건 뭐든 읽었다고 해요. 초등학교에서는 지루해서 죽을 정도였고, 중등학교에서도 두 번이나 월반을 했어요. 스무 살때는 온갖 것들을 모두 알게 됐고,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스스로에게 묻기에 이르렀어요. 그러느라 공놀이 같은 건 잊은 거지요."
17 /
프라두가 다녔던 중등학교로 찾아감.
"그레고리우스, 그건 글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말하는 건 글이 아니라고요. 그냥 말을 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하는 말을 믿을 수 없다면, 그럼 말로는 도대체 뭘 해야 하느냐고 그레고리우스가 물었다. 독시아데스는 껄껄 웃었다.
"스스로 말을 하는 계기로 삼아야지요! 그래서 말이 계속 이어지도록."
그레고리우스를 외부세계와 차단하는 불가사의한 커튼이 드리워진 듯했다. 그는 베른에 없었지만 베른에 있었고, 리스본에 있으면서도 리스본에 있지 않았다.
그의 의지가 멈추었기 때문에 시간이 멈추었고, 이 세상도 멈추어 섰다.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을 만큼 조용히…….
_ 영혼의 그림자. 사람들이 어떤 한 사람에 대해 하는 말과, 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말 가운데 어떤 말이 더 진실에 가까울까? 다른 사람에 대해 하는 말이 스스로에 대해 하는 말처럼 확실한가? 스스로의 말이라는 것이 맞기는 할까? 자기 자신에 대해 사람들은 신빙성이 있을까? 그러나 내가 고민하는 진짜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정말 고민스러운 문제는 이런 이야기에 도대체 진실과 거짓의 차이가 있기나 할까라는 것. 외모에 관한 이야기는 물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 길을 떠날 때는? 이 여행이 언젠가 끝이 나기는 할까? 영혼은 사실이 있는 장소인가, 아니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우리 이야기의 거짓 그림자에 불과한가?
그레고리우스는 눈을 감고, 수업 도중에 교실을 나와 남의 이목을 끌지 않고 학교를 볼 수 있는 어떤 건물의 모퉁이까지 가서 섰던 그날을 떠올렸다. 열흘 전의 감정이 다시 한 번 느껴졌다. 자신이 학교와 학생들, 수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그리워할 것인지를 깨닫게 된, 미처 상상도 하지 못한 격렬한 감정……. 그때와 같으면서도, 동일하지 않으므로 더 이상 같지는 않은 감정이었다. 더 이상 같지 않다는 것, 다른 감정임을 깨닫고 나니 마음이 아팠다. 그는 일어서서 노란 칠이 벗겨지고 퇴색한 건물 전면을 눈으로 훑었다. 갑자기 더 이상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 고통은 이제 호기심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는 닫혀 있는 문을 열었다. 녹슨 경첩이 공포영화에서처럼 삐걱 소리를 냈다.
18 /
벨렘의 한 교회 요양원. 프라두의 선생이었던 바르톨로메우 신부와 만남.
"아마데우는 역사라는 배에 탄 대담무쌍한 모험가라고 할 만했소. 노래도 하고 설교도 하지만 선원들이 뭍에 있는 주민들을 야비하게 공격할 경우, 필요하다면 무기를 써서라도 주민들을 지키기로 굳게 결심한 모험가 말이오."
"아마데우는 물론 오만했소. 하지만 그 오만은 모든 한계를 넘어설 만큼 엄청나서 사람들은 방어할 생각을 잊은 채 스스로 법칙을 지닌 경이로운 자연 현상을 보듯 그저 바라볼 뿐이었소. 그를 사랑하던 사람들은 그가 다이아몬드 원석, 갈지 않은 보석이라고 생각했지. 그를 싫어하던 사람들은 그가 사람을 무시한다고 했소. 그건 상대방을 아프게 할 수도 있었소. 그리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명백하게 드러나던 독선,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빠르고 더 반짝이며 더 아는 사람들이 보통 지니고 있는 이 특성도 싫어했소."
"아마데우의 곧은 시선을 두려워하는 선생들도 있었소. 무시하거나 도전, 아니 싸우자는 시선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소. 하지만 그는 선생들에게 설명을 바르게 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정말 단 한 번밖에 주지 않았지. 실수를 하거나 우물쭈물해도 그가 적의를 품거나 경멸하는 눈빛을 보내는 건 아니었소. 실망했다는 것조차 드러내지 않았지. 그냥 시선을 돌렸을 뿐이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 자리를 뜰 때도 차분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지. 하지만 모욕을 주지 않으려는 그의 뚜렷한 의도야말로 정말 파괴적이었소."
"하지만 아마데우가 늘 도전적인 건 아니었소. 아니, 모든 점에서 한 가지 틀로는 전혀 설명할 수 없었지. 마음속에 존재하는 갈라진 틈과 균열과 단층은 그를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게 했소. 위압적이고 도를 지나친 자기 태도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알아채면 아마데우는 깜짝 놀라 의기소침해졌고, 이런 상황을 다시 제자리로 돌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소."
"갑자기 몰려드는 우울함도 아마데우의 또 다른 면이었소. 우울증에 시달릴 때면 잠깐 동안 그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된 듯했지. 극도로 겁이 많아져서는 아주 작은 소음에도 채찍에라도 맞은 듯 깜짝 놀라곤 했소. 그럴 때면 그는 사는 게 얼마나 힘든가를 말하는 화신이라도 된 것 같았소."
"재능이 많았던 아마데우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소. 하지만 못하는 게 한 가지 있었지. 놀고 즐기고 절제 없이 행동하는 거였소. 엄청난 각성과 통찰과 자제를 향한 열정적인 욕구는 자기가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지."
"아마데우는 그녀를 사랑했소. 다른 사람들은 흉내도 내지 못할 만큼 순결하게 사랑했지. 질투심을 감출 수 없었던 사람들은 이런 감정을 비웃었어요. 사실 여학생들만 느꼈던 질투심이긴 하지만……. 아마데우는 마리아 주앙을 사랑했고, 또 숭배했어요. 그렇소, '숭배'라는 게 옳은 표현이오. 아이들에게 이런 단어가 보통은 어울리지 않지만 말이오. 하지만 아마데우는 다른 아이들과 많이 달랐으니까. 마리아 주앙은 특별히 예쁘다고는 할 수 없었소. 공주와는 거리가 멀었지. 내가 알기로는 성적이 좋은 것도 아니었어. 아마데우가 왜 그녀를 좋아하는지 아무도 몰랐소. 특히 이 귀족 왕자님의 눈길을 끌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했을 건너편 여학교의 학생들은 정말 이해할 수 없었지. 그런데 어쩌면 마리아 주앙이 그에게 눈이 멀지 않았다는 것, 다른 사람들처럼 그에게 압도당하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을 거요. 그에게 필요했던 게 바로 그거였을지도 몰라요. 그를 지극히 당연하게 자기와 똑같이 보는 태도 말이오. 자연스럽고 수수한 말과 눈빛과 행동으로 그를 그 자신에게서 구원할 동등함……."
19 /
다시, 프라두가 다녔던 중등학교.
그는 프라두의 글을 호텔 방이 아니라 원래 그 글이 낭독된, 폐허가 된 중등학교에서 읽고 싶었던 것이다.
_ 나는 대성당이 없는 세상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유리창의 반짝임과 서늘한 고요함과 명령을 내리는 듯한 정적이, 오르간의 물결과 기도하는 사람들의 성스러운 미사가, 말씀의 신성함과 위대한 시의 숭고함이 필요하니까. 나는 이 모든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자유와 모든 잔혹함에 대항할 적대감도 필요하다. 한쪽이 없으면 다른 쪽도 무의미하다. 아무도 나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지 말기를.
불경한 사제는 세상의 진부함에 도전하기 위해 독자적인 대성당을 건축할 것이다. 그것이 아름다운 언어로 만들어진 건물에 불과할지라도…….
「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들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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