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
기차. 베른에서 파리까지.
갑자기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베른에서 마지막으로 본 집이 멀어진 이후 익숙한 것을 붙잠아보려고 시작한 이 일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작별하기'로 변했다. 기차가 서서히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는 생각에 잠겼다. 무엇인가와 작별을 할 수 있으려면 내적인 거리두기가 선행되어야 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정체불명의 '당연함'은, 그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확실하게 알려주는 '명료함'으로 바뀌어야 했다. 전체적인 윤곽을 지닌 그 무엇인가로 응집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의 인생에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더 많은 영향을 주었던 학생들의 목록처럼.
5 /
파리에서 잠시 시간을 보낸 뒤, 리스본행 야간열차 탑승.
당신은 절대 날 원했던 게 아니야.
_ 소리 없는 우아함. 익숙한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이 격렬한 내적 동요를 동반하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드라마일 것이라는 생각은 오류다. 이런 생각은 술 취한 저널리스트와 요란하게 눈길을 끌려는 영화제작자, 혹은 머리에 황색 기사 정도만 들어 있는 작가들이 만들어낸 유치한 동화일 뿐이다. 인생을 결정하는 경험의 드라마는 사실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할 때가 많다. 이런 경험은 폭음이나 불꽃이나 화산 폭발과는 아주 거리가 멀어서 경험을 하는 당시에는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인생에 완전히 새로운 빛과 멜로디를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 없이 이루어진다. 이 아름다운 무음(無音)에 특별한 우아함이 있다.
조용한 고어(古語)들을 그 무엇보다도 더 숭배하며 사랑하는 소년이 아니라, 그때 돈 상자에서 돈을 꺼냈던 그 소년이 자기 인생을 결정했더라면 그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6 /
리스본행 야간열차. 실우베이라와 만남. 리스본 도착.
"사람들은 가끔 정말 두려워하는 어떤 것 때문에 다른 무엇인가에 두려움을 갖기도 하지요."
"자기가 지닌 공포의 진짜 이유를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레고리우스는 실우베이라의 침대에 걸터앉아 자기 이야기를 했다. 키르헨펠트 다리에서 만난 포르투갈 여자에 대한 이야기는 빼놓았다. 그런 이야기는 독시아데스에게는 할 수 있었지만, 낯선 사람에게는 아니었다. 실우베이라가 프라두의 책을 봐도 되겠냐고 묻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레고리우스는 다른 사람이 그 책을 읽고 뭔가 말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레고리우스는 그게 자기가 원하던 삶이었노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말하는 중간에 이미 자기 말이 고집스럽고 완강하게 들린다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이틀 전, 키르헨펠트 다리에서 편지를 읽던 포르투갈 여자를 만났을 때만 해도 이런 고집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때도 똑같은 대답을 했겠지만, 고집은 전혀 묻어나지 않았을 테고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호흡처럼 자연스럽게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왜 여기 앉아 있는 겁니까? 그레고리우스는 다음에 올 질문이 겁이 났고, 잠깐 동안 이 우아한 포르투갈 사람이 마치 종교 재판관처럼 생각됐다.
_ 모순적인 갈망. 난 사람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국에서 가장 엄격하다는 중등학교 땅을 1922일 동안 밟았다. 아버지가 보냈으므로. "학자가 될 필요는 없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으려고 했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실패했다. 이곳 사람들의 손에 부스러지지 않으려면 날짜를 세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3일째 되던 날 이미 깨달았다.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의 분노에 대해 전부 자세히 알고 싶었다.
7 /
리스본의 호텔. 시내를 돌아다니던 중 넘어져서 안경이 부서짐.
_ 이렇게 계속 학교로 다시 찾아오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과거는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갔으나 미래는 아직 시작되기 전이었던, 그 순간의 학교 운동장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시간은 머뭇거리며 숨을 멈추고 있었다. 그 뒤로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던 일……. 마리아 주앙의 갈색 무릎, 그녀의 밝은 옷에서 나는 비누 냄새로 돌아가고 싶은 건가. 아니면 지금의 내가 아닌,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었던 그 시절로 다시 가고 싶은 - 꿈과 같이 격정적인 - 갈망인가.
이 갈망은 약간 이상하고 역설의 냄새가 나며, 논리적으로 독특하다. 아직 미래를 경험하지 않은, 생의 갈림길에 서 있는 사람은 이런 갈망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지나온, 그래서 과거가 되어버린 미래를 겪은 사람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돌이키기 위해 옛날로 돌아가길 원한다. 지나온 시간이 괴롭지 않은 사람도 돌아가려고 할까? 다시 한 번 손에 모자를 쥐고 따뜻한 이끼 위에 앉아 있고 싶은 것,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길 원하면서 그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이미 겪은 나를 이 여행에 끌고 가려고 하는 것, 이는 모순적인 갈망이 아닌가. 내가 요즘 가끔 생각하듯이 당시의 그 소년이 아버지의 소원에 거역하고 의학부 강의실에 들어서지 않는 걸 상상할 수 있을까? 그렇게 반항한 소년이 여전히 나였을 수 있을까. 당시의 나에게는 갈림길 앞에서 다른 길을 갈망할 만한 고통을 경험한 관점이 없었다. 그러니 경험을 하나씩 지워버리고 시간을 되돌려, 마리아 주앙이 입은 신선한 냄새와 그녀의 갈색 무릎에 빠져 있던 당시의 그 소년으로 돌아가는 게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들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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