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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transcription/「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 ____ 01. 출발 _ 1

1 /

베른의 키르헨펠트 다리. 수수께끼의 포르투갈 여자와 우연히 마주침

 

"모국어가 뭐지요?"

그는 조금 전에 이렇게 물었다.

"포르투게스(Português)"

 

그는 57년이 지난 후 처음으로 자기 인생을 이제 완전히 장악하려고 한다는, 불안과 해방감이 섞인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2 /

에스파냐 책방. 아마데우 프라두의 책 『UM OURIVES DAS PALAVRAS(언어의 연금술사)』 발견 

 

포르투갈어의 멜로디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는 오직 한 가지 이유로 여기 이 자리에 있다는 것, 어쩌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여기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견디기엔 혼자인 편이 나았다.

 

_ 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형태와 색채와 멜로디를 주는 경험들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다가 우리가 영혼의 고고학자가 되어 이 보물로 눈을 돌리면, 이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게 된다. 관찰의 대상은 그 자리에 서 있지 않고 말은 경험한 것에서 미끄러져 결국 종이 위에는 모순만 가득하게 남는다. 나는 이것을 극복해야 할 단점이라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혼란스러움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익숙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경험들을 이해하기 위한 왕도라고 생각한다. 이 말이 이상하고 묘하게 들린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나서야 깨어 있다는 느낌, 정말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_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사겠습니다"

그레고리우스가 말했다.

주인은 책을 덮고는, 아까 여자 손님이 그랬던 것처럼 손으로 부드럽게 표지를 쓰다듬었다.

"이 책은 작년에 리스본의 한 헌책방에 들렀다가 사 온 겁니다. 잡동사니를 모아둔 상자에서 찾았지요. 서문이 마음에 들어 샀던 것 같군요. 그런데 그 후 한동안 잊고 있었네요."

그는 지갑을 찾느라 분주한 그레고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선물로 드리지요."

 

3 /

베른을 떠나 기차에 탑승.

 

오늘 오전부터 제 인생을 조금 다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문두스 노릇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새로운 삶이 어떤 모습일지 저도 모릅니다만, 미룰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시간은 흘러가 버릴 것이고, 그러면 새로운 삶에서 남는 건 별로 없을 테니까요. 그레고리우스는 크게 소리 내어 이렇게 말해보았다. 이 말은 옳았다. 그는 자기 인생에서 이렇듯 옳고 의미 있는 말을 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전화기에 대고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허하면서도 장엄한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_ 뚜렷하지 않은 심연. 인간 행위의 표면 아래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비밀이 있을까? 아니면 인간은 자신이 만천하에 드러내는 행동과 완벽하게 일치할까?

아주 이상하게 들리지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 도시와 타호 강을 비추는 햇빛처럼 내 마음속에서 늘 변한다. 뚜렷하고 예리한 그림자를 만드는, 반짝이는 8월의 매력적인 햇빛은 인간에게 숨겨진 심연이 있다는 나의 생각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느끼게 만든다. 신기루와 비슷한, 햇빛에 반짝이는 물결을 너무 오랫동안 바라보면 나타나는 진기하면서도 약간은 감동적인 환상처럼. 그러나 흐린 1월에 도시와 강이 그림자도 없는 희미한 빛과 지루한 잿빛 지붕에 덮이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알 수 없는 심연에 숨겨진 내적인 삶이 겉으로 드러내는 표현, 그것도 심연에는 전혀 가깝지 않으며 아주 불완전하고 거의 우스꽝스러우리만큼 약한 표현일 뿐이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_ 황금 같은 침묵 속의 언어. 신문을 읽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카페에 앉아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다 보면 쓰인 글과 하는 말에서 보고 듣는 늘 똑같은 언어 때문에 - 어법이든 말장난이든 은유든 - 혐오감과 구역질을 자주 느끼게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것은, 내 말에 귀를 기울여보면 나 역시 끊임없이 똑같은 말을 한다는 사실이다. 이 말들은 소름이 끼치도록 낡았고 평범하며, 수백만 번 사용하여 닳고 닳은 것들이다. 이런 말들에도 과연 의미가 있을까? 물론 말은 나누는 기능을 한다. 사람들은 이 말에 따라 행동하고 웃고 울며,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가고, 종업원은 커피나 차를 가지고 온다. 하지만 내가 묻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말이 생각을 표현하고 있는가?" 라는 점이다. 이런 말이란 그저 쓸데없는 수다가 새겨진 흔적으로써 사람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효과음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그럴 때면 나는 해변으로 가서 목을 길에 늘여 바람에 머리를 맡기고, 우리에게 익숙한 것보다 훨씬 더 차가운 바람이 불기를 바란다. 낡은 단어들과 진부한 언어 습관을 내 머릿속에서 날아가게 하고, 늘 똑같은 잡담의 찌꺼기를 묻히고 사는 나를 씻겨 깨끗한 정신으로 돌아오게 해줄 바람. 그러나 그런 다음에도 뭔가 할 말이 생기면, 예전과 조금도 달라진 바 없는 나를 보게 된다. 내가 원하는 정화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난 이를 위해 무엇인가를, 언어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을? 내가 나의 언어에서 탈출하여 다른 언어로 가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언어에서 도피하는 게 아니다. 언어를 새로 발명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건 도대체 무엇인가?

 

그들은 그가 하루 동안 지나온 엄청난 거리를 절대 이해할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바로 그게 문제였다. 그는 이미 그 거리를 지나왔고, 자신이 감행한 이 조용한 여행을 다른 사람들이 무위로 돌려버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레고리우스는 유럽 지도를 꺼내 펴놓고, 기차를 타고 어떻게 리스본으로 갈지 생각했다. 전화로 알아보니 역의 안내 데스크는 6시가 되어야 문을 열었다. 그는 짐을 싸기 시작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들녘